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에서 온 황금빛 차, 장마철에 딱입니다

노시은 2026. 7. 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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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빚어낸 찻잔과 찻잔 사이의 온기를 떠올리다

[노시은 기자]

 다질링, 슈크림빵, 스누피 티포트와 찻잔, 모네의 그림....그야말로 좋아하는 것들의 종합세트로 마련해본 어느 초여름의 티타임.
ⓒ 노시은
장마의 습기인지 그저 계절의 열기인지 모를 눅눅함이 공기 중에 서서히 배어들기 시작하는 여름의 길목입니다. 매미 소리도 슬슬 시작된 것 같고요. 이맘때면 찻자리를 준비하는 마음에도 작은 주저함이 생깁니다. 더위를 단번에 날려버릴 서늘하고 청량한 자극이 필요한가, 아니면 오히려 이열치열로 몸속 깊은 곳까지 데워줄 화끈함이 필요한가.

청량함을 화끈하게 마시기로 결정한 뒤 제가 조심스레 꺼내든 찻잎은 상큼하고 향기로운 다질링 첫물차(Darjeeling 1st Flush)입니다. 눈 덮인 히말라야의 매서운 겨울을 이겨내고 가장 먼저 틔워낸 봄의 첫 찻잎. 이 여리고 찬란한 잎을 대체 어떤 그릇에 우려야 할까, 문득 다구장 앞에서 즐거운 고민에 빠졌습니다. 투명한 유리 다구에 우려내어 첫물차 특유의 쨍하고 화사한 수색을 직관적으로 감상할까? 아니면 오랜 시간 차를 머금어 온 자사호에 찻잎을 툭 얹어내어, 흙과 세월이 길들인 둥글고 부드러운 맛으로 풋내를 조금 눌러서 마실까.

한참을 서성이던 저의 최종 선택은, 다름 아닌 스누피가 그려진 티포트와 찻잔이었습니다. 언뜻 장난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잔의 경우 코발트빛 안료로 그림까지 들어간 어엿한 진짜 청화백자(靑華白磁)랍니다. 비록 티포트의 그림은 전사 기법으로 구워졌지만, 하얀 바탕 위에 푸른색 선으로 그려진 스누피는 청화 특유의 맑고 단아한 느낌을 제법 훌륭하게 자아내지요. 유리의 날 선 아슬아슬함도 아니고, 자사호의 한없이 무거운 묵직함도 아닌 바로 그 중간 지점. 차 본연의 향을 왜곡 없이 맑게 비추면서도, 뜨거운 온기를 단단하고 듬직하게 품어주는 도자기가 주는 다정함에 마음이 이끌렸거든요.

다구를 세팅하고 찻물을 끓이면서 냉장고를 열어 야심 차게 준비한 티푸드를 꺼냈습니다. 샴페인처럼 찰랑이는 다질링에 어울릴 달콤한 짝꿍으로 낙점된 것은 바로 슈크림빵입니다. 동네 빵집에서 늘 단팥빵과 소보로빵 옆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그 빵 맞아요. 적당한 두께의 부드러운 빵 껍질 속에 노랗고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이 묵직하게 들어찬, 제가 어린 시절부터 스누피만큼이나 애정해 온 고전적인 디저트입니다. 크게 한 입 베어 물어 입안 가득 눅진한 달콤함을 채운 뒤, 따뜻한 다질링을 한 모금 넘겨 넘치는 단맛을 화사하게 씻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모네 정원을 닮은 차
 인도 다질링 지역에서 겨울이 지난 후 2월 말부터 4월 초 사이 이른 봄에 수확하는 첫물차. 산화(발효)를 짧게 멈추어 찻잎에 푸른빛이 도는 것이 특징이다. 특유의 싱그러운 청포도 향(Muscatel)과 산뜻한 수렴성 덕분에 '홍차의 샴페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 노시은
찻잎이 뜨거운 물을 만나자마자 화사하고 달콤한 머스캣 향기가 공기 중으로 쏴아 퍼집니다. 쪼르르 잔 위로 맑고 투명한 황금빛 수색이 일렁이고, 싱그러운 청포도 향과 풋풋한 들꽃 향도 더 진하게 피어오릅니다. 이 찬란한 봄의 감각을 마주하고 있자니, 반사적으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가 평생을 바쳐 가꾸었던 지베르니(Giverny)의 정원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빛을 머금고 수면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수련과 다채로운 꽃들이 뿜어내는 생동감. 다질링이 품은 화사하고 다채로운 향기는 모네의 캔버스 위에서 알록달록하게 빛나던 그 정원의 색채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향기로운 다질링과 찬란한 모네의 정원에 취해 달콤한 슈크림의 맛을 음미하다 보니, 며칠 전 연희동의 한 찻집에서 2년 만에 마주 앉았던 다우(茶友)들과의 찻자리가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연희동 티아레나에서 #이멤버포에버 5명이 뭉쳤다. 처음 만난 이후 강산도 한 번 변한 사이.
ⓒ 노시은
그날 우리의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3단 트레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알록달록한 샌드위치와 샛노란 디저트들, 그리고 잔마다 각양각색으로 찰랑이던 다섯 종류의 차들. 그 다채롭고 눈부신 풍경은 마치 모네의 정원을 그곳 한가운데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 화려했습니다. 그리고 그 알록달록한 화사함 속에서, 우리는 10년이 훌쩍 넘는 묵직한 인연의 시간을 나누었지요.

우리들의 변화는 마치 모네가 평생에 걸쳐 그려낸 화풍의 궤적과도 같았습니다. 모네의 초기작이 맑고 투명한 빛의 찰나를 좇았던 것처럼, 처음 우리가 '차를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로 뭉쳤을 때 우리는 속이 다 비치는 맑은 유리 다구 같았습니다. 쨍하게 부딪히고 반짝이면서도 우리의 마음 한구석은 늘 분주했습니다. 찻잔을 기울이면서도 아이가 있는 다우들은 하원, 하교 시간에 쫓겨 초조하게 시계를 보다가, 찻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허둥지둥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야 했던 분주한 젊은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긴 시간은 우리에게서 조급함을 앗아가고 다정한 여유를 남겨 놓았습니다. 훌쩍 자란 아이들 덕분에 이제 우리의 찻자리에는 시계를 보지 않고도 차의 잔향을 끝까지 음미할 수 있는 고요가 찾아왔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생기발랄 이십 대였던 다우는 그사이 삶의 크고 작은 파도를 온몸으로 부딪쳐 내며, 한층 깊고 단단한 눈빛을 가진 어른이 되어 담담히 그간의 이야기를 꺼냈지요.

거친 파도를 딛고 무사히 도달한 생존의 자리
 다우들과의 모네 그림속 찻자리를 chat GPT의 도움을 받아 구현해보았다.
ⓒ 인공지능생성이미지
시간이 흘러 시력을 잃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캔버스 위로 물감을 거칠게 덧칠해 나갔던 모네의 말년처럼, 우리의 삶에도 숱한 생채기들이 두꺼운 질감으로 쌓였습니다. 하지만 그 말년의 수련 연작들이 초기의 투명함이 흉내 낼 수 없는 압도적인 깊이와 세월을 품어냈듯, 우리의 관계 역시 투명하고 가볍던 유리의 시절을 지나, 삶의 쓴맛을 묵묵히 덮고 거칠게 흡수해 주며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자사호(紫砂壺)의 묵직한 시간들을 통과해 온 셈입니다.

2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공백, 그리고 강산이 변하고도 남았을 긴 세월… 오랜만에 마주 앉은 우리는 굳이 지난 시간의 생채기나 고통의 무게를 앞다투어 전시하거나 파헤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담담히 각자가 지나온 시간들이 스스로의 삶에 어떻게 스몄는지 말하며 찻잔 속 차를 홀짝일 뿐이었죠.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는 가만히 다가가 어깨를 내어주는 위로를 건네고, 작은 성취와 기쁨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새로 도모하고 짊어져야 할 일들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하고 강력한 응원을 실어주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왜 견디기 버거운 부침과 남몰래 삼켜낸 괴로움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모네의 정원처럼 화사하고 다정했던 그 찻자리에서 만큼은, 거친 파도를 딛고 이 자리까지 무사히 도착해 준 서로의 끈질긴 생존을 진심으로 축하했습니다.
 뒤에 보이는 티포트는 이십 몇 년 전쯤 일본 놀러 갔을 때 산리오 세일에서 득템한 스누피 티포트이고, 앞에 있는 찻잔은 일본에서 만들어졌지만 수년 전 대만에 출장 갔을 때 홀리듯 들어갔던 어느 가게에서 발견해서 인연이 됐다.
ⓒ 노시은
달콤한 슈크림의 흔적이 가신 입안을 다시 다질링으로 적시며, 저는 스누피가 그려진 찻잔의 매끄러운 표면을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그리고 며칠 전의 따뜻했던 온기와 오늘 고른 다구를 연결해 봅니다. 아, 인간관계가 익어간다는 건 어쩌면 찻자리에서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그릇의 물성(物性)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구나, 하고요.

유리 다구처럼 아슬아슬하게 투명했던 시작을 지나, 자사호처럼 서로의 잡미를 삼켜주며 길들여진 시간을 넘어, 마침내 지금의 우리는 제가 오늘 고른 이 듬직한 청화백자 같습니다. 각자의 선명한 그림과 고유한 삶의 색깔을 왜곡 없이 온전히 지켜내면서도, 기꺼이 곁을 내어주는 듬직한 온기로 서로를 묵묵히 받쳐주는 사이.

그날 연희동 모임의 끝자락은 우리의 아주 오랜 전통인 저의 '타로 리딩'으로 왁자지껄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카드의 상징을 한 편의 문학적 에세이처럼 풀어내며, 빈 찻잔을 밀어둔 자리에 카드를 펼치고 각자의 고민과 앞날을 묻고 다독이는 든든하고 명랑한 의식이었죠.

다음 모임이 또 언제가 될지는 저도, 다우들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빈 찻잔을 치우며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지요. 다시 이 화사한 정원 같은 찻상 앞에 모이는 그날까지,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기꺼이 삶을 살아내고 또 살아남을 것이라는 걸요.

달콤한 슈크림과 다질링의 잔향이 맴도는 입안으로, 다정하고 눅눅한 여름의 공기가 천천히 밀려듭니다. 세월이 빚어낸 찻잔과 찻잔 사이의 온기를 떠올리며 저는 자꾸만 티포트에 뜨거운 물을 채워 맛있는 다질링을 달게 홀짝였습니다.
 어느 빵집을 가든 슈크림빵을 반드시 먹어보는데 동네에 너무나도 놀랍도록 마음에 드는(고급진 커스터드 크림이 꽉 찬) 슈크림빵을 파는 곳을 찾아서 나도 모르게 "야호!" 소리쳤다. 당연히(?) 그곳의 다른 빵들도 너무 맛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 노시은
※ 유리·도자기·자사호 선택 가이드

물론 차 생활에 엄격한 정답은 없습니다. 그날의 기분과 날씨, 내 취향에 따라 다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 진짜 찻자리의 묘미니까요. 다만 찻상 위에서 어떤 그릇을 꺼낼지 작은 힌트가 필요할 때, 기물(器物)이 가진 고유한 물성(밀도, 보온성, 기공의 유무)을 참고해 보세요.

☞유리 다구 (Glass): 온도와 경계를 허무는 '관찰의 그릇'

-다구의 물성: 표면에 기공이 전혀 없고 열전도율이 매우 높습니다. 끓인 물을 부어도 온도가 빠르게 떨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고온에서 여린 찻잎이 과하게 익어 쓴맛과 떫은맛이 우러나는 것을 막아줍니다.
-큐레이션 포인트:투명한 벽 너머로 찻잎이 물을 머금고 중력에 의해 천천히 가라앉는 '찻잎의 춤(茶舞)'을 감상하기에 최적입니다.
-이런 차를 추천해요: 눈으로 먼저 마시는 차들이 좋습니다. 여린 찻잎이 하늘하늘 피어나는 맑은 녹차나 솜털이 뽀얀 어린 백차, 탕색이 영롱한 꽃차(화차)를 담으면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 됩니다(관련기사 : https://omn.kr/2ik6o).

☞도자기 (Porcelain/Ceramic): 향기를 반사하는 '정직한 거울'
-다구의 물성: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어 표면이 완벽하게 유리화된 백자나 청화백자는 찻물의 맛과 향을 조금도 흡수하지 않습니다. 차가 품은 본연의 장점은 물론, 미세한 단점까지도 가감 없이 정직하게 밀어 올립니다.
-큐레이션 포인트:휘발성이 강하고 화려한 향기를 기물 밖으로 흩어지지 않게 가두어, 고스란히 코끝으로 반사해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차를 추천해요:향기가 생명인 차들에게 최고의 무대입니다. 다질링 첫물차나 보이생차처럼 다채로운 향을 가졌거나, 화려한 꽃향기를 뿜어내는 우롱차, 그리고 맑고 깔끔한 홍차의 매력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줍니다(관련기사 : https://omn.kr/2inu3)

☞자사호 (Zisha Clay): 거친 시간을 다듬는 '호흡하는 흙'
-다구의 물성:자사(紫砂) 특유의 이중 기공(숨구멍) 구조가 찻물의 미세한 잡미와 과도한 수렴성을 흡착하여 맛을 둥글게 다듬어 줍니다. 또한 뛰어난 보온성으로 탕의 온도를 끝까지 유지해 밀도(바디감)를 끌어올립니다.
-큐레이션 포인트:차의 화려한 향보다는 혀끝에 닿는 두터운 질감과 부드러운 목 넘김, 그리고 뱃속을 데워주는 깊은 열감을 온전히 누리는 데 특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차를 추천해요:뜨거운 온도로 진득하게 우려내야 하는 발효차와 궁합이 좋습니다. 세월을 묵힌 보이차(숙차)나 노차(老茶), 중후한 매력의 암차류, 흙의 묵직함을 닮은 흑차류를 우리면 거친 맛은 둥글어지고 깊이는 한층 더해집니다(관련기사 : https://omn.kr/2hi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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