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역사를 파고들수록 한글, 세계에서 가장 쉽고 편하다는 거 절감"

김슬옹 2026. 7. 8. 12:07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문자 전파담> 로버트 파우저 작가

[김슬옹 기자]

▲ 서울 마포역 뒷골목에서 신간 <문자 전파담>을 들고 있는 로버트 파우저 작가 
ⓒ 강형원
<외국어 전파담>(2021년 9월 출간)으로 꽤 많은 한국 독자층이 있는 로버트 파우저 작가는 필자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2025년에 나온 필자의 <한글학> 개정판 추천사를 써 주었기 때문이다. '문자의 전파 과정을 통해 새롭게 읽는 세계 문명사' <문자 전파담>(2026년 6월 출간) 출간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몹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그를 지난 2일 마포역 뒷골목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필자와 함께 월인천강지곡 해설서 공동 집필에 참여하고 있는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은 바 있는 강형원 기자와 함께 해서 더 풍성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미국인으로서 일본에서 13년, 한국에서 13년 머무른 바 있고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도 6년 봉직한 바 있는 국제 유목민적 지식인이 쓴 책인지라 더 흥미롭게 완독할 수 있었다.

전생에 한국인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한국어가 자연스러운 그였기에 외국인임을 망각(?)한 채 더 수다를 떨었다.

"책 쓰면서 한글 전용주의자 됐다"

- 영어가 모어인 학자가 인문교양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로 직접 써 오셨습니다. 번역을 거치지 않고 한국어로 사유하고 집필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요. 특히 '문자'를 다루는 책을 한국어로 쓴다는 데는 또 다른 울림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 독자들과 직접 소통하고 싶어서 앞으로도 한국어로 계속 쓸 생각입니다. 다른 길은 생각도 안 해 봤어요. 책을 쓰는 과정 자체가 큰 배움이었습니다. 원고를 쓰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제가 지적으로 성장하는 걸 스스로 느끼는 일이 즐거웠어요.

사실 이 책을 쓰면서 저 자신이 뜻밖에도 완전한 한글전용주의자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예전에는 한자를 좀 더 써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는데, 문자의 역사를 파고들수록 한글이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문자 가운데 가장 쉽고 편한 문자라는 걸 새삼 절감했거든요. 문자를 다루는 책을 한국어로, 한글로 쓴다는 것이 바로 그 변화와 맞물려 있습니다."

- '외국어 →학습 →도시 →문자'로 이어지는 흐름이 보입니다. 결국 '문자'에 닿으신 까닭이 궁금합니다. 이 책은 앞선 작업의 종착점인가요, 새로운 출발점인가요.

"제 책들은 크게 '언어'와 '도시'라는 두 축으로 봐 주시면 됩니다. 다음 책을 의논하다가 의기투합했고, 그중에서 먼저 '문자'에 관한 책을 쓰기로 정했어요. 문자는 결국 언어라는 큰 흐름의 한 갈래입니다. 그러니 이 책은 어떤 종착점이라기보다, 다음 순서인 '언어'에 관한 책으로 이어지는 매듭에 가깝습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어요."

- '문자의 유무나 발생 시기로 문명의 우열을 가르지 말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날카로운 화두입니다. 서구 학계가 라틴 문자 체계의 형성을 문명 발달의 표준 경로로 삼아 온 데 대한 비판인데, 그 한계를 자각한 결정적 계기가 있었는지요.

"라틴 문자가 지금 전 세계에서 누리는 패권은, 따지고 보면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약 500년간 서양 몇몇 나라가 벌인 제국주의의 결괏값입니다. 그런데도 서양의 주류 학자들은 이 점을 거의 반성하지 않아요. 라틴 문자가 다른 문자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은근히 감춰져 있죠.

저는 이 책을 쓰는 동안 그런 문화적 우월주의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넓게 퍼져 있다는 걸 마주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바로 그 문화권 사람이라는 데서, 저부터 반성하고 싶었어요. 문자는 환경과 필요에 따라 생겨난 산물일 뿐입니다. 먼저 생겼다고, 문자가 있다고 해서 그 문명이 더 우월한 건 결코 아니에요."

- '문자를 전파한 힘센 쪽'이 아니라 '전파된 문자를 받아들여야 했던 문자의 약자의 역사를 놓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그 역사를 어떻게 복원하셨는지요.

"제가 지키려 한 원칙은, 글자 모양이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영향 관계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북미 체로키 문자에는 한글과 닮아 보이는 글자가 있어요. 하지만 19세기 초에 미국과 조선 사이에는 사실상 교류가 없었으니 한글의 영향일 수는 없습니다. 그냥 우연히 닮은 거죠.

또 하나 꼭 구분해야 할 게 있어요. '문자로 말을 기록할 수 있다'는 개념 자체를 배운 것과, 특정 문자를 그대로 모방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사료가 부족한 변방 문자일수록 이렇게 조심스럽게 교차 검증을 해야, 힘센 쪽에 가려졌던 그들의 자리를 제대로 복원할 수 있습니다."

문자 전파의 두 축은 권력과 종교

- 제국의 행정적 강제가 문자 전파의 한 축이었지만, 제국이 쇠퇴한 대전환기마다 문자 지도를 새로 그린 더 강력한 힘은 '종교'였다고 보셨습니다. 정치 권력보다 종교가 문자를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한 까닭은 무엇인지요.

"문자 전파에는 두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권력이고 하나는 종교예요. 제국의 문자는 행정과 통치를 따라 퍼집니다. 그런데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문자를 전혀 다른 토양에 뿌리 내리게 하는 힘이 바로 종교였습니다. 신성한 경전과 신앙을 전하는 일은 정치적 국경을 가볍게 넘어서니까요. 한자가 불교를 타고 베트남과 한반도, 일본으로 건너간 것, 아랍 문자권과 브라흐미 문자권이 넓게 형성된 것이 모두 그런 사례입니다. 권력은 문자를 실어 나르고, 종교는 그 문자를 사람들의 삶 깊숙이 심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 거란문자·여진문자·서하문자처럼 황제가 직접 문자 개발을 주도한 사례가 흥미롭습니다. 한자라는 압도적 권위 안에서도 굳이 독자 문자를 만든 동기를 어떻게 읽으셨습니까? 같은 한자권에서도 일본의 가나, 베트남의 쯔놈, 한글이 걸어간 토착화의 길을 가른 결정적 변수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한자의 권위가 그렇게 압도적인데도 변방에서는 끊임없이 독자 문자가 나왔습니다. 그 자체가 주체성의 표현이에요. 한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최만리가 반대 상소(1444.2.20.)에서 몽골이나 여진 같은 이른바 '오랑캐'가 제 문자를 만든 걸 부정적으로 든 데서 보이듯, 명나라 문화를 존중하던 조선 지배층에게 새 문자를 만드는 일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했어요.

그래서 세종은 한글을 집현전의 공식 사업이 아니라 왕 개인의 사업으로 조용히 추진했습니다. 가나든 쯔놈이든 한글이든, 토착화의 길을 가른 건 결국 각 사회의 정치적 환경과, 그 문자를 만든 사람이 어떤 자리에 있었느냐였다고 봅니다."

- 한글을 '독창적 제자 원리를 가진 고립된 문자'로만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주변 문자와 '주체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진화한 결과물'로 조명하셨습니다. 한글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것이 자칫 그 독창성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읽힐 위험은 없을까요. 두 가지를 어떻게 양립시키시는지요.

"한글은 어느 날 갑자기 무(無)의 상태에서 툭 튀어나온 문자가 아닙니다. 분명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태어났어요. 세종이 다른 문자들을 참고했다 하더라도, 형태를 그대로 베끼기보다 그 장단점을 꼼꼼히 분석했을 겁니다. 이를테면 낱글자를 하나의 네모 블록으로 모아 쓰는 방식은 아부기다(자음과 모음의 결합을 기본으로 하며, 기본 자음 기호에 모음을 나타내는 기호를 덧붙여 음절을 표기하는 문자 체계 - 위키백과 참조)보다 한자의 영향일 가능성이 더 높아요. 그렇다고 독창성이 깎이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한글을 음소문자의 원리를 가장 강하게 구현한, 알파벳의 완성형에 가까운 문자라고 봅니다. 동시에 여러 문자 체계의 특징을 두루 아우른 '복합 문자'이기도 하고요. 세종은 기존 문자들의 문제점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그 결과 세계 문자사에서 손꼽히게 성공한 문자 체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니 상호작용을 인정하는 것과 그 완성도를 높이 사는 것은 저에게 조금도 모순이 아닙니다."

"한글의 생명력 한 번도 끊긴 적 없어"

- '한글이 지배층과 외세의 압력을 이겨내고 한자를 대체했다'라고 서술하셨습니다. 세계 문자사에서 토착 문자가 기존 패권 문자를 실제로 대체한 사례는 흔치 않은데, 한글의 그 성공은 얼마나 예외적인 일이었습니까.

"제국주의 시대에 세계 문자 지도에서 가장 큰 변화 두 가지를 꼽으라면, 하나는 라틴 문자가 전 세계로 퍼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에서 한글이 한자를 대체하면서 전통적인 한자 문화권에서 상당 부분 벗어난 것입니다. 게다가 한글은 오늘날 널리 쓰이는 주요 문자 가운데 가장 늦게, 약 600년 전에 등장한 문자예요. 그 뒤로는 사실상 새로운 주요 문자가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손에 꼽히게 예외적인 사건이죠.

한글이 조선 말기까지 거의 쓰이지 않았다는 건 흔한 오해입니다. 처음엔 불경을 풀이하는 '언해'의 도구로 쓰였고, 왕실과 양반가 여성의 문자로 자리 잡았어요.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일본 헤이안 시대 히라가나와 비슷한 맥락이었죠.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한글만으로 공문서(언문교서)를 쓰기도 했고, 17세기 이후에는 한글 소설과 시가가 쏟아지면서 사용 범위가 크게 넓어졌습니다. 생명력이 한 번도 끊긴 적이 없어요."

- '문어(文語)의 권위에서 벗어나 구어(口語)의 권위가 시작되는 시대의 문턱'에 서 있다고 진단하셨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상형 기호와 오늘날의 이모지가 대칭을 이룬다고도 보셨는데, 이 전환의 핵심을 풀어 주신다면요.

"저는 이모지를 문자로 보지 않습니다. 고대 문자도 처음엔 그림에서 출발했지만, 그림만으로는 언어를 다 담을 수가 없어서 소리값을 붙이는 쪽으로 나아갔어요. 이모지는 오히려 그 이전 단계, 문자가 되기 전의 시각 표현으로 되돌아간 셈입니다. 그래서 이모지는 문자를 대체하지 못하고, 감정이나 분위기를 보완하는 장치에 머물 가능성이 큽니다.

발상지인 일본에서도 젊은 세대는 이미 이모지보다 스티커나 짧은 영상을 더 좋아해요. 유행이 정점을 지난 거죠. 다만 말과 표정, 억양으로 표현하던 걸 문자로도 전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오랜 욕망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는 어쩌면 '구어의 권위'가 시작되는 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지도 몰라요. 그게 앞으로 문자를 어떻게 바꿀지는, 솔직히 아직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언어의 경계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쓰기'와 '읽기'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인공지능이 끝내 채울 수 없다고 보시는 문자의 본질은 무엇이며, 한글을 날마다 쓰는 한국 독자에게 이 책으로 가장 던지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지요.

"솔직히 고백하면, 이 책을 쓰면서 인공지능에 대한 호감이 오히려 커졌습니다. 문자와 인공지능을 '정보를 제시하고 소통하는 도구'로 정의하면 둘은 통하는 데가 있어요. 앞으로 사람이 손으로 직접 문자를 쓰는 일은 줄거나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자 자체가 사라지진 않아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인간 아닌 '무엇'이 등장했고, 그 '무엇'이 문자를 계속 활용할 테니까요. 오히려 문자는 갈수록 더 중요해질 겁니다. 문자의 미래는 두 방향일 것 같아요. 하나는 라틴 문자가 정치·민족주의의 흐름을 타고 더 퍼지는 것, 다른 하나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겁니다."

인공지능이 스스로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함께 놀란 강형원 기자와 필자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확언은 아니고 하나의 상상입니다. 인공지능이 새 문자를 설계한다면, 한글만큼 좋은 참고 모델도 드물 거예요. 한글을 날마다 쓰는 분들께 저는 이렇게 여쭙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쓰는 이 문자가 세계 문자사 전체에서 얼마나 특별한 자리에 있는지, 한 번쯤 그 눈으로 바라봐 주시겠느냐고요."
▲ 취중진담 중인 로버트 파우저 작가(맨 오른쪽부터), 강형원 기자, 필자 
ⓒ 김슬옹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