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당 163엔’ 40년만에 바닥친 엔화…한국이 웃을 수 없는 이유

박세환 2026. 7. 22. 09:27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40년 만의 ‘엔화 붕괴’
원화는 반등…엔저, 한국 기업엔 더 매서워
2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엔화 가치가 약 40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국내 금융시장과 수출기업에도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최근 원·달러 환율은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등에 힘입어 고점에서 내려오고 있지만, 엔화가 원화보다 빠르게 약해지면서 한국 기업의 가격 경쟁력은 오히려 떨어질 수 있어서다. 엔화를 빌려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의 확대와 향후 청산 가능성도 국내 증시의 변동성을 키울 요인으로 꼽힌다.

22일 외환시장에 따르면 달러·엔 환율은 전날 미국 뉴욕시장에서 장중 달러당 163.24엔까지 치솟았다. 달러·엔 환율이 163엔을 넘어선 것은 1986년 12월 이후 39년 7개월 만이다. 환율 상승은 달러를 사는 데 더 많은 엔화가 필요해졌다는 뜻으로, 엔화 가치는 그만큼 낮아졌다.

엔화 급락은 당장 원화에도 부담을 줄 수 있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원화와 엔화를 아시아 주요 통화로 묶어 거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엔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면 아시아 통화 전반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고, 원화를 팔아 달러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번질 수 있다.

다만 최근에는 원화와 엔화의 흐름이 다소 엇갈리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한때 1500원대 중반까지 올랐지만 최근에는 상승 폭을 상당 부분 되돌렸다. 한은이 지난 16일 기준금리를 연 2.50%에서 2.75%로 0.25% 포인트 올린 데다 반도체 수출 호조와 외국인 자금 유입 기대가 원화 가치를 떠받치고 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인상한 것은 3년 6개월 만이다.

한은의 금리 인상은 원화 자산의 상대적인 매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금리가 오르면 원화로 표시된 예금과 채권의 수익률도 높아질 수 있어 외국인 투자자의 원화 자산 이탈을 제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시장에서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것도 원·달러 환율의 상단을 누르는 요인이다.

그러나 원화 가치가 안정된다고 해서 한국 경제가 엔저의 충격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엔화만 빠르게 떨어지고 원화가 상대적으로 강해질 경우 한국 수출기업이 받는 압박은 더 커질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자동차와 기계, 철강, 조선, 전자부품, 석유화학 등 여러 제조업 분야에서 경쟁한다. 같은 가격에 제품을 수출하더라도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일본 기업이 달러로 벌어들인 수익을 엔화로 환산한 금액은 늘어난다. 일본 기업은 늘어난 환차익을 활용해 제품 가격을 낮추거나 마케팅과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할 여력이 생긴다.

11일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엔화와 달러화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면 원화가 엔화보다 덜 떨어지거나 오히려 강세를 보이면 한국 기업은 가격을 낮출 여지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원·달러 환율 하락은 수입물가를 낮추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일본 기업과 경쟁하는 수출업체에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셈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 기업이 미국과 유럽 등 제3국에서 경쟁하는 제품일수록 엔저의 영향이 커진다. 일본 업체가 엔화 약세를 활용해 달러 표시 판매가격을 낮추면 한국 업체도 가격 인하 압박을 받는다.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면 시장점유율이 떨어질 수 있고, 가격을 함께 낮추면 영업이익이 줄어드는 구조다.

국내 부품·소재 기업에는 영향이 엇갈릴 수 있다. 일본에서 기계와 정밀부품, 화학소재 등을 들여오는 기업은 엔화 약세로 수입비용을 아낄 수 있다. 100엔당 원화 환율이 낮아지면 같은 일본 제품을 사는 데 필요한 원화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기업과 해외시장에서 경쟁하는 완제품·중간재 업체에는 악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엔저로 일본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 국내 기업이 수출단가를 낮춰야 할 수 있다. 엔화 약세가 장기화할수록 업종과 기업별로 희비가 크게 갈릴 수 있다는 의미다.

관광과 내수에도 영향이 예상된다. 엔화 가치 하락은 한국인의 일본 여행과 현지 소비를 더욱 저렴하게 만든다. 국내 소비가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 반대로 일본인 관광객 입장에서는 한국의 숙박과 쇼핑 비용이 상대적으로 비싸져 방한 수요와 국내 관광 소비가 둔화할 수 있다.

외환시장에서는 중동 정세가 변수로 떠올랐다. 미국과 이란의 충돌 가능성이 다시 커지고 홍해 운송 차질에 대한 우려가 확산하면서 투자자들이 달러를 사들이고 있다. 지정학적 긴장이 높아질 때 위험자산을 줄이고 달러를 확보하려는 수요가 늘어난 결과다.

국제유가 상승도 한국과 일본 모두에 부담이지만 일본에는 엔화 약세를 한층 더 부추기는 요인이다. 일본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원유와 가스 대금을 대부분 달러로 지급한다. 유가가 오를수록 일본 기업이 결제에 필요한 달러를 더 많이 사야 하고, 그 과정에서 엔화 매도가 늘어난다.

21일 김포국제공항 출국장에서 일본 하네다로 떠나는 여행객들이 탑승수속을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역시 원유와 가스를 대부분 수입하기 때문에 중동 긴장이 장기화하면 원화가 다시 약세로 돌아설 수 있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국내 기업의 달러 결제 수요가 늘면 최근 나타난 원·달러 환율 하락세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

엔화 약세가 멈추지 않는 근본적인 배경에는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이가 있다. 일본은행은 지난달 단기 정책금리를 연 0.75%에서 1.00%로 올렸지만 미국 기준금리는 연 3.50~3.75%로 여전히 훨씬 높다. 일본이 금리를 올렸어도 달러 자산의 이자 수익이 더 높은 구조는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낮은 금리로 엔화를 빌린 뒤 달러로 바꿔 미국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계속되고 있다. 투자자가 빌린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는 과정에서 엔화 가치에는 추가적인 하락 압력이 가해진다.

엔 캐리 트레이드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일본에서 조달된 저금리 자금이 글로벌 금융시장으로 흘러들 수 있다. 미국 주식뿐 아니라 수익률이 높은 아시아 주식과 채권에도 일부 자금이 유입될 수 있어 단기적으로는 국내 금융시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엔화의 방향이 갑자기 바뀔 때다. 일본 정부가 대규모 시장 개입에 나서거나 일본은행이 예상보다 빠르게 금리를 올리면 엔화 가치가 급등할 수 있다. 이 경우 투자자들은 해외 자산을 팔아 달러를 엔화로 바꾼 뒤 빌린 돈을 갚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한꺼번에 이뤄지면 국내 주식과 채권시장에서도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갈 수 있다. 엔화가 계속 약해져도 국내 수출기업이 타격을 받고, 갑자기 강해져도 자산시장에 충격이 발생할 수 있는 셈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4월 말부터 한 달간 약 11조7300억엔을 투입해 엔화를 사고 달러를 팔았지만 추세를 바꾸지 못했다. 외환시장 개입은 투기적 거래를 진정시키고 환율 상승 속도를 늦출 수 있지만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이까지 해소할 수는 없다.

앞으로 국내 외환시장은 한은의 금리 인상 효과와 엔저·달러 강세가 맞서는 흐름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 수출과 외국인 자금 유입이 이어지면 원·달러 환율은 점차 하락할 수 있지만, 엔화가 달러당 160엔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원화의 추가 강세도 제한될 수 있다.

14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엔화와 달러화를 정리하고 있다. 뉴시스

원화만 강해지는 상황이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다. 원·달러 환율이 내려가면 에너지와 원자재 수입가격이 낮아져 국내 물가 안정에는 도움이 된다. 반면 원·엔 환율이 더 빠르게 하락하면 일본 기업과 경쟁하는 국내 수출업체에는 가격 경쟁력 약화라는 부담이 커진다.

결국 한국 경제에 중요한 것은 원·달러 환율의 절대적인 수준뿐 아니라 원화와 엔화의 상대적인 가치다. 원화 가치가 달러보다 약하더라도 엔화보다 강해지면 국내 기업이 실제 수출 현장에서 체감하는 환율 여건은 나빠질 수 있다.

국내 시중은행 한 외환딜러는 “최근 원·달러 환율은 한은 기준금리 인상과 수출 호조 기대가 반영되면서 고점에서 내려오고 있지만 엔화 약세가 계속되면 원화도 다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며 “원화가 엔화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흐름이 이어질 경우 일본 기업과 경쟁하는 국내 수출업체의 가격 부담이 커지고, 향후 엔 캐리 트레이드가 급격히 청산되면 국내 금융시장의 변동성도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