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감상법' 배운 아이들이 무대 향해 외친 세 글자

이규승 2026. 7. 3.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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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취재] 길원초 6학년 198명이 만난 발레… 교실 밖에서 열린 서울시 '공연봄날'

[이규승 기자]

"재밌을 것 같기도 한데… 조금 떨려요."

서울 길원초등학교 6학년 한정우 학생은 말을 잠시 멈추고 웃었다. 발레 공연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영상을 보여준 적은 있지만, 공연장에서 무용수를 직접 보는 것은 이날이 처음이란다. 이때 곁에 있던 친구가 한마디를 보탰다.

"무용수들이 직접 나와서 춤을 추는 거죠? 영상으로 보는거 아니죠? 태어나서 처음 보는 발레라 조금 떨려요."

공연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무대 위 무용수를 만나지도 못했다. 그런데 표정에는 벌써 기대와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어떤 춤이 펼쳐질지, 발레리나는 정말 발끝으로 오래 서 있을지, 영상에서 보았던 무용수의 점프를 눈앞에서도 볼 수 있을지 궁금한 듯했다.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은평 로비에서 학생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다.
ⓒ 이규승
3일 오전 10시, 서울 은평구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은평 앞에 대형버스가 차례로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빨강과 노랑, 초록, 하늘색,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학생들이 반별로 내려섰다. 길원초등학교 6학년 9개 학급, 모두 198명이다.

평소라면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을 오전 시간이다. 이날 아이들은 칠판 대신 무대를, 교과서 대신 한 편의 발레를 만나러 왔다. 서울시 청소년 공연 관람 지원사업 '공연봄날'을 통해 와이즈발레단의 해설이 있는 발레 <발레로, 세계로>를 보기 위해서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시작된 낯선 하루

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은 인솔 교사의 안내에 따라 줄을 맞췄다. 반마다 다른 색깔의 티셔츠가 초여름 나무 사이로 길게 이어졌다. 몇몇 아이들은 공연장 건물을 올려다봤고, 친구와 얼굴을 가까이한 채 연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통유리창이 길게 난 로비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한층 들떴다. '이야기꽃을 피우는 공연봄날'이라고 적힌 홍보판 앞에서는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그렸다. 친구 어깨에 팔을 올리고 웃는 아이도 있었고, 넓고 높은 로비를 둘러보느라 걸음이 늦어진 아이도 있었다.
 공연장 객석에 앉아 공연을 관람하기 직전
ⓒ 이규승
학교 복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난과 웃음이었다. 하지만 장소가 달라지자 아이들의 움직임도 조금 특별해 보였다. 공연을 본다는 것은 무대 위 작품만 감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학교를 떠나 버스를 타고, 처음 온 건물에 들어서고, 공연장 문 앞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순간부터 평소와 다른 경험은 시작되고 있었다.

공연장 문이 열리자 학생들이 차례로 객석으로 들어갔다. 검은 벽과 높은 천장, 촘촘히 매달린 조명 장비는 밝은 교실과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무대 뒤편에는 푸른빛과 함께 'Wise Ballet Theater'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198명의 학생이 모두 자리를 잡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먼저 앉은 아이들은 뒤를 돌아 친구를 찾았고, 교사들은 통로를 오가며 좌석과 인원을 확인했다. 빨강과 노랑, 초록과 보라색 티셔츠가 검은 객석 위에 커다란 색면처럼 펼쳐졌다.

"재밌을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은 이때의 객석과 닮아 있었다. 재미있을 것이라는 확신보다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을 앞에 둔 호기심이었다. 친구가 말한 '떨림'도 공연을 잘 알아서 생긴 감정이 아니었다.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찾아온 기대와 긴장이었다.

이번 공연을 신청한 김은아 길원초등학교 학급부장은 공연장을 찾기 전 학생들에게 발레 관람 경험이 있는지 물었다.

"한 반이 22명 정도인데, 실제 발레 공연을 본 아이는 두세 명 정도였어요. 제가 맡은 반에서도 두 명쯤 손을 들었습니다. 발레는 아이들이 접하기 쉽지 않은 분야잖아요."
 길원초등학교 김은아 선생님 인터뷰 중
ⓒ 이규승
198명의 학생 가운데 상당수에게 이날은 생애 첫 발레 공연이었다. 발레라는 장르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음악 교과서에서 사진을 봤을 수도 있고, 텔레비전이나 온라인 영상에서 발레리나가 회전하거나 발레리노가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장면을 본 아이도 있다.

그러나 전문 공연장의 객석에 앉아 무용수의 움직임과 음악, 조명과 관객의 반응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김 부장은 아이들이 낯선 공연에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학교에서 발레리노 전민철의 영상을 함께 봤다.

"아이들이 움직임을 보고 굉장히 놀라워했어요.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동작이잖아요. 오늘 공연에서는 나라마다 의상과 음악이 어떻게 다르고, 그에 따라 발레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자고 했더니 아이들이 훨씬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작품의 줄거리나 낯선 발레 용어를 외우게 한 것은 아니었다. '발레를 알아야 한다'는 부담 대신 '무엇이 다를까'를 직접 찾아보게 했다. 김 부장 역시 발레를 자주 관람하는 관객은 아니라고 했다.

"저도 발레를 많이 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잖아요. 아이들이 평소 쉽게 접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사가 잘 알고 좋아하는 예술만 학생에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함께 낯선 장르 앞에 앉아보는 것. 그것도 이날 공연장이 만든 풍경이었다.

공연장에서 배운 발레 감상법

"감동하면 '브라보'를 외쳐도 됩니다."

객석이 정돈되자 와이즈발레단 김길용 단장이 무대에 올랐다. 그는 이날 공연을 한 편의 '세계여행'으로 소개했다.

"와이즈발레단과 여러분이 같이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려고 합니다. 준비되셨나요?"
 해설을 하는 와이즈발레단 김길용 단장
ⓒ 이규승
객석에서 "네!"라는 대답이 터져 나왔다. 첫 번째 목적지는 물의 도시 베니스가 있는 이탈리아였다. 이어 인도와 그리스, 마지막으로 정열의 나라 스페인을 찾아갈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클래식 발레에는 특정 나라와 문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다며, 음악과 의상, 춤을 따라 네 나라를 여행해보자고 제안했다.

김 단장이 "발레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있느냐"고 묻자 객석 여기저기서 제목이 나왔다.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아이들의 목소리를 타고 객석을 오갔다. 이어 그는 이 작품들과 <돈키호테>, <라 바야데르>, <해적> 등을 만든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를 소개했다. 이름이 낯선 아이들에게는 함께 따라 말하게 했다.

"프티파!"

198명의 목소리가 공연장에 울렸다. 김 단장은 첫 작품 <베니스 카니발>을 축제에서 왕과 여왕으로 뽑힌 남녀가 함께 추는 춤이라고 설명했다. 인도를 배경으로 한 <라 바야데르>는 사원의 무희 니키아와 장군 솔로르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풀어냈다. 낯선 외국어로만 들리던 작품 제목에 장소와 인물, 사랑과 갈등이 더해지자 발레는 조금 가까운 이야기가 됐다. 아이들이 무대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알게 된 뒤 김 단장은 이번에는 '어떻게 볼 것인가'를 알려줬다.
 공연봄날 해설이 있는 발레 프로그램 중
ⓒ 이규승
"조명이 들어오고 음악이 시작돼 무용수가 나오면 박수를 쳐주세요. '좋은 공연 빨리 보여주세요'라는 뜻입니다."

무용수가 춤을 마치고 인사할 때 뿐 아니라 무대 밖으로 퇴장할 때까지 박수를 보내는 것도 발레 공연의 중요한 예절이라고 했다. 공연 중에는 무조건 조용히 해야 한다고 배워온 아이들에게 뜻밖의 설명도 이어졌다.

"무용수가 정말 멋있는 동작을 보여주거나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는 공연 중간에도 박수를 쳐도 괜찮습니다. 박수만으로 부족할 정도로 감동했다면 소리를 내도 됩니다."

김 단장이 "어떻게 외치면 될까요?"라고 묻자 객석이 술렁였다. 잠시 뒤 아이들은 김 단장을 따라 힘껏 외쳤다.

"브라보!"

처음 발레 공연장을 찾은 아이들에게 관람 예절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열하는 규칙만은 아니었다. 휴대전화를 끄고 다른 사람의 관람을 방해하지 않는 기본적인 약속과 함께, 마음이 움직일 때는 적극적으로 박수치고 환호해도 된다는 안내였다. 공연을 본다는 것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무용수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감탄하고, 박수와 환호로 무대에 마음을 돌려주는 일까지 공연의 일부였다. 아이들은 막이 오르기 전부터 관객이 되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해설 뒤 펼쳐지는 무대는 이탈리아와 인도, 그리스와 스페인을 오가는 여행이었다. 나라가 달라질 때마다 음악과 의상이 바뀌고, 무용수의 몸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도 달라졌다. 아이들은 조금 전 들은 설명을 떠올리며 춤 속에서 장소와 인물,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해설은 작품의 정답을 미리 알려주는 수업이 아니었다. 처음 발레를 만난 아이들이 화려한 점프와 회전만 바라보다 길을 잃지 않도록 건네는 작은 지도에 가까웠다. 무용수의 손끝과 시선, 두 사람 사이의 거리에도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도록 돕는 안내였다.

발레를 좋아하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은평의 1층 서울무용창작센터 공연장에 모인 길원초등학교 학생들
ⓒ 이규승
필자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봐도 학교 친구들과 발레 공연장을 찾았던 기억은 없다. 예술은 주로 교과서 안에서 배웠다. 유명 작품과 예술가의 이름을 외우고, 시험에 나올 특징을 정리했다. 가족이 따로 공연을 찾아주거나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전문 공연장에서 발레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교과서는 발레의 역사와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무용수가 공중으로 뛰어오른 뒤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의 긴장, 빠른 회전 뒤 다시 중심을 잡는 몸, 음악과 조명이 공간 전체를 바꾸는 감각까지 전하기는 어렵다.

영상 역시 공연을 보여주지만 카메라가 선택한 화면을 따라가야 한다. 공연장에서는 관객이 자신의 시선을 선택한다. 무대 중앙의 무용수를 바라보다가 뒤에서 다음 움직임을 준비하는 무용수에게 눈을 돌릴 수도 있다. 같은 작품을 보면서도 아이들마다 기억하는 장면이 달라질 수 있다.

'공연봄날'의 의미는 198명의 학생 모두를 발레 애호가로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누군가는 무용수의 점프와 회전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누군가는 음악이나 화려한 의상을 더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어떤 아이에게는 발레가 여전히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고, 친구들과 학교 밖으로 나온 하루가 가장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

어느 감정도 틀리지 않다는 것
 공연봄날 와이즈발레단의 해설이 있는 발레 <발레로, 세계로> 커튼콜
ⓒ 이규승
문화 예술을 경험한다는 것은 모두가 같은 작품 앞에서 같은 감상을 갖는 일이 아니다.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낯선지, 어떤 장면에서 자신의 시선이 멈추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려면 우선 직접 볼 기회가 있어야 한다.

학교에서 198명의 학생을 데리고 공연장을 찾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수업 일정을 조정하고 이동 차량과 인솔 인력을 마련해야 한다. 학교 밖 활동인 만큼 안전 문제도 살펴야 한다. 이날도 노란색 조끼를 입은 운영 인력이 버스 하차 지점부터 로비와 객석까지 학생들의 이동을 도왔다. 교사들은 반별 인원을 확인했고, 운영진은 출입문과 통로에서 이동 방향을 안내했다.

김은아 부장은 학교 현장에서 이런 문화 예술 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참여할 기회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이런 활동을 굉장히 좋아해요. 기회가 없어서 못 오는 거죠. 신청해도 선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연을 보러 올 수 있게 된 것 자체를 선생님들도 좋아합니다."

공연이 끝나면 아이들은 다시 버스에 오른다. 학교로 돌아가 급식을 먹고 5교시부터 정상 수업을 이어간다. 종일 계속되는 거창한 체험 학습이 아니다. 평범한 학교생활 가운데 오전 몇 시간만 교실을 벗어나 공연장을 찾은 것이다.

오전에는 무용수의 발끝과 손끝을 바라보고, 오후에는 다시 책상 앞에서 교과서를 펼친다. 예술이 특별한 날에만 만나는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아이들의 일상 한가운데로 잠시 들어온 셈이다. 공연봄날이 아이들에게 건네는 것은 바로 그 낯선 경험이다. 공연을 좋아하라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만나보지 못한 세계 앞에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이다.

다음에 '발레'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날의 푸른 무대와 검은 객석, 함께 연습했던 "브라보"를 떠올리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공연장을 찾았을 때 처음보다 조금 덜 낯설게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한 번의 공연이 아이들의 삶을 당장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재미있을지 몰라 기대하고, 낯설어서 조금 떨려보고,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박수를 보내는 경험은 남는다. 이날 길원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의 수업은 칠판 앞이 아니라 무대 앞에서 열렸다. 그곳에서는 정답을 적는 대신, 처음 만난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의 감정으로 반응하는 일이 수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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