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경와인셀라]美나파밸리 적신 'K-와인'… 혁신의 아이콘 '이노바투스'
美 와인 심장 나파밸리 '떼루아' 승부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희소성↑
편집자주
하늘 아래 같은 와인은 없습니다. 매년 같은 땅에서 자란 포도를 이용해 같은 방식으로 양조하고 숙성하더라도 매번 다른 결과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와인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우연의 술'입니다. 단 한 번의 강렬한 기억만 남긴 채 말없이 사라지는 와인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아경와인셀라'는 저마다 다른 사정에 따라 빚어지고 익어가는 와인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 들려 드립니다.
폐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가 최초의 한국인 여성 와인 메이커를 주목하고 있다. 주인공은 미국 와인의 심장으로 꼽히는 나파밸리에서 이노바투스를 설립한 세실 박(한국명 박수연). 라틴어로 '혁신하다'라는 뜻을 지닌 이노바투스는 전형적인 나파밸리 스타일에 머무르지 않고 블렌딩이나 양조법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는 와이너리로 알려졌다.
대량 생산을 하는 거대 와이너리들과 달리 이노바투스는 엄격하게 선별된 포도밭에서 소량만 생산하는 '부티크 와이너리'다. 포도밭 관리부터 재배, 수확, 양조에 이르기까지 세실 박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과정은 없다. 이노바투스는 세실 박이 와인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직접 통제하고 조정하면서, 한 해에 몇백 케이스 정도만 한정 생산해 희소성이 높다.
무시당하던 여성 이민자… '떼루아'에 집중
세실 박은 20대 후반까지 와인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그는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한 뒤, 일반 회사에서 일하던 평범한 직장인으로 지내다 미국으로 MBA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마트에서 우연히 산 캘리포니아 와인에 빠져들면서 와인 메이커의 길로 접어들었다. 와인 업계 엘리트 코스라고 불리는 UC데이비스에서 와인 양조학을 공부했지만, 나파밸리는 여성 이민자인 세실 박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나파밸리 와이너리에 인턴으로 들어가 와인 잔을 설거지하는 일부터 시작한 그녀가 백인 남성의 독무대였던 나파밸리에서 인정받기 위해 택한 방법은 포도만 관리하는 와인 메이커가 아닌 빈야드(포도밭)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컨설턴트'가 되는 것이었다. 와인 재배의 기본인 '떼루아'(어떤 작물이 자라는 토양과 기후·자연 조건 등)에 집중해 기후와 토양 등을 따져가며 포도를 재배하고 가꾸겠다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세실 박은 나파밸리 와인의 상징적인 와인 메이커로 평가받는 하이디 배럿(Heidi Barrett) 과도 함께 일하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경험은 그녀가 나파밸리의 포도밭, 생산자, 와인 양조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는 기반이 됐다. 이후 그녀는 2007년 와인 컨설팅 회사 '와인포니아'를 세우고 나파밸리 내 수십 곳의 포도밭을 직접 설계하고 관리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와인 업계에 뛰어든 지 10여년만인 2014년, 세실 박은 자신의 브랜드인 이노바투스를 출범시켰다.
풍부한 현장 경험은 뛰어난 떼루아와 개성 있는 와인을 선별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성하는 이노바투스의 철학으로 이어졌다. 피노 누아, 시라, 카베르네 프랑을 섞어 와인을 만들어내고 나파밸리에서는 비주류 품종인 '비오니에'로 화이트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을 양조하는 등 혁신적인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행을 따르지 않고 다양한 품종을 블렌딩하거나 다른 이들이 시도하지 않는 품종을 재배하는 세실 박의 와인 철학은 다양한 기후와 토양이 존재하는 나파밸리였기에 가능했다.
다양한 기후·토양 갖춘 나파밸리… 화산재부터 고지대까지
나파밸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부에 위치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최고급 와인 생산지 중 하나다. 나파밸리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은 미국 와인 전체 생산량의 약 4%에 불과하지만, 그 품질과 상업·문화적인 가치는 프랑스의 보르도나 부르고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뛰어나다.
나파밸리의 길이는 약 48km, 폭은 8km 남짓한 좁은 골짜기다. 낮에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밤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포도의 산도를 지켜주면서 와인의 깊은 풍미를 만든다. 또 전 세계에 존재하는 토양 종류 중 절반 이상이 나파밸리에 밀집해 있다. 화산재, 자갈, 점토 등이 뒤섞여 있어 구역마다 완전히 다른 개성의 와인이 만들어진다.
나파밸리는 평지·구릉지대, 서늘한 남부 지대, 척박한 산악 지대로 나뉜다. 이노바투스의 와인은 나파밸리의 중심부에 있는 러더포드, 고지대에 위치한 하웰 마운틴, 나파밸리의 숨은 보석으로 불리는 쿰스빌, 평온한 기후의 오크놀 등 다양한 지역에서 자란 포도로 만들어진다. 나파밸리의 레드 와인은 대개 무겁고 진하고 오크 향이 강한 묵직한 스타일이 주를 이루지만, 이노바투스의 와인은 싱그럽고 부드럽고 우아한 산미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더포드는 뛰어난 카베르네 소비뇽 생산지로 명성이 높은데, '나파밸리의 왕'으로 불리는 카베르네 소비뇽은 블랙베리의 진한 과실 향과 민트, 초콜릿 등의 향이 조화를 이루면서 입안을 꽉 채우는 풍부한 바디감과 매끄러운 타닌을 지니고 있다. 러더포드의 카베르네 소비뇽은 낮 동안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과실향이 풍부하고 밤이 되면 산 파블로 만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안개와 바람의 영향을 받아 묵직하면서도 균형 잡힌 산도를 자랑한다.
실험과 도전… 소량 양조로 '프리미엄 와인' 반열
이노바투스가 러더포드에서 생산해내는 카베르네 소비뇽은 러더포드 중에서도 가장 축복받은 토양에서 자란 포도만을 엄선해 매해 날씨에 상관없이 엄청난 구조감과 깊이가 있다. 이노바투스는 러더포드에서 카베르네 프랑과 쁘띠 베르도, 샤르도네 등의 품종을 생산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 정식 수입되고 있는 이노바투스의 러더포드 '2018 카르베네 소비뇽'은 레드체리와 블랙베리의 생동감 넘치는 첫 향과 와인이 점차 열리면서 은은한 바닐라향이 조화를 이루면서 부드러운 타닌과 크리미한 여운이 인상적이다.
하웰 마운틴은 이노바투스의 핵심 기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세실 박이 하웰 마운틴에 위치한 포도밭을 매입하면서 흙과 묘목 등의 상태를 직접 관리하기 때문이다. 하웰 마운틴은 나파밸리에서 가장 높은 고도에 위치한 곳으로, 포도밭이 해발 약 790m까지 조성돼 있다. 지대가 안개보다 높은 곳에 있어 온종일 강렬한 햇빛을 받고 척박한 화산성 토양으로 인해 알이 아주 작고 껍질이 두꺼운 농축된 포도가 열리는 지역이다.
이노바투스가 하웰 마운틴에서 생산하는 와인에는 세실 박이 나파밸리 최고의 척박한 떼루아에 도전한 개척과 혁신이 농축돼 있다.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하웰 마운틴에서 생산되는 이노바투스의 카베르네 소비뇽은 산악 와인의 강인함과 매끄럽게 다듬어진 타닌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노바투스 파이어 호스 하웰 마운틴 카베르네 소비뇽 2021'은 고지대 특유의 응축된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와인으로 350병 미만으로 생산된 한정판이다.
나파밸리 남부의 쿰스빌은 이노바투스의 주요 화이트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에 들어가는 핵심 포도 품종을 재배하는 곳이다. 나파밸리의 대부분의 와인 메이커들이 무겁고 달콤한 포도를 선호할 때 세실 박은 서늘한 기후인 쿰스빌에 주목했다. 쿰스빌은 시원한 바람이 오랫동안 머무는 지형으로, 포도가 천천히 익으면서 포도의 산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쿰스빌의 포도는 뛰어난 신선함과 청량감을 느낄 수 있다. 이노바투스는 이곳에서 프랑스 론 지방의 고급 품종인 비오니에와 샤르도네, 카베르네 소비뇽 등을 생산하고 있다.

오크놀은 자연을 품은 뛰어난 와인의 산지로, 나파밸리 남부에 위치하면서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파밸리가 카베르네 소비뇽에 집중할 때 세실 박이 '카베르네 프랑'을 키워내기 위해 엄선한 지역이 오크놀이다. 카베르네 프랑은 너무 더울 경우 특유의 향이 날아가 버리고 너무 추우면 덜 익은 풀 비린내가 나기 쉬운데, 안개와 햇빛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오크놀은 카베르네 프랑을 재배하기 안성맞춤인 환경을 지녔다.
오크놀에서 만들어진 이노바투스 와인은 자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포도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정성껏 빚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소량 생산되는 탓에 구매 경쟁이 치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노바투스 카베르네 프랑 2021'이 오크놀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와인인데, 블렌딩용으로 주로 쓰이던 카베르네 프랑 품종의 매력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636병만 생산돼 희소가치가 높은 프리미엄 와인이다.
이노바투스는 이들 지역 외에도 나파밸리의 여러 지역에서 피노누아, 진판델 등 다채로운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글로벌 와인 플랫폼인 비비노(Vivino) 데이터와 와인 평론 매체 등의 평가를 보면 이노바투스의 카베르네 소비뇽은 비비노 평점 4.4점을 기록하며 전 세계 와인 중 상위 3% 안에 드는 최상급 품질로 분류된다. 피노 누아와 시라, 카베르네 프랑을 독창적으로 블렌딩한 '이노바투스 퀴베'는 석류와 블루베리의 향과 뒷맛에는 미묘한 라벤더의 향을 느낄 수 있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와인 품종별로 연간 수백 케이스 수준의 소량만 양조하는 이노바투스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모수'의 안성재 셰프와 협업하면서 소비자들에게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캘리포니아 관광청 주최로 2024년 11월에 열린 VIP 행사에서 안 셰프는 이노바투스 와인과 함께 코스 요리를 선보였다. 김과 무 등 한국의 식자재를 활용한 요리와 이노바투스의 와인을 페어링해 큰 관심을 끌었다.
세실 박은 "한국인 와인메이커로서 이노바투스가 한국 소비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바라기는 세계적인 와인 산지에서 쌓아온 저의 경험과 감각으로 한국인의 음식 문화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완성도 높은 와인을 만들고 싶다. 앞으로 이노바투스가 한국 시장에서 '한국인이 만든 프리미엄 나파밸리 와인'이라는 의미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허경준 기자 kjun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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