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철, 바다만 보기엔 너무 아까운 서산

최미향 2026. 7. 5.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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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 바닷길에서 자원회수시설 전망대까지, 서산 뜻밖의 여름 코스

[최미향 기자]

7월이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됐다. 이맘때면 사람들은 바다를 먼저 떠올린다. 발목까지 밀려오는 파도, 젖은 모래, 해 질 무렵 붉어지는 수평선. 여름휴가라는 말 속에는 늘 물기가 묻어 있다.

충남 서산도 바다를 품은 도시다. 천수만이 있고, 가로림만이 있고, 벌천포가 있으며, 간월도와 웅도가 있다. 그런데 서산에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이곳은 바다만 보고 돌아가기에는 조금 아까운 도시라는 걸. 성곽과 절, 폐사지와 초원, 바위산과 오래된 밥상까지 서로 다른 얼굴들이 제법 깊게 숨어 있다.

서산 여행은 빨리 훑는 여행보다 천천히 열어보는 여행에 가깝다. 물이 빠져야 길이 생기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야 이야기가 들리고, 산에 올라야 바다가 제대로 보인다. 7월 서산 여행은 바닷가에서 시작해도 좋다. 다만 거기서 끝내기엔 아깝다. 조금만 방향을 틀면, 바다 너머에 숨어 있던 서산의 다른 얼굴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바다가 문을 여닫는 곳, 간월암
▲ 간월암 물이 차오르면 섬이 되고, 물이 빠지면 길이 열리는 간월암. 서산 바다의 시간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 이지환
서산의 여름을 어디서 시작하면 좋을까. 나는 간월암을 먼저 떠올린다. 간월암은 크지 않다. 웅장한 절집도 아니고,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사찰도 아니다. 작은 암자가 바다 곁에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작은 암자가 사람을 붙잡는다. 바다가 길을 열고 닫기 때문이다.

물이 빠지면 간월암으로 들어가는 길이 드러난다. 조금 전까지 바다였던 곳을 사람이 걷는다. 갯벌에는 물이 빠진 자국이 잔물결처럼 남고, 그 사이로 조개들이 숨 쉬던 작은 구멍들이 촘촘히 드러난다. 바람은 짠내를 묻힌 채 암자 처마 밑을 지나간다. 작은 연등은 쉴 새 없이 흔들린다. 물이 차오르면 길은 사라지고, 암자는 섬처럼 보인다. 같은 자리인데도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 된다.

성벽 안에 남은 두 젊은 날, 이순신과 정약용
▲ 해미읍성 넓은 잔디와 오래된 나무가 어우러진 해미읍성. 천주교 박해의 기억뿐 아니라 젊은 이순신과 다산 정약용의 시간도 함께 품은 성이다.
ⓒ 이지환
바다를 떠나 해미로 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해미읍성은 서산 여행에서 빼놓기 어려운 곳이다.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바깥의 시간이 잠시 멀어진다. 넓은 잔디밭, 오래된 나무, 돌담을 따라 걷는 사람들. 하지만 해미읍성은 그저 예쁜 성곽도, 천주교 박해의 아픈 기억만 남은 장소도 아니다. 조선시대 충청지역 군사권을 담당하던 병영의 공간이었고, 수많은 젊은 날들이 지나간 자리였다.

이 성에는 젊은 이순신의 시간도 남아 있다. 훗날 나라를 구한 장군이 되기 전, 그는 군관으로 이곳 해미에서 근무했다. 바다와 가까운 이 성에서 젊은 무관 이순신은 무엇을 보았을까. 성벽 위로 부는 바람과 서해 쪽으로 트인 길, 병영의 긴장과 책임을 그는 몸으로 익히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충무공의 큰 이름 앞에도, 이렇게 말없이 견디고 배우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뒤, 또 다른 젊은이가 해미에 머문다. 다산 정약용이다. 많은 사람이 다산의 유배를 떠올리면 전남 강진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스물아홉의 다산도 해미에 머문 적이 있다. 기간은 길지 않았다. 열흘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가벼운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조의 눈에 든 젊은 인재였던 그는, 동시에 서학을 둘러싼 의심과 정쟁의 공기 속에 놓여 있었다.

해미읍성을 걷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돌담은 누군가에게는 병영의 울타리였고, 누군가에게는 잠시 머문 유배의 그늘이었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신앙을 지키다 생을 마친 마지막 자리였다. 해미읍성은 죽음만 기억하는 성이 아니다. 견딤과 배움, 신념과 시대의 파도가 함께 쌓인 성이다.

꽃이 진 뒤 더 깊어지는 절, 개심사
▲ 가을 국화로 물든 개심사 지난가을 국화축제 때의 개심사. 봄에는 벚꽃, 여름에는 깊은 그늘, 가을에는 국화가 절집의 오래된 처마와 어우러져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 이지환
7월의 개심사는 벚꽃으로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 봄의 개심사는 겹벚꽃과 청벚꽃으로 유명하지만, 여름의 개심사는 꽃보다 그늘이 먼저다. 신창저수지를 지나고, 목초지로 이어지는 구릉을 곁눈질하다 보면 산사의 초록이 가까워진다.

절에 닿으면 마음이 활짝 열린다기보다 조용히 낮아진다. 낮은 처마, 오래된 기둥, 과하게 다듬지 않은 나무의 결이 사람을 편하게 만든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 서산시는 이 불상의 국보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의 개심사는 단지 쉬어 가는 산사가 아니다. 고려의 부처가 조용히 다음 이름을 기다리는 곳이다.

꽃이 진 뒤의 절은 유독 또렷이 남는 법이다. 아니, 어쩌면 꽃이 진 뒤에야 절이 제대로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낮에는 국보, 밤에는 반딧불이… 보원사지
▲ 보원사지 오층석탑 사라진 절터에 남은 보원사지 오층석탑이 밤빛 속에 서 있다. 여름밤이면 탑 주변 풀숲 사이로 반딧불이가 떠올라, 빈 절터에 또 다른 생명의 빛을 더한다.
ⓒ 이지환
개심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보원사지가 있다. 절은 사라지고 터가 남은 곳이다. 처음 가면 조금 허전할 수도 있다. 법당도 없고, 처마도 없고, 스님들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빈자리가 바로 보원사지의 힘이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지난해 국보로 승격됐다. 사라진 절터에서 새롭게 이름을 얻은 탑. 그 앞에 서면 빈터도 때로는 가장 큰 유산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해가 지면 보원사지는 또 다른 빛을 품는다. 여름밤 풀숲 사이로 작은 빛들이 떠오르는 풍경을 생각해 보라. 사람의 등불이 꺼진 절터에 자연의 불빛이 돌아오는 장면이다. 예불 소리는 사라졌지만 반딧불이가 깜박이고, 법당은 사라졌지만 돌탑은 남아 있는 곳. 그래서 보원사지는 폐허라기보다 회복의 장소처럼 느껴진다.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황금산과 연말이면 우는 팔봉산
▲ 황금산 코끼리바위 황금산 해안에 자리한 코끼리바위. 바다에 코를 대고 물을 마시는 듯한 모습이 서산 바다의 절경과 어우러진다.
ⓒ 이지환
서산에서 바다를 보기 위해 산에 오른다면 첫 번째는 황금산이다. 산이라고 해도 겁먹을 필요는 없다. 높이로 사람을 압도하는 산은 아니다. 대신 길 끝에서 바다가 갑자기 열린다. 숲길을 지나고, 바위 사이를 내려서면 몽돌해변과 해안 절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에 코끼리바위가 있다.
코끼리바위는 이름 그대로 코끼리가 바다에 코를 대고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이다. 파도가 밀려오면 정말로 거대한 코끼리 한 마리가 서해의 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보인다. 산에 올랐는데, 끝에서 바다와 코끼리를 만나는 셈이다. 황금산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상보다 산 아래 바다가 더 강하게 남는다.
 팔봉산 삼봉에 오르면 둥글고 거친 바위들이 능선을 이루고, 그 너머로 서산의 들과 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 팔봉산에는 원래 아홉 봉우리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 이지환
팔봉산은 조금 다르게 봐야 한다. 팔봉산의 매력은 멀리 바다를 보는 데 있지 않고, 봉우리마다 얹힌 사연에 있다. 원래는 아홉 봉우리였는데, 가장 작은 봉우리를 빼고 팔봉산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해마다 연말이면 이름에 끼지 못한 작은 봉우리가 서러워 운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겨울바람이라 하고 파도 소리라 하지만, 전설은 다르게 말한다. 그것은 빠진 봉우리의 울음이라고.

이 이야기를 알고 팔봉산을 바라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여덟 봉우리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름에서 빠진 하나까지 생각하게 된다. 서산에는 이런 이야기가 많다. 사라진 유두교, 사라진 절, 이름에서 빠진 봉우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길은 사연으로 남고, 절은 탑과 반딧불이로 남고, 봉우리는 울음으로 남는다.

한우목장길을 지나 굴밥 한 그릇으로
 푸른 목초지 위에서 한우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데크길을 걷다 운이 좋으면 서산 안쪽에서 만나는 뜻밖의 초원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 이지환
서산을 바다 도시로만 생각한 사람에게 의외의 장소도 있다. 서산한우목장길이다. 처음 가보면 조금 낯설다. 서산에서 초원을 만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데크길을 따라 걸으면 넓은 목초지가 펼쳐지고, 바람이 풀 위를 지나간다. 운이 좋으면 푸른 목초지 위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떼도 만날 수 있다. 바다 냄새가 날 것 같은 도시 안쪽에 이런 초록의 풍경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 서산 영양굴밥 굴과 버섯, 은행이 들어간 영양굴밥에 어리굴젓을 얹었다. 달래장에 비빈 뒤 김에 싸 먹으면 서산 바다의 맛이 한입에 들어온다.
ⓒ 이지환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면, 여행의 마지막은 자연스럽게 밥상으로 향한다. 서산에서는 영양굴밥이 좋다. 굴밥이라고 해서 굴만 있는 밥이 아니다. 굴은 기본이고, 버섯과 대추, 은행 같은 고명이 야무지게 올라간다. 뚝배기 뚜껑을 열면 김이 먼저 오르고, 그다음 바다 냄새가 따라 올라온다.

먹는 법도 어렵지 않다. 달래장을 넣고 쓱쓱 비빈다. 여기에 어리굴젓을 조금 얹고 김에 싸서 먹는다. 굴의 고소함, 젓갈의 짭조름함, 달래장의 알싸함이 입안에서 만난다. 화려한 음식은 아닌데 한 숟가락 뜨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두둑하게 배를 채웠다면, 그냥 집으로 돌아서기엔 아직 조금 이르다.

쓰레기의 끝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다
▲ 서산시자원회수시설 생활쓰레기를 에너지로 바꾸는 서산시자원회수시설. 94m 높이의 굴뚝 전망대가 함께 조성돼 있어 자원순환을 배우고 서산 들녘을 내려다볼 수 있는 체험관광형 공간이다.
ⓒ 최미향
마지막으로 들를 곳은 양대동 서산시자원회수시설이다. 휴가철 여행 글에 자원회수시설이라니 낯설지만, 이곳은 단순한 소각장이 아니다. 생활쓰레기가 1000도 안팎의 불길을 지나 에너지로 바뀌는 현장이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이곳에서 생산한 전력은 8983MWh, 판매액은 약 10억 원을 넘겼다고 한다. 쓰레기가 사라진 자리에 전기가 남고, 그 전기는 다시 도시의 살림으로 돌아간다.

가족 여행객에게도 뜻밖의 코스가 될 만하다. 자원순환 아카데미에서는 분리배출과 재활용,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같은 생활 속 실천을 배울 수 있고, 전망대와 어드벤처 슬라이드, 어린이 암벽 시설, 야외 놀이터도 마련돼 있다. 94m 전망대에 오르면 양대동 들판과 서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밥상에서 서산 바다의 맛을 만났다면, 이곳에서는 서산이라는 도시가 돌아가는 방식을 본다. 여행의 마지막에 전망대에 올라 천천히 들판을 내려다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우리가 먹고, 쓰고, 버린 것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시 도시의 에너지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7월 휴가철, 서산에 온다면 바다만 보고 돌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이 도시의 바다는 길이 되고, 성곽의 그림자가 되고, 절터의 반딧불이가 되고, 굴밥 한 그릇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가 남긴 것들까지 다시 빛으로 바꾸며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한다.

서산의 여름은 물가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물이 빠진 자리에 길이 남고,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이야기가 남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도청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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