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의 마음 읽기] 블루베리와 새와 어머니

어느덧 여름에 접어든 골목에는 싱싱한 계절감이 있다. 골목은 이제 보다 극적이다. 푸른 매실이 툭, 툭 떨어져 골목에 뒹군다. 서정주 시인은 시 ‘골목’에서 “이른 아침에 홀로 나와서/ 해 지면 흥얼흥얼 돌아가는 이 골목.// 가난하고 외롭고 이즈러진 사람들이/ 웅크리고 땅 보며 오고 가는 이 골목”이라고 썼다.
■
「 어머니가 심은 블루베리 나무
참새·산새에 열매 다 뺏길 판
새도 먹고 사람도 먹으면 될 일
」

골목에도 여름이 와서 그 길로 사람들은 바구니에 상추를 뜯어 담아서 가거나 복숭아를 가득 채워서 오간다. 요 며칠 제주에는 비가 잦아서 비를 핑곗거리 삼아 일손을 놓았더니 텃밭에는 풀이 무성해졌다. 과장되게 말하면 발을 들여놓지 못할 지경이었다. 게으름은 여름의 풀을 감당하기 어렵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나절 풀을 뽑았다.
얼마 전 시골 고향집에 다녀왔다. 부모님이 야물게 그리고 알뜰하게 가꾸는 텃밭은 단정했다. 오이 넝쿨이 지지대를 타고 오르고, 호박의 순도 거침없이 뻗어가고 있었다. 기운이 왕성했다. 감자꽃도 한창 피어 있었다. 감자꽃은 유순한 모양새여서 시골 사람의 인심을 닮았다. 저녁 무렵에는 마을회관에 가서 동네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다. 포도 농사가 바쁜 때여서 그런지 막 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맑은 땀이 흘러내렸다.
동네에서는 함께 저녁밥을 먹는데, 그날은 비빔밥을 해서 한 그릇씩 드셨다고 했다. 비록 몸은 천근만근 무겁겠지만, 막 식사를 마치고서 감자꽃처럼 웃는 얼굴에서 뭔가 소박한 활기와 평온함과 만족해하는 마음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사람 사이의 정과 흥이 묻어 있었다.
부모님은 마당 가에 블루베리 나무 두 그루를 심어 놓으셨다. 농원에서 얻어왔다고 했다. 청보랏빛 열매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열려 있었다. 어머니는 열매를 한 줌이나 따서 내게 먹어보라고 건네셨다. 제법 맛이 들어 있었다.
제주의 내 집에도 블루베리 나무가 네 그루나 있지만, 올해는 영 열매가 부실한데, 고향집의 블루베리 나무는 마치 장정과도 같은 생명력이 있었다. 나는 블루베리 나무에 새가 곧 날아들 거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도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셨다. 동네 사람마다 어머니께 말하길, 열매를 잘 지키지 않으면 새한테 다 주고 말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 얘길 듣고 “나무 밑에 쪼그려 앉아 블루베리가 익기를 기다리면서 익는 족족 따 먹을까요?”라고 말하곤 함께 웃었다고 하셨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아버지는 “새도 먹고 사람도 먹고, 새가 먹고 남은 거 우리가 먹으면 되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셨다.
염려했던 일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다. 나는 블루베리 나뭇가지에 참새 두 마리가 날아든 것을 보았다. 참새는 블루베리 열매를 쪼고 있었다.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두 분은 “어허, 그놈 참”이라며 기가 막힌다는 듯 말씀하셨다. 점심 무렵이 가까워지자 블루베리 나무 주변에는 참새뿐만 아니라 더 큰 산새까지 날아들고 있었다. 새콤한 블루베리 열매가 있다는 소문이 마치 산골짜기에 메아리처럼 퍼져나가기라도 한 듯이. 아버지는 팔을 허공에 내저으면서 훠이, 훠이 외치셨다. 새를 쫓고 계셨다.
그러곤 얼마나 지났을까. 오후에 블루베리 나무를 보니 나무 곁에 허수아비가 세워져 있었다. 빨간 색깔의 큼직한 반팔 티셔츠를 입은, 아버지의 모자를 쓴 허수아비였다. 어머니가 만들어 세워둔 허수아비였다. 어머니는 이제 할 일은 할 만큼 다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자니 희한하게도 허수아비를 세워둔 이후로는 새가 날아드는 것이 눈에 띄게 뜸해졌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도 눈치를 채고 말겠지만. 그때에는 허수아비도 구실을 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물망을 하나 사서 블루베리 나무 위에 덮어놓을까 궁리를 했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너무 야박한 듯해서 마음을 접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새도 먹고 사람도 먹으면 될 일이었다.
여름 동안 생명 세계는 한 편의 극(劇)을 보는 것처럼 긴장과 반전을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생명 세계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우리의 골목에도, 생활에도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순간이 있을 테다.
문태준 시인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염블리 “돈 굴릴 시간 없는 직장인”…평생 딱 1개 묻어둘 ETF | 중앙일보
- 스위스은행 보낸 3000만 달러…현대 비자금, 누구 위한 돈인가 | 중앙일보
- “삼전닉스 지금 사도 좋다…단, 이 가격에 매도 걸어놔라” | 중앙일보
- “아들에 성관계 영상 보낸다”…전업주부 성착취 ‘악몽의 인플루언서’ | 중앙일보
- ‘안락사 없는 보호소’서 개 사체 117구 발견…美 발칵, 무슨 일 | 중앙일보
- 홍명보 작심 비판한 이천수 “나는 명보 형이 진짜 싫은 게…” | 중앙일보
- “공식 사진 아닙니다”…SNS서 퍼진 ‘통영 범인 얼굴’ 정체 | 중앙일보
- 여름감기인 줄 알았더니…사망자 ‘1→39명’ 급증한 감염병 | 중앙일보
- “스타벅스 가야지” 조롱 후폭풍…배재고, 경기 기권 ‘신중 논의’ | 중앙일보
- 자녀가 아프면 ‘1주일 육휴’… 필요한 열차표 ‘두달전 예매’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