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기지를 넘어 '결재권'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

양준호 2026. 7. 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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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의 본사 기능의 생산지역 이전 효과와 광주·전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과제

[양준호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서 정부와 기업의 MOU체결식이 끝난 뒤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정통부 장관, 이진안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 대표,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 이재명 대통령,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김정관 산업부 장관.
ⓒ 연합뉴스
국가 첨단산업 육성이라는 명분 아래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전이 뜨겁다.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역시 'AI 반도체 첨단 패키징'과 'RE100 재생에너지'를 연계한 초광역 반도체 특화단지 조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러나 수십조 원의 투자라는 장밋빛 청사진 앞에서 우리는 냉정하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수도권 일극 체제'라는 강고한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는 중앙정부와 대기업에 정확히 무엇을 요구해야 하며 또 무엇을 탈환해야 하는가?

반도체 산업은 설계(팹리스), 생산(파운드리), 후공정(패키징)으로 나뉜다. 만약 호남이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설계와 기획 기능은 수도권에 내어준 채, '상대적으로 노동 집약적인' 패키징 라인과 거대한 '공장(Fab)' 껍데기만 유치하는 데 만족한다면, 호남은 또다시 용인이나 평택을 보조하는 수도권의 '생산 식민지'이자 하청 기지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그간 충남, 울산, 경남, 경북, 전남 등 비수도권 산업도시들이 겪어온 뼈아픈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거대 장치 산업이 지역에 들어서면 지표상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일시적으로 급증한다. 하지만 공장에서 창출된 막대한 영업잉여(법인이윤)와 고급 인력의 임금은 결국 본사가 있는 수도권의 금융망을 타고 모조리 빨려 올라간다.

결국 생산은 지역에서 하되 부는 중앙에 축적되어 '결정'은 하지 못해, 지역총소득(GRNI)은 정체되거나 점차 감소하는 만성적인 '구조적 역류(역외유출)'가 발생한다. 이는 이른바 '구멍난 양동이'에 물을 붓는 격이다. 진정한 균형 발전은 공장의 굴뚝이 아니라 '결재권', 즉 '권한과 관력'의 지역화에서 나온다. 해외 주요 국가의 혁신거점 도시들은 다음의 세 가지 유형을 통해 '경제적 자기 결정권(economic self-determination)'을 내재화하고 부의 역외유출을 완벽히 방어해 냈다.

[유형 1] 민간 본사 및 R&D 내재화 모델 : 지방정부의 기업 선별 유치 정책

이는 단순 생산을 철저히 배제하고 기업의 핵심 두뇌를 묶어둔 유형이다. 여기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정부의 독자적이고 파격적인 '선별 유치 정책'이 있었다. 주정부는 거대 공장 설립을 법으로 제한하고, 오직 글로벌 기업의 '본사 R&D 센터' 이전에만 파격적인 세제 혜택과 인프라를 제공했다. 그 정책적 인과관계로 1950년대 미국 최빈곤 지역(47위)이던 RTP는 현재 1인당 개인소득 8만 달러를 돌파하며 현재 미국 내 최고 수준의 소득 지역으로 도약했다. 일본 도야마현은 최고경영진의 자발적 정책 결단이 원인이 되었다. YKK 그룹이 의사결정의 지연을 막기 위해 도쿄의 경영·인사·기획 권한을 도야마현 지역로 통째로 이전시키자, 기업의 이윤이 도쿄로 유출되지 않고 지역 안에서 유보되고 환류되며 재투자되어 도야마의 1인당 현민소득이 전국 3~5위권으로 뛰어올랐다.

호남의 지스트(GIST), 전남대, 한국에너지공대라는 훌륭한 삼각 연구 벨트를 보유하고 있다. 광주·전남은 RTP의 사례처럼 대기업의 반도체 R&D 본부를 지역, 즉 대학 거점에 묶어두는 강력한 선별적 지원 정책을 펴야 한다.

[유형 2] 공공예산 집행권 이전 모델 : 중앙정부의 강력한 강제 할당 정책

결재권, 즉 결정권력이 지역으로 위임될 때 지식서비스 생태계가 어떻게 구축되는지 보여주는 이 유형의 핵심 원인은 중앙정부의 강력한 물리적 강제 정책이다. 영국 중앙정부는 '국토균형발전(Levelling Up)' 정책의 일환으로 공영방송 BBC의 핵심 '예산 통제권'을 북부 샐퍼드 지역으로 강제 이전시켰다. 즉 이때 BBC 총괄 본사는 런던에 남겨두되, 스포츠, 어린이, R&D 부문 등 특정 부서들의 '수천억 원대 프로그램 기획 및 외주 발주권(예산 통제권)'만을 샐퍼드에 완전히 떼어주었다. 결재권이 이 지역으로 내재화되자 연간 수천억 원의 제작 예산을 수주하기 위해 런던의 수백 개 민간 벤처와 법무·회계 펌들이, 즉 외부의 고부가가치 산업들이 스스로 짐을 싸서 샐퍼드로 몰려들며, 샐퍼드의 부가가치는 단숨에 40% 폭등했고 소득은 전국 평균의 90% 이상으로까지 늘어났다.

프랑스 역시 중앙정부(국토보전기획단, DATAR)가 파리에 몰려 있던 국립 R&D 기관(CNRS, INRIA 등)들을 남부 지역 도시 알프마리팀으로 강제 이전시키면서, 우리나라와 같이 그저 기관의 주소지 혹은 공간만을 이전한 것이 아니라, 이 이전된 기관들에게 '독자적인 연구과제 선정권'과 '글로벌 기업과 직접적으로 산학협력에 관해 계약할 수 있는 권한 및 국가 예산 배분권'이라는 핵심적인 결정 권력을 쥐어주었다. 현지 연구소장이 중앙의 결재 없이 스스로 예산을 굴리고 계약할 권한을 갖게 되면서 이전 지역 현지에서 즉각 대기업과 공동 연구를 기획하고 국가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자, IBM, 텍사스인스트루먼트 같은 대형 글로벌 기업들이 이 권한의 중력에 이끌려 알프마리팀(소피아 앙티폴리스)으로 자발적으로 모여들었고, 그 결과 이 지역의 소득이 프랑스 전국 최상위권으로 치솟았다.

광주에 조성된 국가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패키징 단지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 서버 장비만 호남에 두고 그 통제권, 즉 결정 권력은 서울이 쥐는 구조가 아니라, 대기업 총괄 본사가 호남에 오지 않더라도 어떤 AI 프로젝트를 육성하고 어떤 팹리스 기업에 예산을 배분할지 결정하는 '독자적 과제 선정 및 팹리스 예산 배분권'을 지닌 현지 독립법인이 광주와 전남에 위임되어야 한다. 이 예산 집행권이 선행될 때 비로소, 판교와 강남의 고급 AI 인재들과 벤처 자본이 호남으로 자발적으로 남하할 것이다.

[유형 3] 지식재산권(IP) 유보 및 자생적 복원 모델 : 연방정부의 조건부 연계 정책

위기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자생력을 만든 원인은 보조금과 R&D 기능을 연계시킨 중앙(연방)정부의 조건부 정책이었다. 독일 연방 정부는 드레스덴(실리콘 작센)에 막대한 통일 보조금을 지원할 때, 단순히 공장만 짓게 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프라운호퍼 등 공공 R&D 센터를 함께 설립하여 특허 수익을 공유하도록 강제했다. 이 조건부 정책 덕분에 창출된 IP 수익이 지역에 재투자되며 동독 지역임에도 소득 지표가 서독 평균의 90% 선까지 올랐다.

핀란드의 울루 지역 역시 정부의 통신망 발주 정책과 노키아의 R&D 분산 정책이 맞물린 결과다. 통신 R&D 권한이 울루 지역에 내재화되어 있던 덕분에, 2010년대 노키아 모바일 사업부가 붕괴하는 치명적인 쇼크 속에서도 거리에 나앉은 R&D 인력들이 즉각 600여 개의 벤처를 창업하며 단기간에 지역 소득을 전국 평균 100% 수준으로 끈질기게 방어해 냈다.

광주·전남 반도체 클러스터가 나아갈 길과 '자본 통제 댐'

세 가지 정책 모델로 범주화된 해외 각국의 실증 사례는 우리에게 단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대기업의 단순 생산라인만 내려오는 것은 결코 균형발전이 아니다. 중앙정부와 광주·전남 지자체는 보조금 살포를 넘어, 호남이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고(IP 유보), 국책 예산을 집행하며(결재권의 강제 이전), 생산라인에서 창출되는 영업잉여를 광주·전남 지역에 묶어두는(본사/R&D 선별 유치) 종합적인 '독립적 자본 통제 모델'을 정책적으로 제도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중앙정부의 정책 기조 역시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연방/중앙정부가 그랬듯, 국가 R&D 예산의 지방 할당과 대기업의 '호남권 독립 반도체 R&D 법인 설립'을 보조금 지급의 강력한 전제 조건으로 강제하는 정책적 결단이 연계되어야 한다.

나아가 전남의 RE100 재생에너지와 반도체 클러스터에서 창출된 막대한 개발이익, 금융거래, 그리고 부가가치가 서울의 시중은행으로 고스란히 유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호남 지역에서 자금을 유치하고 관리해 그 지역의 팹리스 스타트업과 사회적 인프라에 독자적으로 대출하고 재투자할 수 있는 '광주전남 지역공공은행' 혹은 '광주전남 지역발전기금'의 설립과 운영이 반드시 필요하며, 또 이는 매우 시급한 과제다. 또한 단지 주변의 토지 개발이익이 투기 세력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지역 공동체 토지신탁(Community Land Trust, CLT)'과 같은 강력한 지역 제도적 댐이 클러스터 '설계도'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앞선 국가들의 극적인 지역경제 부활은 거시경제 지표의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고 권한을 이전시킨 명확한 '정책의 산물'이다. 스스로 벌어들인 부를 스스로 기획하고 처분할 수 있는 힘, 바로 이 '경제적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정책적 개입과 지역 시민사회의 관여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쏟아질 그 어떠한 거창한 균형발전 정책도 결국 거대한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생산기지의 지역 이전과 함께 '경제적 자기 결정권'도 지역으로 이전되어야 하는 것. 이에 대해 지금도 많은 논자들이 그 결정 권력이 지역으로 위임된다고 해서 과연 어떤 지역경제적 성과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며 패배주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물론의 우리나라 사례가 아닌 외국 사례다. 그러나 이 사례들을 통해 적어도 '경제적 자기 결정권'의 지역화가 무엇을 만들어 내며 또 어떤 의의를 갖는지만큼은 이 글을 통해 충분히 발신되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와 같이, 지역에 대해 강한 규정성을 갖는 '경제적 자기 결정권', 이는 지역경제, 지역산업 구조, 지역금융에 나버린 '구멍'을 납땝질하여 지역의 수도권에 대한 그리고 지역의 독점자본에 대한 '대항력(Countervailing Power)'의 토대로 작용한다는 점,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제대로 된' 지역 균형발전과 지역에 들어온 독점자본의 생태적 전환마저 강제할 수 있게 하는 지역의 강력한 '역능(Potentia)'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인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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