[파워K우먼]왕복 2시간 걸려 컴퓨터 배우던 소녀…"AI 시대엔 여성 감수성이 경쟁력"
AI 시대엔 여성들의 섬세함이 경쟁력
"앞으로 후임 양성 위해 애쓸 것"
김덕재 한국IT여성기업인협회장은 자신을 '별난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여성은 사무보조나 서비스직에 취업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1980년대, '취준생'이던 김 회장은 서울 중구 동방프라자에 단 2대 뿐이던 컴퓨터를 배우기 위해 매일 왕복 2시간 거리를 오고 갔다. 다른 업계에 몸담으면서도 정보통신기술(IT)에 대한 꾸준한 관심으로 관련 자격증들을 취득했고 2000년대 초부터는 공동 현관을 모바일로 관리하는 사물인터넷(IoT) 기기를 아파트 단지 등에 납품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IT를 통해 서로 다른 산업들이 연결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는 머지않아 바뀔 세상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내다봤다고 했다.
인공지능(AI)이 새로운 표준이 된 지금, 김 회장은 그간 IT 업계에 종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 IT기업인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올해 초에는 연임을 확정 지으며 협회장으로서 새로운 도전과 혁신에 나설 채비도 마쳤다. 김 회장을 만나 AI 시대에 필요한 역량과 여성 IT 기업인들이 마주할 기회와 과제에 관해 물었다.

-한국IT여성기업인협회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면.
▲2001년 설립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유일의 여성 기업인 단체다. 소프트웨어, 인공지능(AI), 플랫폼, 콘텐츠, 보안 등 ICT 전 분야에서 활동하는 460여개 기업이 회원사로 참여하고 있다. 협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여성 IT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정부와 정책 당국에 전달해 정책과 현장을 잇는 가교 구실을 하는 것이다. 아울러 ICT 교육과 창업 지원 등을 통해 새로운 여성 기업인을 육성하는 데에도 힘쓰고 있다.
최근에는 AI가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하면서 협회 회원사의 영역도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제조, 건설, 주거, 복지, 안전, 돌봄 등 전통 산업 분야 기업들도 AI와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기 위해 협회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제는 어떤 산업에 속해 있는지가 아니라 기술과 데이터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디지털 전환을 이뤄내느냐가 기업의 경쟁력과 성장 가능성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고 생각한다.
-올해 2월, 제11대 회장에 연임했다. 다시 한번 협회를 이끌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 회장직을 맡았을 때 협회가 새롭게 시작하고, 새롭게 도전하고, 새롭게 혁신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Re-Start, Re-Challenge, Re-Innovation'이라는 방향을 제시했다. 지난 임기 동안에는 여성 IT 기업인의 경쟁력을 높이고, AI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생태계를 만드는 데 집중해왔다.
이제는 그동안 다져온 기반 위에서 기업들이 AI로 촉발된 기술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협회가 실질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해를 '젊은 기업인 육성'의 원년으로 삼고 재직자 대상 AI 교육을 포함해 이공계 여대생의 취·창업을 위한 지원 활동도 적극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최근엔 역대 최연소인 40세 젊은 수석부회장을 영입해 협회 전반에도 변화를 꾀하고 있다.

-IT 업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당시 여성으로서 겪었던 어려움이나 편견은 없었나.
▲지금보다 훨씬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강했던 시절이다. IT 업계 역시 주요 네트워크와 의사결정 구조가 대부분 남성 중심으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전문성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다. 첫째 아이를 낳고 직접 개발한 제품으로 창업했을 때가 기억난다. 당시에는 젊은 여성이 '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조차 어색하게 받아들여져 한동안 명함에도 대표나 사장이 아닌 '실장'이라고 적고 다녔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복귀했을 때는 더 황당한 일도 겪었다. 같은 회사에 있던 남성 임원이 내가 개발한 제품을 그대로 모방해 거래처에 납품한 적이 있었다. 억울했지만 당시에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현재 국내 IT 산업에서 여성 기업인들이 마주하는 가장 큰 장벽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여성 IT 기업인들이 마주하는 가장 큰 장벽은 결국 인재, 자본 그리고 네트워크라고 생각한다. AI와 디지털 전환이 빨라질수록 기업 경쟁력은 인재를 확보하고 기술을 사업화해 시장과 연결하는 역량에서 결정된다. 하지만 많은 여성 IT기업들은 AI·소프트웨어 전문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투자 유치나 시장 진입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제약을 경험하고 있다.
산업 네트워크의 한계도 여전하다. 기술 기업은 대기업, 공공기관, 연구기관, 투자기관 등 다양한 주체와 연결돼야 성장할 수 있는데, 여성 기업인들은 이런 기회와 정보에 접근하는 통로가 상대적으로 좁은 편이다. 결국 여성 기업인들의 어려움은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인재 확보와 투자, 시장 진입, 네트워크가 복합적으로 얽힌 구조적 문제라고 본다. 협회도 단순한 역량 강화 교육을 넘어 기업 간 연결과 협력을 확대하고, 여성 IT 기업인들이 더 많은 기회와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AI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AI 시대에 여성 IT 기업인들이 발휘할 수 있는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I는 하나의 도구고, 결국 그 도구를 의미 있게 활용하는 주체는 사람이다. AI라는 훌륭한 도구에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이 지닌 특유의 섬세함과 감수성, 공감의 힘은 AI 시대에 더욱 강력한 무기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
여성 기업인들에게 요구되는 역량도 달라졌다. AI 시대에는 단순히 기술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산업 현장의 문제 해결과 실제 가치 창출로까지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AI와 데이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물론이고, 산업 현장의 문제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
-인생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거나 후배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은 무엇인가.
▲최근 선물로 받아 읽은 책인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의 <인생수업>이다. 이 책은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한 사람들이 깨달은 인생의 본질을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며 결국 인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은 '어떻게 더 잘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특히 류시화 시인이 번역하며 남긴 "살고, 사랑하고, 웃고, 배우라.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다"라는 문장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사업을 하고 협회를 이끌며 바쁘게 살아왔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라고 생각한다. 가슴 뛰는 일을 미루지 않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실패 속에서도 배우는 것 그리고 끝내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믿는다. 후배들에게도 성공만을 향해 달려가기보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 질문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질문이 결국 사람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후배 여성 기업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기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결국 사람은 도전하는 과정에서 배우고, 실패를 겪으면서 더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자기답게 살아갔으면 한다는 말이다. 남들이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내가 가진 강점과 진심으로 세상에 필요한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더 믿었으면 한다. 하나의 도전은 작아 보일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용기 있게 길을 내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길을 보고 힘을 얻는다. 그렇게 함께 피어날 때 산업도, 사회도 조금씩 바뀌게 된다고 생각한다.
10년 뒤에는 '여성이기 때문에 어려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이 가진 통찰과 감각 그리고 리더십이 AI 시대의 중요한 경쟁력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그런 사회를 위해 협회도 후배들의 도전을 돕는 더 든든한 플랫폼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이서희 기자 daw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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