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의 벽, 생각보다 더 높았다 [신입 구함, 경력 필수②]

지난 4월 서울 양재동에서 열린 ‘대한민국 상생채용 박람회’ 채용 상담 부스에서 들은 말이다.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등 국내 주요 그룹 15곳과 온·오프라인 약 700개 기업이 참여한 큰 규모 채용박람회다. 오픈 시간인 오전 10시 전부터 20여명의 대기 줄이 입구에 늘어섰다. 행사장 내부 곳곳에 안내 요원이 배치돼 있었다. 2층에선 특강이 열린다고 했다. 박람회 사전 예약자에게 전송된 모바일 메시지를 보여주자 팔찌를 나눠줬다. 안내 팸플릿을 챙겨 들고 박람회장으로 들어섰다.
경력이 없으면 정말 취업이 어려울까. 각종 통계와 자료를 보면 지금 채용 시장에서 경력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다.(‘신입 채용에 ‘경력 우대’, 3배 급증했다 [신입 구함, 경력 필수①]’) 하지만 숫자로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신입을 뽑는 기업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지금 청년들은 어떤 생각으로 취업을 준비하는지, 그리고 경력 없는 취준생 마음은 어떤지. 현장에서 직접 얼굴을 보고 들으며 확인해봤다.
‘경력 이력서’ ‘무경력 이력서’를 한 장씩 준비했다. 회사에 입사하면서 제출했던 실제 이력서를 오랜만에 꺼냈다. 학력부터 학점, 수상 경력과 각종 자격증 등 기본적인 내용은 물론, 대외 활동 이력도 있었다. 흔히 말하는 스펙이 부족한 이력서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중 인턴 경력과 직무 관련 경험 내용을 지웠다. 두장의 이력서로 각각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궁금해졌다.

먼저 경력 없는 이력서를 들고 기업 현직자와의 1:1 커피챗을 포함해 8개 기업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 친절한 태도였지만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특히 이력서를 확인하면 태도가 달라졌다. 무엇이 궁금해서 왔냐고 묻거나, 지금 시점에 필요한 조언을 꺼내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부스는 없었다. 한 담당자는 “이력서가 부족해 보일 수 있고, 일부 기업은 ‘게으르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냉정한 조언을 해줬다. “대기업이 목표면 시기가 늦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것이 고마웠지만 다소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도, 고개를 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숙제를 하지 않아 선생님에게 호출당한 것 같았다. “공백기에 다른 공부를 했어서요.” 묻지도 않았는데 자꾸 변명하게 됐다. 흘끗 본 옆자리 지원자 이력서에 빼곡 적힌 경력 사항이 떠올랐다. 이력서 텅 빈 부분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오후에는 경력 있는 이력서를 들고 채용상담관 부스를 돌았다. 갑자기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노력한 사람인데 아무렴 어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분위기에서 상담이 진행됐다. 이력서 검토가 빨랐고 피드백도 명확했다. 거절당해도 위축되지 않았다. 또 조언을 수용할 여유가 생겼다. 인턴 기자 경험에 대해선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진지하게 관련 직무 경험을 해보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기업 현직자 대부분이 직무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 담당자는 “기업마다 다르겠지만 결국 경력이 서류 통과를 가를 수 있다”며 “요즘은 서류 접수량 자체가 워낙 많다 보니 AI 필터링을 거치는 경우도 많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담당자도 “지원자가 워낙 많다 보니 결국 경험 위주로 보게 된다”고 털어놨다.
기업과 취업 준비 청년들 모두 신입 채용에서 경력의 중요성에 대해 이미 합의한 것처럼 보였다. 또 다른 담당자는 “지원자들이 대체로 관련 직무 경험을 갖고 있다”며 “경험이 없는 사람보다 있는 사람이 더 많다. 여러 개를 갖고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취업 실전 특강’에서도 최근 기업들 경력 선호 현상에 대한 설명이 등장했다. 50여분 간 진행된 특강에서 정준호 LG이노텍 인재역량확보팀장은 “신입보다 경력을 선호하는 현상이 과거에 비해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엔 3년 정도 커리어를 쌓은 경력직을 ‘경력 채용’으로 채용했지만, 최근엔 3~5년의 무거운 경력직보다 1~2년의 짧은 경력직을 기업에서 더 선호하고 빠르게 채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현실을 짚었다.
신입 지원자 경력 유무가 중요해진 이유는 채용을 둘러싼 경영 환경 변화로 설명했다. 과거 많은 인력이 필요했던 고성장 시대엔 정기 공채로 5~10년을 기다리며 인재를 육성했지만, 지금은 기업이 필요한 소수의 인력을 즉시 뽑는 수시 채용 시대라는 얘기였다.
정 팀장은 “기업에서 경력직 채용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기업이 신입을 채용하는 이유는 있다”며 “그 이유를 갖춘 신입 지원자들이 차별화된 인재로 인정받아 취업할 수 있다. 모든 신입 지원자에게 취업 문이 열려 있진 않다”고 언급했다. 이날 특강엔 100여명의 참가자가 몰렸다.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서 듣는 청년들도 눈에 띄었다. 특강 PPT 마지막 문구는 ‘인턴십은 필수, 입사는 선택’이었다.

화학 분야 취업을 준비 중인 황혜진(25·가명)씨는 “요즘 경력이 1~2년 있는데도 경력직으로 안 가고 중고 신입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언급했다. 이어 원하는 기업이 아니어도 먼저 중소기업에 가서 경력을 쌓고, 이후 중고 신입으로 다시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도 쉽진 않다”고 털어놨다.
경력 있는 신입 지원자들 때문에 취업 벽이 더 높아졌다고 느끼는 청년들도 다수였다. 금융권 취업을 준비 중인 홍정호(25·가명)씨는 “신입을 뽑는다는 공고가 떠도 중고 신입이 많아서 들어가기 어렵다”며 “경력 없는 사람을 뽑는다고 해도 실제 합격자를 보면 경력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고 신입과 경쟁해야 해서 예전보다 진입장벽이 높아진 것 같다”고 했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기업 인사 담당자들도 경력 선호 현상으로 취업 난도가 예전보다 높아진 것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한 제조업 관계자는 “전반적으로 채용이 어려워진 것은 맞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단순히 대학 졸업자 중심으로 신입을 채용했다면, 지금은 중고 신입처럼 경험과 스펙을 갖춘 지원자들이 많아지면서 경쟁이 훨씬 치열해진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또 다른 제조업 관계자는 “경기 침체 영향으로 신규 채용도 줄어드는 추세고, 신입을 뽑는다고 해도 사회 경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비교하면 경쟁력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이력서를 보면 인턴 경험 비율이 크게 늘었다”며 “예전에는 10명 중 1명 정도였다면 지금은 10명 중 7명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서지영 이예솔 기자 surg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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