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뜩 오소” 약 가방 2개 동났다…섬주민 웃게 한 ‘바다 위 천사’ [르포]

안대훈 2026. 7. 1.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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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오후 경남 통영시 수우도의 선착장에서 섬 주민 진료를 마친 병원선(경남 511호) 의료진이 다시 병원선으로 복귀하기 위해 보조정에 탑승하고 있다. 선착장 너머 해상에 녹십자가 새겨진 경남 511호가 정박해 있다. 안대훈 기자

" “욕 봤심더. 바람이 이리 부는데 와줘서 고맙심니더.” " 지난달 23일 10시쯤 경남 통영시 사량도(島) 덕동마을회관. 통영항에서 뱃길로 1시간 거리인 이곳 섬마을 주민들이 흰 가운에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을 반겼다. 162t급 병원선(경남 511호)을 타고 온 공중보건의 4명(내과2·한방과1·치과1)과 간호(조무)사 2명 등 의료진이었다. 경남511호는 병·의원은커녕 약국, 보건(지)소조차 없는 외딴섬 주민들을 찾아 무료로 진료·처방하는 ‘바다 위 병원’이다. 주민들은 한 달에 한 번인 병원선 오는 날이 “동네에 제일 중요한 행사”라고 했다. 강동호(68) 이장은 “월말이면 어르신들이 ‘이번엔 병원선 언제 오노’라고 꼭 물어본다”고 전했다.


“퍼뜩 오소”…月 1회 병원선 기다리는 섬 주민


지난달 23일 오전 경남 통영시 사량도에 있는 덕동마을회관에서 병원선(경남 511호) 의료진이 섬 주민들에게 처방된 약을 나눠주면서 복용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안대훈 기자
이날 병원선 의료진이 마을회관에 머문 약 1시간 동안 주민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만신이 쑤시다(온몸이 아프다)”는 70~90대 어르신들이 몰려 들었다. 통깁스한 왼팔을 팔걸이 대신 스카프로 묶어 목에 고정한 김모(78) 할머니는 “팔이 뿌라져 부산 뱅원에 입원한다꼬 지난번에 약을 못 탔다”며 근육통에 쓸 소염진통제와 소화제, 감기약 등 각종 상비약을 받아 갔다. 강 이장은 “퍼뜩 오소. 짐 싸서 갈라칸다”며 진료를 못 본 주민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바빴다. 먼저 온 이웃에게 “내 먼저 (진료) 보면 안 되나”고 조르는 주민도 있었다.

이날 하루 병원선 의료진이 진료·처방한 주민은 120명이 넘었다. 28인치·24인치 여행용 가방 2개를 꽉 채운 각종 일반·전문 의약품은 거의 동났다. 점심 끼니도 선내에서 컵라면·도시락으로 해결하며 덕동·사금·돈지·수우 등 통영 섬마을 4곳을 돈 결과다. 오전 9시쯤 출항한 병원선이 다시 통영항에 돌아온 건 오후 5시쯤이었다. 매달 경남 41개 섬의 51개 마을(주민 2300여명)을 1번씩이라도 방문하려면 주중에 거의 매일 배를 띄워야 한다. 병원선 관계자는 “요즘엔 당일치기이지만, 예전엔 선내에서 숙박하며 돌았다”고 말했다.

경남 병원선(경남 511호) 의료진이 28인치 여행용 가방 등에 꽉 채워온 각종 의약품. 안대훈 기자

경남도가 운영하는 병원선인 경남 511호 선내에는 내과·치과·한의과 진료실은 물론 약제실, 접수대, 대기실이 갖춰져 있어 진료 상담부터 처방까지 원스톱으로 가능하다. 지난 한 해 진료 실적만 연인원 14만7000여명에 달했다. 수명이 23년 된 경남 511호를 대신해 내년부터 취항할 290t급 새 병원선도 현재 건조 중이다. 새 병원선에는 혈액·소변 검사 등이 가능한 임상병리과와 물리치료과도 신설, 조기 질환 발견과 다양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섬주민 건강권 지키는 병원선…“법적 지위는 없어”


이처럼 교통편이 불편해 제때 병원 진료를 받기 어려운 낙도(落島) 주민들에게 병원선은 생명선이나 마찬가지다. 전국 4개 시·도에서 5척(경남1·전남2·충남1·인천1)을 운영 중이다. 이들 병원선은 257개 섬의 3만4066명의 건강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이들 병원선은 수십년째 법적 근거 없이 운영되고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23일 오후 경남 통영시 사량도에 있는 돈지마을회관에서 병원선(경남 511호) 의료진이 섬 주민들을 진료, 처방하고 있다. 안대훈 기자
지난달 23일 오후 경남 통영시 수우도에 있는 수우마을 경로당에서 병원선(경남 511호) 의료진이 섬 주민들을 진료, 처방하고 있다. 안대훈 기자

지난달 15일 국회입법조사처가 낸 ‘섬 주민 찾아가는 병원선, 법·제도 공백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란 제목의 연구보고서를 보면, 병원선은 보건복지부 훈령(병원선 및 쾌속후송선 관리운영 규정)과 각 지자체 조례에 근거해 도서 지역 환자에게 진료·처방 등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정작 지역보건법상 지역보건의료기관(보건소·보건지소 등), 의료법상 의료기관(병·의원)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병원선은 보건소 등이 사용하는 지역보건의료정보시스템(PHIS)을 사용하지 못하고, 별도의 정보시스템을 쓴다.


타 기관 환자정보 공유 안 돼…“중복처방 우려”


즉, 병원선에서는 보건소와 병·의원을 찾은 환자의 진료·처방 기록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현장에서는 자칫 중복 처방 등 불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 지난달 23일 경남 병원선 의료진이 혈압이 높은 90대 주민을 살피는 과정에서 고령인 당사자가 과거 처방 기록을 기억하지 못해 일일이 가족에게 전화해 묻는 등 애를 먹기도 했다.
지난달 23일 오전 경남 통영시 사량도의 덕동마을회관에서 병원선(경남 511호) 의료진이 섬 주민들을 진료하고 있다. 안대훈 기자

지난 4월부터 경남 병원선에서 내과를 맡은 2년차 공보의 고원규(33)씨는 “작년 추자도 보건지소에서 근무할 땐 다른 병원에서 처방한 약물을 파악할 수 있었다. 환자에 따라 ‘혈압약 중복 처방’, ‘항히스타민제 취급 주의’ 등 경고문도 떴지만, PHIS가 공유 안 되는 병원선에선 이런 걸 확인하기 어렵다”며 “노인 분들은 여러 질병 때문에 대개 5~6가지 약을 동시에 복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곳에서 처방한 약재를 모르면 같은 약을 중복 처방하거나 이와 상충되는 다른 약재를 썼을 때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어 조심스럽다”고 했다.


어선도 받는 ‘면세유’ 대상도 아냐…운영비 부담↑


병원선은 의료취약지에서 공공의료 목적으로 운영되지만, 정작 어선도 받는 ‘면세유’ 대상이 아니어서 지자체 운영비 부담이 커지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 조사 결과, 병원선 운영에 드는 지자체 예산은 적게는 7억5000만원에서 많게는 15억원이 든다. 이 중 유류비가 50~60%에 육박한다. 경남 병원선의 경우 국·도비를 매칭한 선박수리비와 새 병원선 건조비를 뺀, 순수 도 예산만 들어가는 공공운영비, 의약품 구입비, 사무관리비, 여비·업무추진비를 합하면 5억8500만원이다. 이 중 유류비만 절반에 가까운 2억2300여만원을 쓴다.
지난달 23일 경남 통영시 수우도 인근 해상에 정박 중인 병원선(경남 511호) 모습. 안대훈 기자

박경숙 경남도 병원선 담당 사무관은 “내년에 새 병원선이 도입되면 유류비가 약 2배 더 들 전망”이라며 “면세유가 적용돼 30% 절감 효과를 보면, 해당 예산으로 더 많은 약제를 준비하고 의료 장비를 개선해 주민들에게 더 나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17일 김태호(경남 양산을) 국회의원이 병원선도 면세유 대상에 포함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 현재 국회 계류 중이다.

한진옥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현행 병원선이 의료취약지 주민을 위한 공공보건의료 자원으로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법적 지위 정립, 주민 안전 보호, 건강보험 및 건강검진 제도 연계, 운영비 지원 등 시급한 법·제도적 공백을 우선적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통영=안대훈 기자 an.dae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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