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1m 쌓아 집 지었다…“침수 악몽에도 정신 못차려” 분통 왜 [예산 르포]

지난 8일 오후 2시 충남 예산군 고덕면 용1리. 장맛비가 내리는 가운데 마을 주민들이 하천 변에 나와 걱정스러운 듯 들판을 주시했다. 예당평야로 불리는 논에서는 벼가 무릎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5월 말쯤 모내기를 했으니 한 달 보름 정도 지난 시기로 지난해처럼 물에 잠기기라도 하면 농사를 망칠 수 있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마을 주민들 "피해 복구 아직 안 돼, 한숨도 못 자"
마을 주민 이유선씨(70)는 “칠십 평생을 고향에서 살면서 작년 같은 폭우는 처음 겪었다”면서 “순식간에 제방이 무너지면서 논밭은 물론 집과 축사까지 모두 물에 잠겨 주민들이 한참을 고생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작년 피해가 아직 복구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호우특보가 발령돼 한 숨도 못 잤다”고 말했다.
용1리 마을 주민들은 농어촌공사가 용3리에 건설한 다리가 물길을 막아 또다시 마을이 침수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인근에 다리가 있는데도 의견수렴 절차도 없이 공사를 강행했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다리 교각이 물 흐름을 막고 교각 위에 설치한 난간에 떠내려온 나뭇가지나 쓰레기가 걸리면서 물이 역류해 모두 논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라는 게 주민들의 생각이다.

이날 오후 용3리에서 만난 주민 김성진씨(80)는 중앙일보 취재진에게 “이런 다리는 난생처음 본다. 다리 높이가 낮아 물이 조금만 불어나도 건널 수 없다”며 “불과 100m 거리에 두 개의 다리가 있는데도 왜 이런 공사를 진행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관계기관에 물어보니 이미 설계가 돼서 무조건 다리를 설치해야 한다는 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 역시 지난해 내린 폭우로 논과 축사가 모두 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었다.
주민들 반대에도 건설한 다리 '범람' 장애물
김씨는 다리 건설과 함께 진행한 제방 공사가 부실해 어지간한 물살에도 블록이 모두 떠내려갈 것 같다고 했다. 실제 본지 취재진이 확인한 제방은 흙을 고정해주는 블록이 절반 정도만 설치됐고 나머지는 흙 바닥 그대로였다. 운동화로 툭 쳐도 흙덩어리가 그대로 떨어질 정도로 부실했다.
김성진씨는 “엊그제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하천에 나와 보는 데 불안해서 발길을 돌리기 어렵다”며 “이 다리만 없어도 그나마 견딜 텐데, 비가 적게 내리기만을 비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용3리 마을 주민들은 빗소리만 들려도 잠이 깨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고 했다.

하포1리와 삽교천을 마주한 고덕면 구만리에서는 제방 보수공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대형 중장비로 제방에 쌓을 블록을 옮기는 작업은 비 때문에 중단된 상태였다. 제방 윗부분은 콘크리트를 깔지도 못해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삽교천을 알리는 안내판은 제방 경사면에 나뒹굴었다. 구만리 주민들은 “도대체 언제 공사를 마칠지 기약이 없다”며 “작년에 그렇게 큰 피해가 났는데도 정부와 충남도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 지자체 못 믿겠다" 일부 주민들 직접 대책 마련
일부 주민들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믿지 못하겠다며 직접 대책 마련에 나서기도 했다. 젖소를 키우는 한 농가는 불어난 물에 소가 휩쓸리지 않도록 높은 공간을 따로 설치했고 몇 차례 대피훈련도 진행했다. 집이 물에 잠겼던 주민은 바닥에 커다란 돌과 시멘트를 1m 높이로 쌓고 새로 집을 지었다.
충남 예산에서는 지난해 7월 16일부터 사흘간 내린 비로 삽교읍과 고덕면, 오가면 지역이 물에 잠기면서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예산에는 시간당 100㎜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지면서 삽교천과 무한천이 범람했다. 설상가상으로 상류인 예당호에서 시간당 1000㎥가 넘는 물을 방류하면서 순식간에 제방이 무너졌다.

삽교읍 하포1리는 밤사이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면서 주민들이 옷가지조차 챙기지 못하고 제방 둑으로 몸을 피했다. 7월 17일 오전 6시쯤 이장의 안내방송을 듣고 주민들이 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 마당까지 물에 잠긴 상태였다. 마을회관으로 몸을 피했던 주민 10여 명은 창문까지 물이 차오르자 옥상으로 올라가 가슴을 졸이며 구조를 기다렸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는 데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출동한 119구조대는 고무보트를 투입,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송했다.
충남도, 호우 대비 공무원 24시간 비상근무
한편 충남도는 지난 8일 지역재난안전대책본부(지대본) 1차 회의를 열고 호우 대비 상황을 점검했다. 홍종완 행정부지사와 15개 시·군 부단체장이 영상으로 참여한 회의에서는 기상 현황과 대처 상황 보고 등이 이뤄졌다. 충남도와 시·군에서는 호우 피해에 대비, 220명의 공무원이 24시간 비상근무 중이다. 홍종완 부지사는 “많은 비가 예상되는 만큼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고 경찰 등 관계 기관과도 협력해 도민 안전과 시설 피해 예방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예산=신진호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엄마 사고사” 딸은 몰랐다…유품정리사 얼어붙은 ‘욕실 물건’ | 중앙일보
- 패륜 장남, 이젠 유산 못받는다…효녀가 꼭 챙겨야 할 ‘증거’ | 중앙일보
- ‘만삭 아내’ 기괴한 죽음…의사 남편, 빈소서 노트북 켜고 한 짓 | 중앙일보
- 어린이 78명 ‘HIV 집단감염’…“병원서 주사기 재사용” 부모 울분 | 중앙일보
- ‘메시와 불륜설’ 여기자 “메시 아내도 연락 와, 난 표적 됐다” | 중앙일보
- 비행 훈련중 문 열고 뛰어내렸다…베테랑 교관 마지막에 아르헨 충격 | 중앙일보
- 버스 추락해 40명 사망…“승객이 기사 목 잡았다” 이 나라 발칵 | 중앙일보
- “예쁘고 맛 좋다”…최근 제주 등장한 ‘푸른꽃게’ 알고보니 | 중앙일보
- [단독] 암투병 딸 죽음 뒤…‘독약 짬뽕’ 먹여 남편 살해한 아내, 왜 | 중앙일보
- “여학생 건강검진, 속옷 꼭 벗어야 하나”…발칵 뒤집힌 이 나라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