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맞는 화폐·금융시스템 전면 재설계
[임선영 기자]
화폐의 가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시대마다 모습을 달리하며 진화해 왔습니다.
금본위제에서 페트로달러까지
금본위제 시대에 화폐는 금이라는 유한한 실물에 묶여 있었습니다. 금을 캐야 돈을 찍을 수 있었고, 금광의 생산량이 통화 공급을 결정하는 절대 기준이었습니다. 이 체제는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 질서를 지배했으나, 금은 경제 성장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금광 생산이 부족하면 디플레이션이 찾아왔고, 과잉이면 인플레이션이 뒤따랐습니다. 물리적 한계가 곧 화폐 제도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이 한계를 넘어서려는 역사적 시도였습니다. 달러를 금에 고정하고 각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하는 이른바 금환본위제입니다. 금의 물리적 이동이라는 불편을 제거하고 달러라는 매개 통화로 국제 결제의 효율을 높인 혁신이었으나, 미국의 달러 발행량이 금 보유량을 초과하면서 1971년 닉슨 쇼크를 기점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 페트로달러 체제입니다. 1974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비밀 협정을 맺었습니다. 미국이 안보를 보장하는 대가로 사우디는 모든 원유 거래를 달러로만 결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석유라는 전략 자원이 화폐의 새로운 닻이 되었고, 이후 반세기 동안 '석유를 사려면 달러가 필요하다'는 공식이 세계 경제를 지배했습니다. 금의 물리적 한계 대신 석유라는 필수 자원을 닻으로 삼음으로써 미국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연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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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메이저 상업은행 "교통은행"에서 2026년 4월 배포한 디지털 위안화 App2.0 - 고객이 예금, 대출, 결제 등 사용 방법을 쉽게 이해하도록 가이드를 함께 배포한다. |
| ⓒ 교통은행 |
6월 종전 협상에서 미국이 18년 만에 이란산 원유의 달러 결제를 다시 허용했지만, 한번 깔린 위안화 결제망은 걷히지 않습니다. 페트로달러 체제는 스스로 견고하지 않음을 증명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페트로달러 이후의 닻은 무엇이 될까요.
데이터, 제5의 생산 요소로 격상되다
중국은 이 질문에 기존과 전혀 다른 차원의 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금이나 석유 같은 물리적 자원이 아니라, AI가 생산하는 무형의 연산 단위인 토큰(Token)을 화폐의 새로운 닻으로 삼으려는 시도입니다.
토큰 이코노미의 출발점은 데이터의 생산요소화입니다. 2020년 4월 중국은 데이터를 토지·노동·자본·기술에 이은 제5의 생산요소로 공식 지정했습니다. 데이터가 더 이상 디지털 경제의 부산물이 아니라 국가 경제 성장을 이끄는 핵심 자원으로 재정의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데이터는 기존 생산요소와 근본적으로 다른 속성을 지닙니다. 사용해도 소멸하지 않는 비소비성, 동시에 여러 곳에서 활용할 수 있는 비배타성, 쓸수록 오히려 더 많은 데이터가 만들어지는 재생산성. 데이터가 전통적 생산요소를 지배해 온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에서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제도가 뒤를 받쳤습니다. 2022년 12월 중국은 '데이터 20조'를 발표하며 데이터의 소유권·사용권·운영권을 분리하는 3권 분리 구조를 제시했습니다. 소유권을 넘겨받지 않고도 데이터를 활용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길을 연 제도적 혁신입니다. 2024년 1월 1일부터는 데이터 자산의 대차대조표 계상이 시행되어, 데이터는 기업의 무형자산으로 인정받고 담보·대출·출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6년, 중국은 올해를 '데이터 요소 가치 창출의 해'로 지정했습니다. 국가데이터국은 '데이터 요소×' 3개년 액션플랜을 통해 11개 산업 분야에서 760개 이상의 데이터 활용 시나리오를 구체화했고, 5월에는 《2026년 디지털 경제 발전 업무 요점》을 발표해 데이터 요소 시장화 개혁을 8대 중점 과제의 첫머리에 올렸으며, 7월에는 <데이터 재산권 등록 업무 지침(시행)>을 발효시켜 데이터 재산권 제도를 '최상위 설계' 단계에서 '본격 시행' 단계로 진입시켰습니다.
토큰 소비의 폭발
이러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AI 모델의 발전과 에이전트의 산업 도입이 맞물리며, 변화는 실물 경제 지표로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2026년 3월 중국의 일일 AI 토큰 호출량은 140조를 돌파했습니다. 2024년 초 약 1000억에서 불과 2년 만에 1000배 이상 늘어난 수치입니다. 류례훙(刘烈宏) 국가데이터국 국장은 중국발전고위층포럼에서 토큰이 더 이상 기술 용어가 아니라 경제의 새로운 측정 단위로 기능하기 시작했다고 선언했습니다.
토큰의 이중적 의미, 하나의 가치 체계로 수렴하다
중국이 설계하는 토큰 이코노미의 핵심은, 토큰이라는 개념이 지닌 이중적 의미가 하나로 통합되는 데 있습니다.
첫째, AI 토큰입니다. AI 모델이 처리하는 데이터의 기본 단위로, 모든 AI 추론과 생성은 토큰을 소비하고 생산합니다. 2026년 6월 국가데이터국은 <업계 고품질 데이터셋 구축 행동 실시 방안>에서 "토큰을 기반으로 한 측정 가능하고 가격 책정 가능한 데이터 가치 체계" 구축을 공식 비전으로 제시했습니다. 데이터 거래의 대상이 거대하고 모호한 '데이터셋'에서 세분화되고 측정 가능한 '가치 단위'로 진화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금융 토큰입니다. 디지털위안화 2.0의 핵심 아키텍처인 '계좌 체계·토큰·스마트 계약' 가운데 토큰은 추적 가능하고, 분할 가능하며, 위변조가 불가능하고, 법정 상환이 보장되는 디지털 증서입니다.
이 두 토큰이 지금 융합되고 있습니다. AI가 생산한 토큰이 디지털위안화의 토큰으로 즉시 결제될 수 있다면, 토큰 이코노미는 데이터 단위에서 화폐 가치로 전환됩니다. 데이터는 더 이상 '현금화'될 필요가 없습니다. 데이터 자체가 화폐의 측정 단위가 되는 것입니다. 토큰은 연산력 소비와 에이전트 실행, 그리고 비즈니스 가치를 담아내는 핵심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디지털위안화 2.0, 프로그래머블 화폐의 등장
2026년 1월 1일, 디지털위안화는 '디지털 현금 1.0'에서 '디지털 예금 통화 2.0'으로 진화했습니다. 통화 지위가 M0에서 M1으로 격상되어 실명 지갑 잔액에 활성 예금 금리로 이자가 지급되고 예금보험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프로그래머블 화폐가 되었습니다.
스마트 계약을 탑재해 조건부 자동 지급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돈에 조건을 심어, 그 조건이 충족될 때만 지급되도록 설계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소비 보조금은 특정 가맹점, 특정 품목, 특정 시간대에만 쓰이도록 코딩되고, 공급망 금융의 매출채권은 물품 검수가 끝나는 순간 자동 지급되도록 프로그래밍됩니다.
2026년 1월 말 기준 디지털위안화 스마트 계약은 선불 자금 관리, 공급망 금융, 기업집단 재무 관리, 보조금 지급 등의 분야에서 누적 체결 48만 6,400건, 누적 거래액 3.16억 위안을 기록했습니다. 화폐는 더 이상 단순한 돈이 아닙니다. 실행 가능한 디지털 계약입니다.
향후 5년, 토큰 이코노미의 청사진
2026년은 중국 '15차 5개년 규획'의 원년이며, 이 규획은 토큰 이코노미의 제도적 기초를 완성하는 청사진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디지털위안화가 국가 금융 인프라이자 통화 주권의 핵심으로 격상되었습니다. 둘째, 데이터 요소의 전 산업 적용을 위한 전국 통일 데이터 시장 건설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국가데이터국은 '데이터 요소 시장화 배치 개혁 531 업무 체계'를 통해 데이터의 공급·유통·활용·안전을 총괄합니다. 셋째, 토큰 거래의 제도화로 토큰이 데이터 거래의 기본 단위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이 추구하는 토큰 이코노미는 단순한 기술 용어가 아니라 화폐의 존재론 자체를 바꾸는 시도입니다. 기존 화폐 체제에서 가치는 물리적 실물이나 국가 신용으로 담보되었으나, 토큰 이코노미에서 가치는 AI의 생산력으로 담보됩니다.
데이터가 토큰으로 생산되고, 토큰이 디지털위안화로 결제되며, 디지털위안화가 글로벌 결제 인프라를 타고 유통되는 완전한 가치 사슬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슬에서 토큰은 생산의 측면에서는 측정 단위로, 교환의 측면에서는 가치 단위로, 거버넌스의 측면에서는 통제 단위로 기능합니다. 금본위제가 금에, 페트로달러가 석유에 고정되었던 것과 동일한 논리입니다. 다만 그 닻이 물리적 자원에서 무형의 지적 생산물로 옮겨졌을 뿐입니다.
중국은 화폐를 다시 쓰고 있다
다른 국가들은 AI를 기존 경제 시스템 위에 얹는 기술로 인식하고 데이터와 토큰을 화폐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으로 처리합니다. 그리고 CBDC가 사생활을 침해하는지, 스테이블코인이 금융 안정을 위협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합니다. AI라는 새로운 생산력이 등장했기에, 그 생산력이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생산관계, 즉 화폐와 금융과 자본시장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은 화폐를 AI에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AI 시대에 맞는 화폐·금융 시스템으로 전면 재설계하는 중입니다. 금본위제가 무너지고 페트로달러가 균열을 드러낸 지금 중국은 가장 강력하게 토큰 이코노미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누구도 성공을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화폐의 진화가 물리적 자원에서 무형의 지능으로, 유한함에서 무한함으로 국가 신용에서 프로그래머블 코드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덧붙이는 글 | 임선영씨는 중국 칭화대 전산언어학 석사를 마친 중국경제전문가이며 <중국경제 미래지도>, <중국AI 미래지도>의 저자입니다. 이 글은 본인의 페이스북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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