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개혁 촉발한 2차 대부흥, 교육·의료 선교 낳았다
<3> 국경 넘은 복음, 2차 대각성

1773년 보스턴 차(茶) 사건이 터졌다. 본국 영국의 과세 정책에 항의해 영국령 북미 식민지 주민들이 동인도회사의 차를 바다에 던져 버린 사건으로, 본국과 식민지의 긴장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보여 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1775년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전쟁이 시작되고, 1776년 독립선언이 발표되었으며 1783년 파리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식민지는 이제 영국에 속한 개척 식민지에서 독립공화국 미합중국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은 단지 정치적 분리의 과정이 아니었다. 새로 건국된 나라가 어떤 도덕적, 종교적 질서 위에 세워질 것인가를 둘러싼 선택의 과정이었고, 그 선택의 성공 여부를 실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독립 과정에서 식민지 주민들은 기독교 신앙과 공적 질서의 관계, 즉 정교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를 두고 갈라졌다.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자들은 청교도 윤리와 공화주의 정치가 결합한 틀에서 독립의 정당성을 찾았고, 모국 영국과 국왕을 지지한 충성파는 질서와 순종을 중시하며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양쪽 어디도 지지하지 않은 평화주의자들은 전쟁 자체가 기독교 신앙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즉 미국혁명은 왕정에 대한 반란인 동시에, 종교가 한 사회의 공적 질서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둘러싼 근본적 논쟁이기도 했다.
혁명에 성공하여 독립한 후 새 공화국 미국은 기독교의 한 교파를 국교로 채택하여 특권을 부여하는 유럽식 국교제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대신할 확고한 신앙체계를 곧바로 세우지는 못했다. 건국 선조 중에는 전통적 개신교 복음주의 신앙을 지닌 이들도 있었으나, 다수는 계몽주의와 이신론의 영향을 받아 종교를 시민 도덕과 공공질서의 언어로 이해한 합리주의자였다.
그 결과 미국은 왕정을 거부한 공화국이면서도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국교를 거부하고 종교를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허용한 실험 현장이 되었다. 따라서 법적, 제도적 의미에서 미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다. 서양 역사에서 처음으로 종교를 개인이 취사선택하는 시장이 탄생했다. 각 종교와 교파는 개인에게 선택받기 위해 경쟁해야 했다. 종교가 시장 경쟁 체제에 편입된 것이다.
한편 미국혁명은 정치적 독립만이 아니라 종교 지형에도 큰 변화를 남겼다. 독립전쟁으로 영국 왕실의 종교였던 성공회는 타격을 입었다. 애팔래치아산맥 동쪽 13개 주로 시작한 신생 공화국은 서부 개척, 경제 불안, 외교 문제에 집중하느라 신앙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공화국이 성립된 18세기 말 미국의 지역교회 등록 비율은 매우 낮았고, 국경 근처 서부에는 교회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790년대부터 시작된 2차 대각성은 신생 미국 사회를 다시 복음주의적으로 재편한 대규모 부흥으로서, 1840년대까지 미국 종교와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부흥의 주역으로 성장한 교파는 감리교와 침례교였다. 남부와 서부의 광대한 변경지에서 감리교 순회설교자와 침례교 농부 설교자들은 기존 교파들의 손길이 닿지 못한 곳곳에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감리교와 침례교는 19세기 전반 미국에서 가장 큰 교단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단순히 교세를 넓힌 것이 아니라, 개척지의 불안정한 삶 속에서 신앙과 일상이 연결된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만들었다. 2차 대각성은 미국 기독교가 민족별, 교파별 정착촌 종교에서 전국 종교로 자리매김하는 전환 과정이었다.
남부의 대표적 현상은 케인리지 집회와 캠프집회로 상징되는 대부흥이었다. 남서부 켄터키 케인리지에서 장로교 목사 제임스 맥그리디는 죄인의 회심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이후 침례교와 감리교 설교자들과 연합해 대규모 야외 집회를 조직했다. 케인리지 집회는 감정 표현과 체험을 강조하는 대중적 성격이 특징으로, 개척지 신앙의 전형이 되었다.
경련 웃음 춤 울음과 같은 신체 반응은 기존 종교인에게는 낯선 충격이었지만 고립과 빈곤, 불안 속에 살던 변경 주민들에게는 종교적 해방이자 심리적 출구였다. 이 흐름 속에서 엄격한 지성과 교리, 정숙을 강조했던 전통 장로교도 미국식 체험 종교로 서서히 변형되었다. 원래부터 체험과 헌신, 열정, 소박한 삶이 특징이었던 침례교와 감리교는 남부 지역 종교 질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동북부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부흥이 전개되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 회중교회 전통 위에서 예일대학 학장 티모시 드와이트가 학생들과의 토론과 설교 프로그램을 통해 부흥을 일으켰다. 대학에서 시작된 각성은 졸업생들을 통해 각지로 퍼져 나갔다. 이 지역 부흥은 남부 캠프집회처럼 열광적이지는 않았지만, 지적이고 절제된 방식으로 확산되며 미국 전역의 복음주의 운동에 북동부 색채를 입혔다. 이처럼 2차 대각성은 남부 시골 대중 부흥과 동북부 도시 중산층 부흥이 함께 맞물려 형성된 전국적 운동이었다.
이 전국적 확산을 제도적으로 이끈 대표자가 두 사람 있었다. 남부의 주역은 프랜시스 애즈버리였다. 그는 영국에서 파견된 감리교 감독으로서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사이 미국 감리교의 성장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애즈버리의 핵심 공헌은 순회와 조직이었다. 그는 광대한 지역을 말 위에서 누비며 설교자들을 임명하고, 속회와 연회를 통해 감리교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었다. 감리교가 몇천 명 규모에서 수십만 명 규모로 커진 데에는 그의 끈질긴 순회와 현장 조직력이 결정적이었다.

애즈버리의 장점은 서민적 감수성과 조직 능력이 결합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노동계층 출신의 평신도 설교자들과 쉽게 어울렸고, 이들의 팍팍한 삶의 현실과 영적 갈망을 이해했다. 동시에 그는 대중의 열광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성장 에너지로 흡수했다. 캠프집회를 장려하고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설교와 찬송을 권면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감리교가 미국 서민 종교, 개척 종교, 순회 종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애즈버리식 지도력이 있었다.
북부의 찰스 피니는 또 다른 유형의 지도자였다. 그는 현대 도시 부흥운동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도시 전도와 조직화된 부흥의 모델을 만든 인물이다. 뉴욕주 북부 신흥 공업 도시들에서 시작된 그의 설교는 동부의 대도시로 확장되었다. 피니는 설교 후 즉각적인 회심 초청, 고뇌의 의자, 공개 간증, 연장 집회 등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도시 중산층과 상공업 지도자들을 회심으로 이끌었다.

피니의 공헌은 특히 도시 교회와 사회개혁을 부흥과 연결한 데서 더 분명해진다. 그는 금주운동, 노예제 폐지운동, 여성 교육, 해외 및 국내 선교 확장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오벌린대학과 브로드웨이태버너클 같은 공간을 통해 부흥과 개혁이 만나는 길을 열었다. 또한 그는 ‘신앙부흥 강연’에서 부흥을 기적이 아니라 적절한 수단과 진지한 응답이 만난 결과로 설명함으로써, 이후 복음주의가 사회운동과 결합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피니는 단지 회심을 이끄는 설교자가 아니라 미국 복음주의를 선교와 사회개혁의 방향으로 넓힌 인물이었다.
결국 2차 대각성은 미국 기독교를 국경 밖으로 확장시키는 엔진이었다. 감리교와 침례교의 폭발적 성장, 캠프집회와 도시 부흥의 확산, 순회설교와 자원단체의 발전은 복음주의를 미국 사회 전반의 문화로 바꾸었다. 1차 대각성이 신앙의 각성과 미국적 정체성을 낳았다면, 2차 대각성은 그 신앙을 조직화하고 선교·개혁·교육으로 확장시켰다. 이 부흥은 미국에서만 교회성장과 사회개혁을 촉진한 것이 아니라, 해외선교 운동을 통해 미국식 기독교를 비서양 지역 신생 기독교의 모델로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한국 개신교 선교를 미국인 장로교 및 감리교 선교사들이 주도했으므로, 이들이 미국에서 형성한 신앙의 틀이 한국에도 뿌리를 내렸다. 즉 한국은 종교개혁의 모체인 유럽 기독교를 직접 수용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한 차례 수정된 복음주의 부흥 유형의 기독교를 수용했다. 한국 개신교의 특징이 미국과 유사한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2차 대각성의 유산인 사회개혁과 자원봉사 정신은 전도(교회)와 함께 19세기 이후 개신교 해외선교의 3대 축을 형성하는 교육(학교)과 의료(병원) 활동의 토대였다. 교육과 의료 선교는 교회가 한국에서 사회적 신뢰를 얻는 기반이 되었다. 처음부터 복음전도와 근대화가 패키지로 구성된 미국인들의 선교를 의심 없이 수용했기에, 이 통합적 선교는 한국교회 독립운동과 민족운동 참여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다시 말해 2차 대각성의 선교적·개혁적 유산은 한국교회 안에서 교회 성장, 사회 참여, 민족운동의 언어로 번역되어 수용되었다.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즈, 국민일보DB

이재근 교수(광신대 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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