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에도 쉽게 발길을 떼지 못했던 대구 근대화거리

문운주 2026. 7. 20. 13:52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는 목숨을 걸었다.

대구의 근대화에는 선교사들의 헌신도 깃들어 있다.

훗날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동산병원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발자취는 대구 근대화의 토대가 되었다.

청라언덕은 병원과 학교를 세운 선교사들의 헌신,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외쳤던 시민들의 함성이 함께 남아 있는 대구 근대사의 현장이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선교와 교육, 문학과 애국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청라언덕 골목

[문운주 기자]

▲ 청라 언덕 미국 선교사들이 근대 의료와 교육의 씨앗을 뿌렸던 대구 근대문화의 출발점
ⓒ 문운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는 목숨을 걸었다. 고문과 투옥, 망명의 고통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떤 이는 집과 논밭을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그들의 희생 끝에 우리는 광복을 맞았다. 대한민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강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기억은 희미해졌다. 일부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가난 때문에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생활고 속에서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매년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달리, 우리는 그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대구의 근대화에는 선교사들의 헌신도 깃들어 있다. 낯선 땅에 들어온 그들은 병원을 세워 환자를 돌보고, 학교를 열어 새로운 학문을 가르쳤다. 열악한 환경과 전염병 속에서도 의료와 교육 활동을 이어가며 대구가 근대도시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지난 15일, 대구간송미술관을 둘러본 뒤 대구 구도심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오래된 골목과 선교사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청라언덕과 대구 근대문화골목이다. 그들은 머나먼 이국에서 왜 대구를 찾았을까. 이곳에서 무엇을 했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역사의 현장, 청라언덕

19세기 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거쳐 부산항에 닿았다. 그러나 여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직 철도가 놓이기 전이어서 다시 말을 타고 험한 산길을 사흘가량 넘어서야 대구에 이를 수 있었다. 언어도 문화도 전혀 다른 낯선 땅이었다.

당시 대구는 경상도를 아우르는 행정과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으면 영남 전역으로 의료와 교육, 선교 활동을 펼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899년 미국 북장로교는 대구에 선교기지를 세웠다. 청라언덕은 영남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 동산의료원 엣터 1899년 미국 의료선교사들이 제중원을 세우며 대구에 근대 의료의 문을 연 역사적인 공간
ⓒ 문운주
선교사들은 먼저 집을 짓고 예배당을 세웠다. 이어 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시작했고, 제중원을 설립해 서양의학을 전했다. 훗날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동산병원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발자취는 대구 근대화의 토대가 되었다.

오늘 청라언덕에 남아 있는 붉은 벽돌 선교사 주택은 단순한 옛 건물이 아니다. 태평양을 건너 이름조차 생소했던 도시를 찾아와 평생을 바친 이들의 삶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 흔적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1899년 의료선교사 존슨이 작은 초가에서 약을 나누어 주고 환자를 돌보면서 제중원의 역사가 시작된다. 제중원은 훗날 동산기독병원과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발전했다. 언덕 위 붉은 벽돌집과 병원 터에는 낯선 땅에서 생명을 살리고 근대 의술을 전하려 했던 선교사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 선교박물관(옛 스윗즈 선교사 주택)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며 근대 문화를 전한 미국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간직한 청라언덕의 대표적인 역사문화공간이다.
ⓒ 문운주
청라언덕에 들어서면 대구 근대 의료의 출발점인 제중원의 흔적을 만난다. 1899년 미국 의료선교사 우드브리지 O. 존슨이 세운 제중원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훗날 동산병원을 거쳐 오늘날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이어진다.
길을 따라가면 블레어와 스윗즈, 챔니스 선교사 주택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각각 교육·역사박물관과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으로 활용되며 대구 근대교육과 선교, 의료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100여 년의 세월을 견딘 붉은 벽돌 건물에는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새로운 문물을 전했던 선교사들의 삶과 헌신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 사과시배지 미국 선교사들이 심은 사과나무 한 그루는 훗날 전국에 이름을 알린 '대구 사과'의 출발점이 됐다.
ⓒ 문운주
 동무생각 가곡 「청라언덕」의 노랫말이 새겨진 노래비.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음악이 한데 어우러진 청라언덕의 또 다른 명소다.
ⓒ 문운주
인근에는 대구사과 시배지도 있다.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들여온 사과나무를 이곳에 심으면서 대구 사과의 역사가 시작됐다. 조금 더 걷자 가곡 '동무생각' 노래비가 나타난다. 계성학교 교사였던 박태준이 청라언덕의 추억을 담아 작곡한 노래다.

옛 동산병원 구관 현관을 지나 청라언덕을 내려서면 대구 3·1운동길로 이어진다. 1919년 3월 8일 학생과 시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던 길이다. 청라언덕은 병원과 학교를 세운 선교사들의 헌신,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외쳤던 시민들의 함성이 함께 남아 있는 대구 근대사의 현장이다.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
▲ 이상화 고택 민족 저항시인 이상화가 생의 마지막까지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던 곳
ⓒ 문운주
▲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 선생이 살았던 고택. 대구 근대사의 중요한 현장으로, 나라의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고자 했던 자주독립 정신이 깃든 공간
ⓒ 문운주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은 대구 근대골목에서 가장 오래 발길이 머무는 곳이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는 두 고택은 문학과 독립운동이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결국 나라를 사랑했던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

이상화 고택에 들어서자 소박한 한옥 마당과 오래된 감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민족 저항시인 이상화가 생의 마지막까지 머물며 작품을 썼던 이곳은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마당의 시비 앞에 섰다. 일제강점기의 아픔과 조국을 향한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이 고택은 2002년 시민들이 펼친 '이상화 고택 보존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철거 위기를 넘겼다. 시민들의 힘으로 지켜낸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깊게 다가온다.

바로 옆 서상돈 고택에서는 또 다른 애국의 역사를 만난다.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서상돈의 삶을 돌아보며, 나라의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보자는 절박한 외침이 전국으로 번져 나갔던 시대를 떠올렸다. 크지 않은 한옥이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실천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담겨 있었다.

해 질 무렵 근대골목을 빠져나왔다. 골목은 다시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마음만은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청라언덕에서 만난 선교사들의 헌신, 3·1운동길에 남은 함성, 이상화의 시와 서상돈의 실천은 모두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한 줄기 역사였다.

우리는 흔히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억은 구호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걸었던 길을 한 번 더 걷고,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한 번 더 읽고,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일에서 비로소 기억은 살아남는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