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에서 열심히 살아가려 했던 사람들... '치유'의 공간이 되길 바라요"

김은지 2026. 7. 1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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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만드는사람들] 동두천옛성병관리소철거저지를위한공동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활동가 최희신

활동가 인터뷰 프로젝트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 은 공익활동가의 지역·영역·세대를 잇는 사회적 지지와 연대의 플랫폼, 2026 공익활동가주간과 함께합니다. 공익활동, 캠페인의 성과보다 그 일을 한 활동가 개인의 이야기에 시선을 맞추는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일과 삶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김은지]

 농성장에서 만난 최희신
ⓒ 김은지
동두천시의 옛 성병관리소 보존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최근 자주 소개되는 최희신을 만났다. 성병관리소는 과거 국가가 기지촌 여성들의 몸을 관리하고 통제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보존을 바라는 시민들은 이 건물을 철거하지 말고 기지촌 여성 인권과 국가폭력의 책임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싸워왔다. 최희신은 그 보존운동의 한복판에서 농성장을 지키고 기록하며 동두천과 기지촌의 역사를 이야기해 온 활동가다.

이 모든 소개를 걷어낸다면, 나에게 최희신 활동가는 초대하는 사람이다. 농성장에 만두 빚으러, 영화 보러, 공연 보러 놀러 오라고 하는 사람. 동두천에서 열리는 평화문화제에 나들이 오시라고 초대하는 사람. 메모리얼 투어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 윤금이 기억의 날 찬바람 맞으며 찾아온 이들을 단단하게 맞이하는 사람. 성병관리소 앞에서, 상패동 공동묘지에서, 쇠목마을 미군공여지반환투쟁기념비 앞에서 그 옛날 '시시하게' 살았던 대단한 사람들의 삶을 서두르지 않고 풀어놓는 사람. 그렇게 동두천이 오래 품어온 질문 앞으로 우리를 다시 한번 초대하는 사람.

그런 그의 초대가 이번에는 보산동의 골목으로 이어졌다. 그곳에 최근 문을 연 '우리동네 박물관 비욘드보산'에 들어섰다.

"들어오니까 아주 넓죠? 원래는 이 동네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사진관이었어요. 당시 사장님이 쓰시던 여러 카메라, 소품, 작품들... 사진관 그 자체로도 하나의 박물관이었죠. 여기는 기념품인데요, 너무 귀엽죠? '동두천에서는 개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잖아요, 거기서 행운을 불러온다는 캐릭터 '독구'의 스토리를 만든 거예요. 곧 말랑이 인형도 나와요. 이쪽은 전진경 작가님이 그린 거고, 저쪽은 동두천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와 음악이 있고요..."

화사한 박물관을 한창 소개하던 최희신에게, 이곳을 처음 구상할 때 무엇이 꼭 담기길 바랐는지 물었다.

"그런 거 생각 안 해요. 미리 생각하면 내 생각이나 방향이 들어갈 텐데, 그럼 안 되죠. 이 안에 뭐가 들어와서 채워질지는 모르는 거니까요."

시간과 고민을 거쳐, 작은 목소리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소외된 이야기가 널리 펼쳐질 자리를 마련해 온 사람. 그런 그의 산뜻한 답변에, 좀 전까지 농성장에서 듣고 온 긴 이야기의 무게가 이 아기자기한 공간에서 다시 한번 다가왔다.

이날의 대화는 동두천시 소요산 아래, 옛 성병관리소 건물 뒤에 자리 잡은 농성장에서 시작되었다. 벌써 세 번째 여름을 맞는 농성장에는 구석구석 시간의 흔적이 가득했다.

- 저는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에서 성병관리소 보존 활동을 하시는 모습으로 희신님을 처음 뵈었지만 오래전부터 다양한 활동을 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어디서부터로 보시나요?

"1986년에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겠죠. 하필이면 딱 그때. 조금만 더 일찍이거나 늦었어도 다르게 살았을지 몰라요. 그 전까지는 굉장히 엄혹한 시기였거든요. 학내 사법경찰이나 가짜대학생이 많지 않아지고 집회가 가능해지던 때, 대통령 직선제를 향한 열망이 전국적으로 터져 나오던 시기에 제가 1학년이 된 거예요. 동두천에서 그때까지 살면서 대학교에 가서야 나는 길거리에 미군이 없는 세상을 처음 본 거지.

87년으로 넘어가며 사람들이 죽기 시작해요. 정말 공포스러웠지만 학교에 갔다가도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그런 게 정의로운 일인지 따질 겨를도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겁이 많아서 어디 앞에 나가고 그러기보단 주로 대자보 쓰고 그랬던 것 같은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보니 제가 현장에 있었던 큰 사건이 많았더라고요.

이후로 당시 세상을 바꾸는 일에 참여했던 사람들, 또 세상이 바뀌는 걸 직접 본 사람들이 우리 지역에서도 뭔가를 하면 어떻겠느냐 말하기 시작했죠. 동두천에도 그런 일을 하는 단체를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과 기운이 지역에 퍼졌고, 동두천시대학생회(1982)와 동두천시민회(1990)가 만들어졌어요.

그때 환경 오염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졌어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준비로 서울에 있던 염색·화학·피혁 공장들이 경기북부로 대거 밀려나면서 개천에 물고기가 둥둥 뜰 정도로 수질 오염이 심각했거든요."

- 그럼 그렇게 쭉 동두천에서 지내며 활동하신 건가요?

"동두천에 계속 살기는 했지만 한동안 뭘 하진 못했어요. 대학생 때 한번 크게 아파서 휴학을 했거든요. 회복을 좀 하고 학교에 돌아가려는데 이번엔 집이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졌지. 진짜 가난했어요. 해설할 때 제가 햄버거를 엄청나게 만들어 봤다고 했잖아요. 그때 미군 부대에서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느라고 그런 거지. 시내에서 일하는 돈의 거의 두 배를 쳐주니까요. 한 2년을 일만 해서 간신히 등록금을 마련했고 학교로 돌아갔는데, 안 되겠더라고요. 벌어서 집에도 드리고 내 학비랑 생활비까지 감당하면서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학교를 포기하고 과외랑 학원 강사 일을 했죠. 나 아주 잘 가르쳤어요, 진짜.

그러면서 대학생회 활동도 하고, 선배들도 많이 만나다가 동두천민주시민회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어요. 그때 엄마가 왜 그러셨는진 모르겠지만 그 동두천민주시민회 사무실을 우리집 1층에 세를 줬어요. 그래서 그곳이 거의 7-8년을 우리집 밑에 있었고, 저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일들을 꾸준히 하게 됐죠. 제가 없어도 친구나 지인들이 거기 있고 우리집 밑에 사무실이 있으니 항상 직간접적으로 활동을 함께할 수 있었어요.

그 이후로는 또 한동안 돈만, 정말 돈만 벌었던 것 같아. 아이를 낳고 제 건강에 다시 큰 문제가 생겼거든요. 좀 추슬렀나 싶으면 6개월 입원하고, 퇴원했다가 다시 6개월 입원하기를 반복할 정도였어요. 좀 나아졌다 싶으니 집에 큰 빚이 생겼죠. 어마어마한 빚이었어요. 그때부터는 정말... 우리 식구 먹고 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한 달 치 약을 타오면 그걸 보름 만에 다 먹어버리면서 일만 하고 살았지. 그 시절에 내가 어떻게 살고 뭐하며 지냈는지에 대한 기억을 다 잃었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다른 걸 생각할 틈도 없었고, 너무 아파서 아무 생각이 안 나던 때가 많았으니까. 한 주먹씩 약 털어 넣으면서 일해서 빚 갚고 겨우 몸 챙기고 그게 다였지.

제 아이가 중학교 졸업할 때서야 뭐가 많이 해결이 됐죠. 빚 다 갚고 제가 집에다 얘기했어요. 나 다시 공부할 거다, 학교로 돌아갈 거다. 그렇게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가 우연히 사회적경제를 만나서 눈이 뜨였어요."

- 어떤 부분에서 눈이 뜨이셨나요?

"글쎄, 사기당한 것 같아(웃음). 공동체가 힘을 모아서 함께 사는 방식의 경제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정의로운가 싶었죠. 물론 현실적으로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그런 걸 이룬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어요.

다시 학교로 돌아가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일도 해보니 아쉬움이 있었는데, 마침 한국에 움트던 사회적경제라는 걸 알게 돼요. 이거다 싶어 석사과정에 들어갔죠. 정말 즐겁게 공부했어요. 학위를 마친 후에는 연구원 자격으로 네팔에 가서 사회적기업을 여럿 세우고 2014년 3월 말에 한국에 돌아와서... 세월호가 터진 거야.

텔레비전 앞에서 다 무너져버리더라고요. 번개 맞은 것 같았지. 그동안 돈만 벌다가 내가 이렇게 사회적경제라는 걸 공부하고 해외에 가서 이것도 저것도 하고 왔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동네에는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네. 그게 나를 다 뒤집어놨어요. 그땐 정신차리면 팽목항에 가 있고 그랬죠. 여기 동두천에서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했지만 이미 동두천시민연대가 2012년에 해산된 뒤였거든요. 다시 지역에서 뭔가 한다는 게 쉽지 않았고,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어른이라는 자괴감이 너무 컸어요.

답답함에 앞으로는 서울 가서 일하고 서울 가서 활동하려고도 했었지요. 마침 사회적경제가 한창 꽃필 때라 학위도 해외경험도 가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았거든요. 일하러 갈 준비를 다 해뒀는데, 그 시기에 동두천에서 김대용 대표를 만났어요. 적극적이고, 정의로웠고, 무엇보다 지역의 패배주의에 젖지 않은 사람. 저런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같이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서울로 가기 일주일 전에 다 무르고 나는 동두천에 남겠다고 결정했어요.

그렇게 뜻이 맞는 사람들과 동두천에서 협동조합 일을 시작했고 박사과정에 들어갔어요. 협동조합에서 꾸는 꿈들이 다 다르다 보니 쉽진 않았지만 동두천에서 열심히 운영해서 좋은 성과도 냈죠. 그러다 어려움에 부딪히면서 협동조합에서 나오게 돼요. 그 후로 2016년 말 김대용 대표가 시민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준비를 거쳐 2017년 여름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이 만들어져요."

- 성병관리소는 언제부터 어떻게 와보게 되셨나요?

"소요산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거야 어릴 때부터 알았지만 이 끔찍한 곳에 뭐하러 일부러 와 봤겠어요? 2014년 초에 우리집이 광암동 근처로 이사를 가거든요. 그 해 여름이었을 텐데 집 근처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걸산동에 가게 됐죠. 연구자의 호기심이 막 샘솟을 때라, 여기를 인터뷰하고 아카이빙을 해야겠다 싶어 경기도 따복공동체지원센터에 마을공동체 아카이빙을 제안했어요. 그게 선정이 되어 마을로 사람들을 오게 하고, 아카이빙 작업을 했죠. 그렇게 그 걸산마을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기 시작했고, 제가 기고한 글이나 활동이 알려지면서 경기문화재단과 두 번의 동두천 아카이빙 작업을 해요.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동두천 내 이름을 불러줘>(2018)와 <동두천을 찾고 잇다>(2021)예요.

그때 걸산마을부터 시작해 동두천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제 공부량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어요. 동두천에 대한 별별 자료를 보고 국회도서관이나 국가기록원도 찾아다니고요. 중간중간에는 여러 곳에서 저에게 동두천 투어를 많이 부탁했어요. 그렇게 해설 경험이 계속 늘어났죠.

그러면서 성병관리소의 진실에 근접하게 된 거예요. 공부하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알리고, 여기저기 말을 하러 다니면서 이걸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자란 거죠.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의 사무국장을 하면서 포럼 같은 자리에 계속 나가게 되고, 작업물을 통해 해당 분야의 연구자들과 연결이 생기기도 하면서 점점 생각이 확장됐어요."
 농성장에서 열린 경기도 기지촌 여성 인권 아카이빙 동두천 보고회에 모인 시민들
ⓒ 최희신 제공
- 지역운동이나 지역학에서 출발해 성병관리소를 만나게 되신 줄 알았는데, 마을공동체 아카이빙 작업이 확장되면서 연결되신 거였군요.

"네. 다시 공부하러 학교에 갔던 걸 잘했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학부와 대학원은 완전히 다르잖아요. 박사과정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연구자적 자세가 부족했을 텐데, 같은 걸 보더라도 훨씬 더 집중해서 보게 만들어 준 거죠. 어떤 자료는 어딜 가서 찾을 수 있는지, 어떻게 깊게 들여다봐야 하는지도 배웠고요. 또 하나는 사회적경제를 공부하고 협동조합을 운영하느라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배운 것, 먹고 사느라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겪은 것들도 저에겐 다 자양분이 됐다고 생각해요, 정말."

- 그럼 본격적으로 이곳을 오가신 지는 10년도 넘으셨네요?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엄벙덤벙 여기까지 왔네. 처음부터 '내가 이걸 알려서 뭔가 해야지, 변화를 일으켜야지'는 전혀 아니었어요. 일을 하다 보니 어떤 일이 나에게 왔고, 눈앞의 일을 해냈고, 그 일이 또 다른 일을 불러왔고, 그렇게 된 거죠. 그러다 이걸 이만큼 알게 된 이상 세상에 알려야 되는 때가 온 거예요. 알리고 다닐수록 신기한 인연과 연결고리들이 더 이어지고요.

제가 마치 이 운동을 위한 엄청난 투사처럼 포장될 때가 있지요. 언론에 나오거나 어디 가서 발언할 때는 호소력 있게 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 데서 '어쩌다 보니 이런 거 한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게 저를 투사처럼 보여지게 하는 게 있겠죠. 여기 농성장까지 오시는 분들이 물어보시면 '저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말씀드리는데, 대부분 안 믿는 것 같아(웃음). 저는 진짜로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 같아요."

- 그 사이에 많은 일과 많은 생각이 있으셨겠어요.

"어느 정도 되니까 발을 뗄 수 없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아, 내가 더 이상 여기서 나갈 수 없구나, 내가 알고 있고 갖고 있는 게 너무 많구나... 내가 가진 기억과 경험을 누구한테 아무리 전달하려고 해도 다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여기서 현재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 그 당시의 동두천을 살았던 사람이 거의 없어요. 저는 여기서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들이 있으니 연구를 할 때도 뭔가를 조금만 들으면 알 수 있는 것들이 많고요. 공부해서 되는 것들도 있죠, 책도 보고 다큐도 보고. 그런데 그때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느낌, 내가 어땠다, 그런 것은 배울 수가 없잖아요. '그때 그런 일이 있었대요'와 '그때 이런 일이 있을 때 나는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느꼈어요'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경험을 더해 해설하면서, 그 시절 동두천에 살았던 너무나 평범한 사람으로서 내가 겪은 고통이나 두려움 등에 대해 담백하게 얘기하는 게 사람들에게 훨씬 더 공감을 일으킨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막 신념에 차서 여러분들이 내 편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해설을 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경계하게 되고요."
 상패동 무연고 공동묘지에서 해설 중인 최희신
ⓒ 최희신 제공
- 제 세대로서는 이 활동을 평화나 인권의 이름으로 연결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집니다만,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었나?'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되는 순간들이 종종 있었어요. 민주화운동 시기에 기지촌 운동이 기지촌 여성인권의 개념과 연결되지는 않았나 보다 짐작해봤어요.

"사실 과거에는 시민운동이나 인권·평화 운동하는 사람들도 기지촌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치명적인 일로 생각했지만, 이런 기지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어요.

1992년에 윤금이 씨 첫 번째 집회는 거의 동두천 사람들끼리만 했고, 열흘인가 보름만에 다시 두 번째 집회를 열었거든요. 운동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그런 사람들이 한 말씀씩 하시는데... 나는 그때 너무 화가 나는 거야. 너무 화가 나서 표현도 잘 안 됐어.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그들이 윤금이씨를 '누이'라고 부르는 거.

'왜 누이예요? 저 사람 여동생도 아니잖아요, 왜 저렇게 말해요?' 내가 스물일곱밖에 안 된 그 어렸을 때도 그게 바로 화가 났어요. 그 전까지 단 한 번도 기지촌 문제에 대해 얘기한 적 없는 사람들이, 이런 곳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래 희생 당했는지 전혀 몰랐을 사람들이, 누가 미군한테 그렇게 죽었다고 하니까 달려와선 갑자기 그 사람이랑 같은 민족이 된다고? 자기 여동생이 된다고?

분명히 시민운동하던 사람들 중에도 성매매를 인권, 그것도 여성인권의 문제로 연결해서 보는 사람은 당시에 없었단 말이에요. 만약에 본인들이 서울 이태원에서 술 먹는데 그런 여자가 미군이랑 노는 걸 봐, 그래도 여동생처럼 봤을까요? 지금처럼 안타깝게 여겼을까? 그렇게 갑자기 같은 민족으로, 민족의 딸로 만들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동안 한 번도 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게 먼저죠. 한 번도 민족의 딸로 여기지 않았으니까.

제가 메모리얼 투어 해설을 하고 윤금이씨 기억식을 진행하면서 동두천에 오신 여러 분들을 만나다 보면 아직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윤금이 '누이'라고 하는 그분들의 선한 마음은 저도 알지요. 하지만 그 사람을 여자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 봐야하지 않겠냐고, 누이가 아니라 윤금이씨로 불러 주자고 힘주어 말씀드려요.

그런데 이 싸움이 시작되면서 기지촌 여성에 대해 세상에 알리는 일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났어요. 덕분에 기지촌 여성이라는 '계급'이 존재했구나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됐죠. 언니들이 소송을 그 전부터 준비하고는 계셨지만, 그 과정에서 훨씬 더 용기를 얻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고요. 성병관리소가 그 방향을 틀어 놓은 거예요. 기지촌과 그 사람들의 삶이 어땠는지를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일을 한 거죠."

- 동두천시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바깥에서 활동하실 때와 지역 내부에서 마주하시는 어려움이 다를 것 같아요.

"그럼요, 그런 고민이 있죠. 중앙에서 운동하는 것과 지역에서 운동하는 것은 정말 너무 다른 결을 가지고 있어요. 지역이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하지만 개인의 삶을 돌아볼 때는... 아닐 거예요. 중앙에서는 집에 오면 아무도 관여하지 않잖아요. 주변에서 내가 무슨 일 하는지 별로 신경쓰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좁은 지역에서는 내가 어디 가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도 다 가십이 되기도 하니까 쉽지 않죠.

또 저는 이런 게 있어요. 제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나랑 같은 일을 하자고 설득하고 그런 건 못하겠더라고요. 내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니까 관심 가져 줘, 같이 해줘, 이렇게는 못하겠어요. 지역에서 그게 위험할 수도 있고요. 저는 '당신은 당신의 삶을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해요. '궁금하면 한번 와 봐, 아니어도 괜찮고'하는 거죠. 저는 이 길이 큰 바다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가지만, 다른 사람은 아닐 수도 있잖아요."
 농성장의 날짜판을 매만지는 최희신. 농성은 700일을 앞두고 있다.
ⓒ 김은지
- 너무 많이 받으신 질문일 테지만 그래도 필요한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성병관리소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단순히 건물만 보존하자는 건 아닐 텐데요. 이 건물이 보존된다면 어떤 공간이 되기를 바라실까요.

"어디 나가서는 제가 막 큰 소리를 치죠? 평화와 인권의 공간으로 만듭시다! 그것도 진심이에요. 분명히 국가의 책임이잖아요. 너무 흔한 말로,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싸움을 할수록... 제 마음속에는 저곳이 무엇보다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점점 커져요.

저 안에 있었던 분들은 정말 시시하게 취급받던 사람들이죠, 누구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으니까요. 정치적·경제적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기지촌이나 기지촌 여성의 이야기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길 바라는 거지. 성병관리소를 지켜야 된다고 말하는 건, 그 시시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돌아봐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 여성들을 치유함으로써 동두천이나 기지촌 사람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 치유됐으면 좋겠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치유가 여기서부터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하게 되네요.

기지촌이라고 해서 다 불쌍하거나 불행하게 산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게 살았으면 어떤가요. 그 시절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낸 것뿐이잖아요. 살아남느라,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애쓴 사람들이 그냥 '기지촌'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폄훼받아요. 기지촌에서 옷가게를 했건 햄버거를 팔았든 뭐를 했든, 떳떳하지 못하게 살았을 거라고 의심받잖아요. 그런 사람들도 치유해주는 공간이 되길 바라요. 그 시절에 그렇게 손가락질 받아가면서도 살아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를 알면, 지금 내가 사는 삶이 더 단단해지기도 하고 유연해지기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해져요."

- 이곳이 치유의 공간이 되는 것을 꿈꾸시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동네 사장님들이랑 이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얼마나 고생 많이 하셨느냐고. 여기 산다고 바깥에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소리나 듣고. 옛날 동두천시도 대한민국도 돈 필요할 때는 여기 와서 손 벌렸지 않았냐고요. 70년대에는 보산동 없으면 여기 공무원 체육대회도 못 했다는 말이 남아있을 정도예요. 동두천이 대한민국을 먹고 살게 하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던 곳인데 그냥 무서운 동네 취급받는 게 얼마나 속상하냐고요.

저는 여기 사람들이 살아온 삶도 얼마나 중요한지 얘기하고 싶어요. 우리 엄마아빠도 고물상을 하면서 미군 부대 때문에 먹고 살았지만 그게 뭐가 부끄러운 일인가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요. 이 동네 분들도 저처럼 다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되시면 좋겠다고 그래요.

제가 그랬거든요. 어디 가서 동두천 산다고 하지 말라고 듣고 커서, 대학교 다닐 때도 일 다닐 때도 동두천 산다는 얘기를 잘 안 했었어요. 그런데 밖에 나가서 공부하고, 걸산마을에 다니고, 동두천 사람들과 언니들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다시 세상에 동두천과 기지촌 이야기를 하고 다니면서 생각이 바뀌고 치유가 됐어요. '동두천에서 열심히 살아낸 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거구나'하고요. 여기가 그렇게 치유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서 제가 이 운동을 한다고, 여기 분들께 말씀드리면 공감을 해주세요.

보존이 되면 이 공간에 치유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열면 좋겠어요. 여기서 음악도 듣고 연극이나 전시도 보고 차도 마시면서 동두천을 이야기하고, 이 동네 사람들의 마음이 녹진녹진해지기를 꿈꿔요. 동두천과 기지촌에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살아냈는지를 보여주고, 밖에서 기지촌을 한 가지 시각으로만 바라보지 않도록 하는 공간. 그렇게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농성장을 나와 최희신의 차를 타고 함께 보산동으로 향했다. 조수석 오른편으로 흐르는 신천을 바라보며, 농성장에서 들었던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동안 내가 자꾸 동두천에 찾아왔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보산동의 작은 박물관에 도착했다.

성병관리소 보존 문제를 둘러싼 싸움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가운데, 최희신은 또 다른 방식으로 동두천의 이야기를 세상과 연결하고 있었다.
 보산동 마을 이야기가 담긴 비욘드보산 박물관
ⓒ 김은지
- 언제부터 정식으로 문을 여신 건가요?

"얼마 전 5월 30일에 정식 개관식을 했어요. 임대는 작년 여름부터 해뒀고 11월에 두 달 정도 임시개관을 했죠. 제가 성병관리소 보존 운동을 하면서 돈 벌러 다니지를 못했어요. 그래도 이 공간을 잡아놔야 하니까, 작년부터 여기 임대 내느라고 그동안 벌어놨던 걸 다 까먹어버렸네요. 클럽이 많은 곳이라 임대료가 만만치 않아요."

- 어떤 분들과 어떻게 함께 열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2021년쯤 보산동에서 공방하는 분들을 만나게 됐어요. 협동조합을 만들고 싶다고 저에게 컨설팅을 의뢰해왔거든요. 저는 여기저기서 부딪히고 망가져 본 경험이 있는지라 이 친구들이 협동조합을 잘 만들게 하려고 3년을 들였어요. 늦어지더라도, 당장 돈이 안 되더라도 탄탄하게 차곡차곡 쌓아서 다 같이 오래오래 살아남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요. 그렇게 '다올문화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저도 돕고 그러다가 결국 함께하게 됐네요.

그렇게 보산동 투어를 해보니 공간에 대한 갈증이 너무 컸어요. 이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앉아서 여유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잖아요. 어디 클럽엘 들어갈 수도 없으니 항상 길에서 얘기하거나 식당에 겨우 들어가는 정도였죠. 한편으론 전시와 판매의 경험이 쌓인 상태였어요. 2024년에 골목의 작은 공간에서 4개월 정도 마을과 관련된 전시를 했거든요. 동네에 미군 물건을 엄청 많이 갖고 계신 분 덕분에 미군 물건과 이 마을 하고 관련된 것들로 작은 전시를 마련해봤는데, 마을 분들이 너무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시답잖게 살았던 것도 전시가 되느냐, 너무 좋다' 하셨지요. 또 예전에 만든 캐릭터로 굿즈를 개발하고 팝업스토어에서 판매도 해봤었고요. 딱 이런 시점에 경기문화재단의 2025년 지붕없는 박물관 공모사업에 이곳이 선정된 거죠."

- 이곳에서 당분간 어떤 걸 계획하고 계시나요.

"일단 작년에 '우리동네 그리기' 활동에서 사장님들이 직접 그린 가게 그림들을 조만간 가게 앞에 하나씩 걸어드릴 거예요. 그 옆에는 동네나 가게 이야기를 붙일 거고요. 또 이 협동조합이 1년에 네 번 정도 마을잔치를 조그맣게 해왔거든요. 감자 삶고 떡이랑 잡채도 해서 마을 분들께 갖다드리며 인사를 드렸는데, 앞으로는 여기서 잔치를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올해 비욘드보산의 주제가 '내 인생의 꽃'이니까 이 동네 사람들의 꽃 같았던 시절, 기억 등을 모아보고 싶어요. 아, 나중에 쿠키 만들기 특강하면 알려줄게요, 놀러 와요.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진 모르지만, '우리동네 박물관'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마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무슨 유명한 작가나 작품이 들어오는 순간 마을이랑은 멀어지는 것 같아요. 앞으로 여기 주민들의 물건이나 이야기들이 더 들어오면 훨씬 예쁘고 재밌어지겠죠.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박물관이 되면 좋겠어요."
 비욘드보산 박물관에서 판매하고 있는, 보산동 마을 이야기가 담긴 물품들을 소개하는 최희신.
ⓒ 김은지
 동두천의 양장점 사장님이 된 독구. '개들도 달러를 물고 다닐 정도로' 활기차고 풍성했던 옛날 보산동, 미군들이 부르던 'Dog'을 우리식으로 바꾸어 이름 붙였다.
ⓒ 김은지
- 방문객들이 어떤 걸 느끼고 가기를 바라세요?

"그냥 '이런 마을이 있구나,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가면 되죠. 독구 기념품 많이 사주면 좋겠고(웃음)."

어쩌다 보니 성병관리소라는 오래된 건물을 지키게 된 사람, 동두천의 이야기를 모으고 전하게 된 사람. 그래서 섣불리 설득하는 대신 천천히 자리를 만드는 사람. 궁금하면 한번 와 보라고, 들어 보라고 초대하는 사람. 그의 초대에 응한 우리는 같은 곳에 모여 각자 다른 질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최희신 활동가의 초대는 그 질문 앞에서 다시 시작된다.
 세상의 변화에는 늘 공익활동가가 있습니다. '공익활동가주간'은 공익활동가들에 대한 존중과 지지를 바탕으로 사회적 인정 문화를 만들기 위한 전국 단위의 행사입니다. 2026년에는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 일주일 동안 전국 곳곳에서 공익활동가를 응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연대의 장이 열렸습니다.
ⓒ 공익활동가주간추진위원회
인터뷰어 : 김은지
최희신 활동가가 진행하는 동두천의 메모리얼 투어에 우연히 참여했다가 최희신과 동두천을 만나게 되었다. 여성과 언어, 교육 사이 어딘가에서 서성이는 중이다. 경기여성연대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 시작하는 평등한 교실>, <벨 훅스 같이 읽기>를 같이 썼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변화를만드는사람들 홈페이지, 소셜임팩트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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