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사자’ 유럽의 재무장…한국산 무기 콕 집어 찾는 이유 [유럽으로 가는 K방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잠자고 있던 유럽을 깨웠고,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동맹도 위협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각성하기 시작한 유럽을 무장시키고 있다. 유럽이 냉전 종식 이후 수십 년 만에 본격적인 재무장에 나선 건 ‘K방산’에는 단발성 특수가 아니라 구조적 시장이 열렸다는 의미다.
방산을 의제로 진행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정상회의(7~8일, 튀르키예 앙카라)에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을 결정한 것도 이런 배경이다. 특히 K방산의 유럽 진출에 가늠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캐나다 차기 잠수함 도입 사업(CPSP)의 최종 사업자 선정을 앞둔 상황에서 이번 정상회의와 연계된 이 대통령의 방산 관련 퍼포먼스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이다.
위성락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3일 “세계 최대 규모의 나토 방산시장 진출과 견고한 방산 공급망 구축을 위한 본격적인 발판을 마련하겠다”며 “K방산의 우수성과 신속한 조달 능력을 나토 동맹국과 파트너국에 직접 알리고, 방산 수출 4대 강국 도약을 향한 구체적인 협력 경로를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나토 정상회의가 외교 무대를 넘어 방산 시장의 각축장이 된 셈이다. 문제는 전쟁으로 마련된 기회의 창이 영원히 열려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한국 앞에는 ‘무기 공급업자’를 넘어 나토의 확고한 ‘안보 파트너’로 스스로의 위상을 격상시켜야 하는 과제도 함께 놓였다.
절반이 “미국, 동맹 아닌 파트너”…유럽이 달라졌다
나토가 제시한 이번 정상회의 3대 의제는 ▶국방 투자 ▶방산 ▶우크라이나 지원이다. 나토는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5%까지 증액한다는 약속에 따라 지난해 나토 회원국은 핵심적인 국방 투자 분야에 1390억 달러(약 212조 5387억원) 상당을 증액했다.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국방 투자 증액에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적절한 능력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 싱크탱크 애틀란틱 카운슬 연설에서 “우리는 앙카라 정상회의에서 수백억 달러의 신규 방산 계약을 발표할 것”이라고 예고하며 “이는 단순히 안보를 강화하는 회의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경제를 더 번영하게 할 방산 혁명의 초기 단계에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나토의 수장이 ‘혁명’으로 부를 만큼 유럽의 재무장은 빠른 속도로, 대규모로 이뤄지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지난 1일 이를 “냉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재래식 재무장화”로 규정했다. 위성락 실장 역시 이런 추세를 “전례 없는 역사적 흐름”으로 평가했다.

여기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확인된 러시아의 위협과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커진 미국 안보 공약에 대한 불확실성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유럽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유럽외교관계위원회(ECFR)가 지난달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유럽 15개국 성인 1만 9481명에게 물은 결과 응답자의 절반은 미국을 유럽연합(EU)의 ‘동맹’이 아니라 ‘필요한 파트너’로 인식한다고 응답했다. ‘동맹’으로 보는 응답자는 11%에 불과했고, ‘경쟁자’ 또는 ‘적대국’으로 본 응답자는 25%나 됐다. 유럽인들의 인식이 대미 의존에서 벗어나 자강을 향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아직 덜 깬 ‘잠자는 사자’…이란발 ‘병목 현상’도

이에 따라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군비 증액에 나서고 있지만, 냉전이 끝난 뒤 ‘잠자는 사자’로 오래 지낸 탓에 생산 능력에서 허점을 노출하고 있다. 또 그간 나토 동맹국은 대부분 미국산 무기에 의존했지만, 이란전으로 인해 미국의 자원이 중동으로 쏠리면서 유럽에는 공급이 늦어지는 여파도 맞고 있다.
K방산은 단연 매력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의 공식 행사인 방산포럼에도 직접 참석할 예정이다. 이례적으로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이번 순방을 수행하는 것도 K방산의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정부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ECFR은 지난달 4일 보고서에서 “가능할 때는 미국과 함께하되, 필요하다면 미국의 역할을 줄이거나 미국 없이 유럽 대륙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ECFR은 지난달 주요7개국(G7) 정상회의를 앞두고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함께 협력 포럼을 열고 경제안보와 방산 등 분야에서 한국과 G7의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학계는 물론 방산 업계에서도 참석했는데, 사실상 G7 정상회의의 사전행사를 특정 국가와 연 것 자체가 이례적으로 평가됐다.

뤼터 사무총장도 지난 1일 FT 인터뷰에서 “유럽의 생산 병목현상이 일부 유럽 국가들이 나토 밖에서 무기를 구매하는 이유”라면서 한국을 콕 짚어 거론했다. “대표적으로 한국에서 구매하고 있다. 한국은 훌륭한 방산 기반을 갖추고 있다”면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유럽 국가들이 한국산을 선택하는 것은 나토 회원국 제품보다 한국산을 더 선호해서가 아니다. 원래는 나토 회원국들로부터 구매하고 싶어 하지만, 현재는 그만한 생산 능력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K방산의 우월성을 부각하는 동시에 도전 요소도 드러내는 발언이었다.
‘K-빠른 납기’로는 한계…‘단기적 대체재’ 아닌 ‘안보 파트너’ 확립 관건
실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에 당한 유럽 역시 ‘Buy European’으로 반격에 나섰다. 유럽 돈으로, 유럽 공장에서, 유럽 일자리를 만드는 방향의 방산을 지향하는 게 핵심이다. 한국은 두 개의 전쟁이 열어준 단기적 특수를 누리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또 유럽 국가들이 천문학적 금액을 투입, 생산라인 보강에 나선 가운데 한국의 최강점인 ‘빠른 납기’ 달성 경쟁력도 결국 저하될 가능성이 크다. 루터 사무총장도 FT 인터뷰에서 “가격을 올리지 말고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고 방향성을 제시했다.
현지 생산 조건도 더 까다로워질 가능성이 큰데, 유럽산 부품 사용량을 일정 비율 이상으로 늘리려면 현지에 공장을 세우거나 협력 업체를 확보하는 게 관건이 될 수 있다. 기술 이전 등을 위한 교육센터나 합작 연구개발(R&D) 개발센터 설립 등 장기적 관점에서의 투자도 필요하다.
안보 분야의 최일선에서 이런 협력이 이뤄지려면 국가 간 신뢰 구축이 우선이다. K방산이 단기적 대체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면 유럽이 한국을 ‘공급업자’가 아닌 ‘안보 파트너’로 인식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잘 나가는 K방산’을 위협적 경쟁자로 인식하는 국가들이 존재하는 것도 현실이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는 “K방산이 한때 쓰임 뒤 도태되지 않으려면 ‘한국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어도 되는 유럽의 안보 파트너’라는 생각을 확실히 심어줘야 한다. 산업적 파트너십 측면에서도 완제품 수출뿐 아니라 핵심 부품 등에서 서로 연계성을 높이는 공동 프로젝트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앞서 이 대통령이 EU와의 정상회의 뒤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과 “북한의 지원을 규탄한다”는 강도 높은 표현이 담긴 것도 안보 분야에서 유럽과 접점을 넓혀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은 “무기 수출은 한국이 지향하는 ‘평화국가’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도록 어디까지나 살상이 아닌 방어적 차원이고, 억지력에 기여하는 것이란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한다”며 “단순한 무기 판매에 그칠 게 아니라 유럽과의 방위산업 협력을 제도화하고 장기적 안보 협력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럽의 재무장을 통한 ‘자강 생태계’의 일원으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민·관 협력도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유럽 현지의 정책 변화에 보다 기민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정부는 지난 3일 ‘영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서 “충분한 잠재력을 가진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앵커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공공수요 창출, R&D, 정책금융 등을 전방위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윤지원·심석용 기자 yoon.jiw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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