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산책]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각자의 감각으로

김희윤 2026. 6. 2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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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가 불러낸 8명의 젊은 작가들
각자도생의 시대, 예술은 무엇을 구할 수 있나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 신관 지하. 한선우의 '귀가' 앞에서 귀가라는 말은 이상해진다. 제목은 귀가인데, 돌아온 몸은 집에 맞지 않는다. 폐허가 된 근대 건축 안에 거대한 혼종의 몸이 놓여 있고, 등에는 긴 이동의 시간을 말하는 따개비가 붙어 있다. 식물에 잠식된 건물은 돌아올 집이 이미 예전의 집이 아님을 말한다. 잘린 발은 도착보다 추방에 가깝다. 이 작품 앞에서 전시 제목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는 젊은 작가전의 멋진 표제가 아니라 생존 명령처럼 들린다. 살 수 있는 자는 살아남으라. 그렇다면 이 전시는 누구를 구하는가. 작가인가, 감각인가, 아니면 '다음 세대'라는 이름으로 다시 정돈되는 미술계의 질서인가.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전시 중 , '여성 추상, 감각의 언어' 전경 이미지, 갤러리현대

전시 제목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서 왔다. 프랑스어 'Sauve qui peut'는 희망보다 대피에 가깝다. 각자 알아서 몸을 피하라는 말이다. 갤러리현대는 이 냉혹한 문장을 빌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작가 8명을 불러 모았다. 이주, 여성 추상, 디지털 이미지, 동양화, 퀴어 정체성, AI 이후의 회화가 한 건물 안에 들어왔다. 얼핏 보면 동시대 미술의 다양성이다. 그러나 다양성은 이미 미술계의 가장 안전한 단어가 됐다. 문제는 이들이 얼마나 다른가가 아니다. 그 다름이 서로를 얼마나 불편하게 흔드는가다.

전시는 그 불편함을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못한다. 1층은 '이동, 틈 그리고 부유', 2층은 '여성 추상, 감각의 언어', 지하는 '거부하는 주체'로 나뉜다. 구획은 친절하다. 관람자는 길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이 친절함이 제목과 충돌한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는 말은 질서가 무너진 뒤 튀어나오는 말인데, 전시장 안의 작가들은 너무 잘 정리돼 있다. 이동하는 작가는 1층에, 여성 추상은 2층에, 거부하는 주체는 지하에 놓인다. 다만 이 안정감이 꼭 무효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분류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 분류를 밀어내는 작품의 힘도 더 선명해진다. 이 전시는 좋은 작가들을 모았다. 더 중요한 장면은 그 작가들이 전시가 마련한 이름표를 슬쩍 벗어나는 순간에 있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전시 중 , '거부하는 주체' 전경 이미지, 갤러리현대

한선우의 '귀가'가 그렇다. 온라인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포토샵과 AI로 재구성한 뒤 다시 유화로 옮기는 그의 방식은 빠른 이미지를 손의 느린 시간으로 되감는다. 폐허 속 혼종의 몸은 인간도 동물도, 자연도 기계도 아니다. '귀가'라는 제목은 따뜻하지만 화면은 냉혹하다. 돌아온 자는 집에 맞지 않고, 집도 더 이상 그를 받아들이던 장소가 아니다. 살아남은 자는 멀쩡히 돌아오지 않는다. 생존은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몸을 바꾼다.

이혜인의 'Rosa'는 반대편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한선우의 몸이 폐허를 지나 돌아온 존재라면, 이혜인의 장미는 피고 지는 시간을 몸 안에 저장한 존재다. 붉고 푸르고 흰 붓질은 꽃의 형상을 만들기보다 만개와 소멸이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을 붙든다. 'Rosa'는 장미이자 작가 어머니의 세례명이다. 꽃은 식물의 이름이면서 가족의 기억이고, 계절의 절정이면서 곧 사라질 생의 예고다. 전시가 말하는 '본질'이 거창한 미학적 선언이라면 공허했을 것이다. 이혜인의 회화는 그 말을 몸의 기억과 시간의 압력으로 낮춘다.

한선우, '귀가'. 2026. 갤러리현대

정진화와 조이솝의 작업은 전시의 안전한 표지를 더 노골적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정진화의 먹은 대상을 또렷하게 고정하지 않는다. 번짐과 농담 사이에서 인물과 꽃, 양의 형상은 드러나기보다 사라지는 쪽에 가깝다. 흰 구조물의 창은 닿을 수 없는 것을 바라보게 하고, '탁자 위의 양'과 '흰 천을 두른 사람'은 제물과 상처의 이미지를 고통의 장면보다 그 뒤에 남은 빛으로 밀어낸다. 조이솝은 더 불경하다. 묘비 형식의 'R.I.P.'에 'REST IN POOP'를 새기고, 리코더와 플루트를 해체해 'Unplaying'으로 바꾼다. 악기는 더 이상 연주되지 않고, 묘비는 더 이상 숭고하지 않다. 기능을 잃은 물건들이 조각이 되는 순간, 정체성도 설명 가능한 표지에서 미끄러진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는 성공한 젊은 작가전이라기보다, 성공한 분류와 그 분류를 밀어내는 작품들 사이의 긴장으로 보아야 한다. 시장은 이름을 원하고, 갤러리는 세대를 묶고, 플랫폼은 이미지를 빠르게 소비한다. 작가들은 그 안에서 이주, 여성, 퀴어, AI, 동양화, 추상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름은 필요하지만, 이름은 곧 울타리가 된다. 이 전시가 힘을 얻는 순간은 그 울타리를 설명할 때가 아니라, 몇몇 작품이 그 울타리보다 느리고 끈질기게 움직일 때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잔인한 말이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그 말은 살아남으라는 명령보다, 자기 감각을 남에게 위임하지 말라는 요구로 들린다. 예술이 세계를 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 말은 너무 크고 쉽게 낡는다. 다만 예술이 아직 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세계가 붙여주는 이름보다 먼저 작동하는 감각, 분류되기 전의 몸, 설명되기 전의 불편함일 것이다. 이 전시는 그 감각을 완전히 해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몇 작품은 정돈된 전시장 안에서도 아직 길들지 않은 채 숨 쉰다. 전시는 7월 26일 까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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