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소녀들의 복싱클럽

2026. 7. 2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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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
극작가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복싱
훈련을 하는 여자아이들이
작은 천막을 벗어날 수 있길

검도 수련이 끝나면 땀에 젖은 장비를 메고 도장을 나선다.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서면 그제야 팔꿈치와 손등의 퍼런 멍이 눈에 들어온다. 무리해서 허리 공격을 막으려다가 팔꿈치를 맞았을 것이고, 손목을 내리치는 상대의 죽도에 손을 빗맞았을 것이다. 나와 대련했던 관원들의 몸에도 상처가 났을 게 뻔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내가 휘두르는 검은 가끔 의지와 무관하게 상대의 손과 늑골, 어깨를 무참히 가격한다.

멍투성이 팔을 보고 사람들은 묻는다. 굳이 격투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그 말에는 여자가 왜 그런 운동을 하는지 의아해하는 뜻이 숨어 있는지 모른다. 사실 동굴 같은 집필실에서 그리 밝지만은 않았던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도 모자라 글로 엮어보겠다고 종일 애쓰고 나면 귀갓길 전철 창에 비친 내 얼굴은 좀비로 변해 있기 일쑤다. 퀭한 눈을 보면서 고민한다. 같은 작업을 내일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루를 마무리하는 수련은 그런 나 자신과 맞서는 시간이다. 걷기 힘들 정도로 녹초가 되지만 몸속 깊은 곳에서는 또 다른 에너지가 차오른다. 유령 같던 몸과 마음이 비로소 생의 감각을 되찾는다.

며칠 전 잠들 준비를 하며 습관처럼 국제 뉴스를 훑어보고 있었다. AP통신의 사진 한 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히잡을 쓴 소녀들이 구호 단체의 로고가 붙은 천막 안에서 복싱 글러브를 끼고 낡은 샌드백을 치는 모습이었다. 사진 아래 캡션에는 2026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아이들의 훈련을 찍은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폐허가 된 전쟁터에서 복싱 훈련에 매진하는 소녀들이라니, 조작된 이미지가 아닌지 두 눈을 의심했다.

코치 오사마 아유브는 2020년 가자지구에서 처음으로 여성 전용 복싱클럽을 열었다고 한다. 복싱은 남성만을 위한 스포츠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소녀들의 훈련에 대한 문화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편견에 맞서 코치와 소녀들은 챔피언을 향한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2023년 전쟁이 터진 후 모든 게 달라졌다. 복싱클럽은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무너졌고, 생존을 위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코치는 살아남았지만 국가대표를 꿈꾸던 열아홉 복서 말락 메슬레는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소녀들도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채 공습의 공포를 견디는 끔찍한 일상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칸유니스로 피난을 떠난 코치는 난민촌에서 다시 복싱클럽을 열기로 했다. 쓸 만한 자재를 줍고 천막을 세워 훈련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링은커녕 매트와 제대로 된 글러브도 없었지만 소녀들은 스텝을 밟으며 있는 힘껏 샌드백을 치기 시작했다. ‘+972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코치는 말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가자지구 소녀들의 삶에서 복싱이 사라지게 내버려 두지 않겠노라 다짐했다고.

현재 클럽 두 곳에서 50여명의 여자아이들이 무료로 훈련을 받고 있다. 소녀들은 복싱을 할 때 내면에서 새로운 힘이 깨어나는 걸 느낀다고 했다. 복싱은 정신이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버팀목과 다름없다고, 훈련을 통해 마음에 맺힌 분노와 슬픔을 털어낸다고 아이들은 고백했다. 이제 소녀들의 복싱은 성 역할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전쟁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일상의 감각을 되찾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드론 소리와 포격음이 들릴 때마다 코치와 소녀들은 공포에 움츠러드는 대신 서로 눈을 맞추고 다시 훈련을 이어간다. 복싱클럽의 인스타그램 계정 ‘Gaza Boxing Women’에는 전 세계인의 댓글이 줄을 잇는다. 부디 오래 살아남아서 전쟁의 상처를 잊고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란다는 글이 많다. 나는 아이들이 살아남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바람처럼 작은 천막을 벗어나 국제 대회에서 팔레스타인 국가대표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불가능한 미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많은 이들이 한뜻으로 응원한다면.

이수민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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