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디자인 창출 영감 얻는 건 노동, 인내심 싸움”

김아영 2026. 7. 10. 03:3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름 없는 장인: 책 뒤에 숨은 문장]
<하> 첫인상 빚는 북디자이너
게티이미지뱅크


잉크 냄새와 종이 질감, 서체의 미세한 기울기 속에는 저자의 치열한 고독이 스며 있다. 그것은 책이라는 세계에 첫인상을 부여한다. 닫혀 있던 원고는 디자이너들의 손끝에서 시각적 언어로 번역돼 마침내 독자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기획 시리즈 ‘이름 없는 장인’ 세 번째 순서에서는 저자와 독자가 만나는 시각적 공간을 설계하는 기독 출판계의 북디자이너들을 조명한다. 20년 가까이 두란노의 간판 도서들을 책임져온 이가은(51) 디자이너, ‘복있는사람’ 디자인 팀장 등을 거쳐 프리랜서로 영역을 넓힌 채승(49) 디자이너, 목회자의 사모이자 디자인 이프(Design IF) 대표인 유경아(48) 디자이너를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만났다. 세 사람은 “디자이너는 책이라는 건축물 안에서 저자와 독자가 소통하도록 주선하는 매개자”라고 입을 모았다.

기독 출판계 디자이너들이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 기획 시리즈 ‘이름 없는 장인’ 인터뷰를 위해 모인 모습. 왼쪽부터 이가은, 채승, 유경아 디자이너. 신석현 포토그래퍼

무수한 변수와 씨름하다

디자이너들은 철저한 자료 조사로 작업의 문을 연다. 유 디자이너는 저자의 이면을 읽으려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채 디자이너는 원고를 추상적인 이미지로 바꿔 새로운 시각을 제안한다. 이 디자이너는 서체의 미세한 뒤틀림까지 직접 잡아내며 조판의 수작업을 감수한다. 이들은 표지 디자인에서 인쇄소 감리까지 전 제작 과정을 관통하며 총괄한다.

이 디자이너는 2023년 카일 아이들먼의 책 ‘삶이 뜻대로 안 될 때’를 디자인했던 과정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가 원했던 면지 색은 ‘봄잎색’이었다. 하지만 인쇄소에 발주를 넣자 “표본 책에만 있고 생산된 적 없는 색”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른 색으로 바꾸자 이번엔 본문 종이가 품절됐다. 제작팀과 함께 “진짜 책 제목대로 간다”며 웃었다고 했다. 이 디자이너는 “일하다 보면 책 제목과 일상이 묘하게 닮아가는 순간이 있다”고 털어놨다. 디자인의 시선은 텍스트 해석을 넘어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영역으로 확장된다. 유 디자이너는 “원고가 아무리 좋아도 저자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출판사가 요구하는 지점은 늘 충돌하기 마련”이라며 “그 틈바구니에서 최적의 비율과 균형점을 찾아 판형을 정하고 시안을 명확히 제안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한 권의 책이 서점 매대에 오르기까지 디자이너의 작업실은 수많은 변수와 씨름하는 치열한 현장이다.

편집자와 소통, 책상 위 인내

이 디자이너는 담당 편집자와 긴밀한 소통을 강조했다. 특히 번역서 작업에서 방향을 잡을 때 편집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페이지 번호에 ‘쪽’을 꼭 써야 한다는 편집자부터 특정 단어 사용을 고집하는 이들까지 저마다 선호하는 양식에 맞춰 최상의 조화를 찾는 것도 디자이너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디자인적 영감을 어디서 얻느냐는 질문에 이 디자이너는 명쾌한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디자인의 아이디어를 주는 ‘영감님’은 쉽게 오지 않아요(웃음). 디자인은 결국 철저한 노동이고, 책상 앞에서 오래 버티는 인내심과 성실함으로 승부하는 ‘엉덩이 싸움’이지요.”

이들은 기독 출판계의 고질적인 쏠림 현상에 아쉬움을 토로하며 더 다양한 목소리가 채워지길 바랐다. 국내 기독교 서점 매대가 유명 석학이나 대형교회 목회자의 책으로 주로 채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채 디자이너는 “북디자인은 저자가 평생 고심해 도출한 결과물을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다리”라며 “유명 저자의 이름값과 화려한 직함에만 의존해 비슷한 기획과 보수적인 디자인이 반복되는 구조는 결국 기독교 문화의 토양을 황폐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첫인상 잡는 법


처음 날것의 원고나 기획안을 접했을 때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결정하는 방식은 저마다 노하우가 달랐다. 유 디자이너는 저자와 편집자, 출판사라는 삼각 구도의 필요를 조율하는 균형점에 초점을 맞춘다. 채 디자이너는 화려한 유행을 좇기보다 원고를 수차례 정독하며 행간에 숨은 저자의 감정과 사상의 뼈대를 찾아내는 데 집중한다.

기독교 서적 디자인의 가장 큰 벽은 이미지의 정형화다. 유 디자이너는 “은혜 고난 십자가 등의 단어들이 주는 이미지 틀이 워낙 확고해 새로운 시도에 대해 독자나 출판사가 낯설어한다”고 털어놨다. 채 디자이너 역시 기독 서적의 주 독자층이 명확하다 보니 디자인 스타일이 보수적이거나 안정적인 선에 머무는 구조적 한계를 짚었다. 이 디자이너는 “대중문화 추세와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 등을 살피며 세상보다 반 발자국 앞선 디자인을 고민한다”고 했다.

가슴 울린 활자의 여정

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작업은 무엇일까. 이 디자이너는 두란노에서 담당한 40여권의 팀 켈러 저서 중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을 꼽았다. 독자들에게 “표지가 좋았다”는 반응을 들을 때마다 그동안의 고단함이 위로받는다고 했다.

채 디자이너에게는 프리랜서로 독립한 후 2025년 12월 출간한 전기물 ‘김교신, 백 년의 외침’이 깊은 잔상을 남겼다. 100여년 전 인물을 은유하기 위해 김교신이 예찬했던 포플러 나무 이미지에 사람의 다리를 합성한 추상 시안을 제안했고 출판사가 이를 기꺼이 수용했을 때의 흡족함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경기도 고양 창대교회 사모이기도 한 유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전도와 양육의 도구로 확장했던 순간들을 꼽았다. 기독교 달력 시장의 변화를 이끈 2019년 탁상달력 출간 사업을 비롯해 유 디자이너가 이프를 통해 선보인 실용 신앙 서적 ‘나의 말씀, 나의 감사’이 대표적이다. 그는 불신자와 초신자 중심의 목회 현장에서 필요한 책을 직접 만들고 작은 교회에 무료로 나눠왔다. “제가 디자인한 책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분들에게 신앙의 마중물이 되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줄 때 비로소 신앙과 디자인이 가장 아름답게 만나는 순간을 느낍니다.”

에필로그, 북디자인의 진짜 가치

출판 시장의 침체에서도 이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디자인에 대한 확고한 사명 때문이다. 채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문제 해결의 설계’로 정의하며 “저자의 ‘사상 덩어리’를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설계이자 다리”라고 말했다. 이 디자이너는 “무엇을 넣고 뺄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정갈한 비움의 미학”이라고 정리했다.

디자인의 진정한 가치를 정직한 도구에서 찾았다는 유 디자이너의 말은 여운을 남겼다.

“기독교책 제작의 최종 목적은 결국 영혼 구원입니다. 제가 작업한 디자인이 시의적절하게 사용돼 믿지 않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성도들에게 신앙의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