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대지의 거룩한 살갗

2026. 6. 3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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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목사·시인

올해 우리 집 마당엔 유난히 질경이가 많이 돋아났다. 며칠 동안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아직 쇠지 않은 어린 잎들을 캤다.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던 풀, 길바닥의 모진 발길을 온몸으로 견뎌온 날것의 생이 아닌가. 질경이 뿌리를 자른 후 물에 깨끗이 씻어 건져놓고 보니 큰 소쿠리로 가득했다.

「 텃밭의 10㎝ 두께 기름진 겉흙
식물 뿌리내리는 생명의 그물망
인간 훼손에도 스스로를 치유

김지윤 기자

뒤란 돌담 밑에 걸린 무쇠솥에 장작불을 지폈다. 솥이 달궈진 후 초록의 잎들을 한 줌씩 넣고 덖기 시작했다. 뜨거운 솥 위에 잎을 눕히고 나무 주걱을 젓고 또 저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솥 안으로 떨어질 듯 하염없이 손을 움직여 젓는 일. 어쩌면 이 행위는 풀이 새겨온 고통의 무늬를 지우고, 새로운 향을 덧입히는 성스러운 의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서너 시간쯤 지났을까. 잘 덖어진 잎들을 바구니에 모아두고 벌건 숯에 물을 부어 끄는데, 느닷없이 천둥번개가 치더니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보름 넘게 가물었던 터라 목마른 밭작물에 단비가 되겠다는 반가움이 앞섰지만, 이내 덜컥 걱정이 밀려왔다.

이른 봄, 밭을 돋우려고 새로 넣은 흙이 거센 물살에 쓸려 내려가지 않을까. 빗발이 살짝 가늘어진 틈을 타 우산을 쓰고 서둘러 텃밭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텃밭엔 빗물이 흥건히 고여 있을 뿐, 염려했던 흙의 유실은 없었다. 밭 가장자리에 무심히 던져두었던 잔돌들과, 그 틈새를 악착같이 움켜쥔 풀잎들이 서로를 껴안으며 단단한 방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바랭이·명아주·쇠비름·개망초·개비름·쑥 등….

함초롬히 비를 맞으며 돌 틈으로 뾰족뾰족 고개를 내민 여린 풀들이 내게 속삭이는 듯싶었다. ‘작고 여리다고 깔보지 마세요. 우리가 이 땅을 꽉 붙들고 있잖아요.’

작은 농사나마 지으며 깨달은 것은, 농부에게 흙보다 더 소중한 자산은 없다는 사실이다. 식물이 잘 자라는 기름진 땅을 옥토라 부르는데, 이는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농업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농사를 지었었다. 어느 날 고추밭을 매던 어머니는 내 호미 끝을 멈춰 세우며 말씀하셨다. 밭 가장자리의 풀들은 절대 뽑지 말라고. 그 경계의 풀들을 홀라당 뽑아버리면, 큰비가 올 때 밭의 알짜배기 겉흙이 죄다 쓸려 내려간다는 것이었다.

단 10㎝ 두께의 기름진 겉흙이 쌓이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지구우주과학자인 데이비드 몽고메리가 그의 저서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에서 말한 지구의 살갗, 즉 겉흙의 경이로움도 결국 어머니의 호미 끝에 있던 진리였다.

한 줌의 기름진 겉흙 속에는 지구 인류의 수보다 많은 수십억 마리의 미생물이 숨을 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작은 생명들이 끊임없이 유기물을 썩히고 양분을 배출하며, 식물이 뿌리내릴 우주를 빚어낸다. 흙은 그 자체로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이, 더 빨리 얻으려는 탐욕으로 제초제를 뿌려 그 거룩한 그물망을 찢어왔다. 지렁이 한 마리 살 수 없이 콘크리트처럼 굳어버린 박토(薄土).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환경 재앙은, 땅을 생명이 아닌 단순한 자원으로만 바라본 인간의 오만이 부른 대가일지도 모른다.

텃밭에서 돌아와 뒤란 처마 밑에 앉았다. 마당 가득 청량한 빗소리가 번지는 동안, 잘 덖어진 질경이로 차를 우려내어 머금었다. 짓밟힐수록 단단해지며 기어이 깊은 향을 품게 된 질경이의 맛이 입안에 은은하게 감돌았다.

문득 깨닫는다. 흙을 지키는 것은 거창한 울타리가 아니라 이름 없는 경계의 잡풀들이었고, 지구를 살리는 것은 지렁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이었음을. 그리고 오늘 내 입술을 적시는 이 차 한 잔 역시, 대지가 온몸으로 겪어낸 장마와 가뭄의 서사라는 것을.

추적이는 빗줄기 속에서 대지는 여전히 깊은숨을 쉬고 있다. 비록 인간의 손에 상처 입고 굳어버린 박토일지라도, 제 몸을 짓밟고 간 발자국마다 기어이 푸른 싹을 밀어 올리는 질경이가 있는 한, 대지의 거룩한 살갗은 스스로를 치유해 갈 것이다. 편안해진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낮고 아득한 대지를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고진하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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