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지형 변화에 정보기관 강화 나선 獨·日…스파이 키우는 추축국

안보 지형이 급변하는 가운데 독일과 일본이 정보기관 역량 강화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라는 역사적 부담 속에 재무장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왔던 양국이 러시아·중국 등 인접국의 군사적 위협과 동맹인 미국의 안보 공약 약화 가능성에 대응해 ‘정보 자강’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2일(현지시간) “독일 정부가 미국 정보기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연방정보부(BND)에 채워진 오랜 규제 족쇄를 푸는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나치 정권과 동독 시절 대중 감시 체제를 경험한 독일은 오랫동안 정보기관을 강력한 외부 감시 체계 아래 두고 활동을 제한해왔다. 이 때문에 BND는 영국 해외정보국(MI6)이나 미국 중앙정보국(CIA) 등에 비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에는 정세를 오판해 BND 수장이 전쟁 발발 시점 우크라이나에 머물다 탈출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정보 역량 강화 필요성이 부각됐다.

독일 정부는 이미 올해 BND 예산을 약 25% 증액해 15억1000만 유로(약 2조6551억원)로 책정했다. 이어 올해 가을까지 BND의 권한과 역할을 대폭 확대하는 개혁 법안을 연방의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법안 초안에 따르면 신호정보 수집과 인공지능(AI) 기반 정보 분석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할 예정이다. 나아가 적대국에 대한 BND의 대응 권한을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보다 공세적인 ‘역해킹’(Hack Back) 권한까지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일본 역시 일본판 CIA로 불리는 국가정보국 설치에 속도를 내며 안보 체제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달 27일 국가정보국과 이를 총괄하는 국가정보회의 신설 법안이 일본 참의원(상원)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가정보회의는 총리를 의장으로 국가공안위원장·관방장관·법무장관 등 관계 각료 9명으로 구성되며 안보 관련 기본 방침을 수립하는 역할을 맡는다. 국가정보국은 국가정보회의 산하 사무국으로 각 부처와 기관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현재 일본은 외무성, 공안조사청, 경찰청 내 외사·공안 부문, 방위성 정보본부 등이 각각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 국가정보국 출범 이후에는 이를 한데 모아 분석하는 체계가 구축될 전망이다. 정보 수집과 분석 기능의 일원화를 통해 국가 차원의 정보 역량과 전략 수립 능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일본이 정보 사령탑 신설 논의를 본격화한 것은 AI를 비롯한 첨단 기술 관련 국제 경쟁이 치열해진 데다 선거 등에 외국 세력이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가짜 뉴스를 유포하며 개입하는 행위가 심각한 국익 침해로 지적됐기 때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는 법안 통과 전날 “중대한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정책 부문의 확실한 의사결정을 정보 부문이 뒷받침하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카이치 내각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공공·기업의 핵심 기밀이 해외로 불법 유출되는 것을 막는 ‘스파이 방지법’ 제정과 해외 정보 수집을 전담하는 ‘대외정보청’ 창설도 추진할 예정이다.

독일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으로 전후 오랜 기간 군사력 증강 및 관계 기관 역할 확대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해왔다. 군비 확대 움직임은 주변국과 국제사회의 경계심을 자극하며 양국에 적지 않은 외교적 부담으로 작용해왔다. 그럼에도 양국이 동시에 안보 체제 빗장을 풀고 나선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 등 인접국이 가하는 안보 위협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 국가들에 실존적 안보 위협으로 다가왔다. 각국은 방위비를 늘리고 군사력 증강에 나서는 한편 안보·정보 기능 강화에도 힘을 쏟았다. FT는 “독일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연방군 재무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며 “이에 따라 BND 역시 조직을 확대하고 사실상 전시 태세에 걸맞은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일본 또한 대만 문제를 둘러싸고 중국과의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하면서 안보 체제 변화에 속도를 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지난해 11월 7일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 발언 이후 일본과 중국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고 양국 간 군사적 긴장도도 한층 고조된 상태다.
미국의 안보 기조 변화 역시 도화선이 됐다. 동맹국들에 방위비 증액을 압박하며 자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 성향을 내세우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등장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주요 동맹국들은 안보 자립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실제로 2025년 3월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와의 정보 공유를 일시 중단했을 당시 유럽 정보 당국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는 독일 정부가 BND 개혁 법안을 추진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전민구 기자 jeon.ming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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