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확산 고삐 풀린다” 美, 사우디 우라늄 농축 허용 우려 확산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22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의 우라늄 농축을 사실상 허용하는 원자력 협정을 공식 승인하면서 파장이 확산하고 있다. 미국이 강조해온 핵 비확산 원칙을 허물고 중동 지역의 핵 무장 여론을 자극해 지정학적 위기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이날 압둘아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과 ‘123 협정(123 Agreement)’에 서명했다고 에너지부가 엑스를 통해 발표했다. 에너지부는 “123 협정은 미국 기업들이 사우디의 원자력 에너지 프로그램에 폭넓은 참여를 제공함으로써 미국 사업과 노동자, 공급망에 혜택을 주는 동시에 사우디의 에너지 수요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이번 협정에 따라 웨스팅하우스 등 미국 원자력 업계가 사우디에서 민간 원자력 발전소 등을 건설해 수십억 달러의 수익을 거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23 협정은 미국 원자력법(Atomic Energy Act) 123조에 따른 협정으로 미국이 타국 또는 국제기구와 민간 원자력 기술·연료·장비를 협력할 때 체결하는 양자 협정이다. 한국과 일본, 유럽연합(EU) 등도 미국과 123 협정을 맺고 있다.
미국·사우디 협정의 세부 사항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핵심은 미국과 사우디가 핵연료 생산 경제성에 관한 공동 연구를 2년간 한 후 사우디 영토 내에서 우라늄을 농축하거나 플루토늄을 재처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될 경우 이를 허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미국 기업들이 사우디에 우라늄 농축 시설을 건설·관리하는 ‘블랙박스’ 방식이지만, 결과적으로 사우디 영토 내에 핵심 핵연료 시설이 설립되는 것이다.
협정에는 또 국제 사찰단이 핵연료를 무기 프로젝트로 유용할 수 있다고 의심되는 사우디 내 시설에 진입하는 것을 제한할 수 있는 조항도 있다. 협정에는 사우디와 합의한 비밀 부속 서한도 포함돼 있다.
문제는 이번 협정이 사우디 등 중동의 핵 무장 도미노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실제로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의 핵무장 의사를 시사한 바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날 ‘사우디의 우라늄 농축 허용은 실수’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우라늄 농축 능력이 확산할 때마다 핵무기로 인한 재앙의 위험은 커진다”며며 “휘발성이 강한 중동 지역 전체로 우라늄 농축 능력이 확산하는 것을 막기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터키와 이집트, 아랍에미리트(UAE) 등이 너도나도 우라늄 농축 능력 확보에 나설 것이라는 우려다.
미국이 지난 2009년 당시 스스로 정립했던 원자력 비확산 분야의 ‘골드 스탠더드(Gold Standard)’을 사실상 포기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미국은 당시 UAE와 123 협정을 체결하며 UAE가 저농축 우라늄 등을 자국에서 생산하지 못하도록 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수시 사찰을 허용하는 등 엄격한 기준을 세웠고 이런 기준들은 ‘골드 스탠더드’라고 불려왔다. 하지만 사우디와의 협정에서는 이런 기준들이 모두 후퇴했다.
이번 협정은 원자력법에 따라 의회의 검토를 거쳐야 하며 의회는 거부 권한이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 협정은 많은 공화당 의원들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보이지만 사우디가 민간 원자력 프로젝트를 이용해 궁극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는 우려로 미국 양당 일부 의원들과 이스라엘 관리들은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고 전했다. 민주당 소속 브레드 셔먼 하원의원은 이날 엑스에 “중동 지역의 핵 확산을 막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 대통령이 단지 미국 기업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핵 확산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같은 당 에드 마키 상원의원도 성명을 내고 “이 협정은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협할 것”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어 협정이 의회에서 저지될 가능성은 작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이날 필리핀 마닐라에서 기자들을 만나 이번 협정이 사우디의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질문에 “미국은 핵확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어떠한 협정도 전 세계 어떤 국가와 체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 말씀드린다”고 말했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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