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과 천재 사이의 줄타기, 탁구 천재의 기구한 운명

김상목 2026. 6. 2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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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마티 슈프림>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열린 세계탁구대회. '마티 마우저'는 승승장구하지만, 랭크에도 없던 일본 선수 '엔도'에게 결승에서 무참히 패한다. 설욕을 꿈꾸며 뉴욕으로 돌아왔지만, 미국에선 아직 생소한 탁구선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당장 생계를 위해 삼촌의 신발가게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처지. 다가올 일본 오픈에 출전해야 하지만, 항공권도 구하기 힘든 형편에 온갖 궁리를 해가며 여비 마련에 혈안이 된다. 하지만 일은 점점 꼬이기만 하며 그를 벼랑으로 몰아간다.

비인기종목 세계 정상급 운동선수의 설움
 <마티 슈프림> 스틸
ⓒ 오드
1952년 뉴욕,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은 잊혔지만, 한국전쟁과 냉전이 펼쳐지며 초깅대국 미국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탁구는 아직 국내에선 별로 알려지지 않은 스포츠다. 중국과의 '핑퐁 외교'가 벌어지기까진 아직 20년은 남았다. 주인공은 하필 그런 미국에서 탁구로 스타가 되기를 꿈꾼다. 그는 세계 챔피언도 가볍게 꺾는 대단한 실력자이지만, 정작 고국에선 신발 영업으로 풀칠하는 처지다. 야구와 미식축구, 아이스하키와 농구의 나라에서 태어난 죄다.

당시 미국탁구협회는 마티의 표현대로라면 '중년 남자 2명이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게' 전부라 선수 활동에 쓸모가 없었다. 해외 대회에 출전하려면 자비를 들여야 했다. 국제경기에서 현재 미국 스포츠 대표팀이 누리는 여건을 생각하면 천양지차다. 브리티시 오픈에서도 임원은 고급 호텔에 묵지만, 미국 1위인 마티는 초라한 공동숙소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때문에 항의하다 미운털만 박힌다.

그래도 우승하면 얻을 명성과 상금만 바라봤지만, 뜻밖의 강자가 출현했다. 심지어 전쟁은 끝났어도 여전히 적성국 인식이 머리에 박혔던 일본의 무명선수다. 명예도 실리도 뭐 하나 얻지 못한 채 쓸쓸히 귀국한 그에겐 구질구질한 현실, 거액의 청구서, 냉대와 설움만 가득할 따름이다. 게다가 어릴 적 소꿉친구 '레이첼'이 그와 불륜을 나누다 임신까지 해버렸다. 어떻게든 다가올 일본 오픈에서 설욕하고 탁구선수로 자리를 잡고 싶다. 욕망이 마티를 지배한다.

주인공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에게 굴욕을 안긴 엔도에 대한 설욕, 다가올 일본 오픈에서 우승해 인생 역전을 달성하는 것뿐이다. 팍팍한 현실은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외아들만 바라보며 매달리는 엄마나 욕망을 풀던 애인은 그를 속박할 수 없다. 친구라 해봐야 돈줄이거나 함께 야바위 도박을 벌이는 동료뿐이다. 탁구만이 그의 관심사이자 지긋지긋한 현생에서 벗어날 '동아줄'이다. 23살 흙수저 유대인 청년이 일상에 만족할 수 없다면 품어봄직한 꿈이긴 하다.

윤리와 예의를 초월한 욕망의 질주
 <마티 슈프림>스틸
ⓒ 오드
다가올 일본 오픈에 마티는 모든 걸 건다. 하지만 뉴욕에서 도쿄까지는 너무나 멀다. 항공권을 사기 위해 삼촌의 제화점에서 팔자에 없는 영업사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틈만 나면 달아날 궁리만 하는 주인공인데 어째 언변이 좋아서인지 영업 실적이 훌륭하다. 또래 직원 '로이드'가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한 매니저 지위를 친척 찬스라 해도 삼촌이 제안할 정도다. 착실히 소박하게 살고자 하면 더없이 좋은 기회지만, 정작 마티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오직 탁구대 앞에 설 때만 살아있다는 실감이 나는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는 무대에 서는 것에 방해가 되는 그 무엇도 용납하지 않는다. 멀리 해외 경기에 나갈 동안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는 모친이나 연인에게조차 무관심하다. 모든 인간관계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냐 이용가치가 있느냐 여부로만 판단한다. 자아도취로 보일 만큼 자신만만한 그는 평범한 주변인들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기에 닥치는 대로 이용하고 속이길 거듭한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시합 때는 좀 밉상이긴 해도 탁월한 실력으로 경탄의 대상이던 그의 일상은 남루함을 넘어 '악인'의 전형이라 해도 어긋나지 않는다. 전도유망한 탁구 유망주, 스스로는 세계 최고의 선수라 자신하는데, 정작 고향에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무명의 설움이 사무친다. 세상이 나쁜 거라 믿으며 실력에 걸맞은 영광만을 쫓는다. 나는 이런 데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한탄은 그의 모든 사고를 지배한다. 하지만 주변에선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으로만 비칠 뿐.

작중 첫 대회에 참가하고자 런던행에 오를 때부터 그의 통념과 상식을 초월한 면모는 두드러진다. 자리를 비운 사이 삼촌이 퇴근하는 바람에 여비를 얻지 못한 마티는 총을 들이대고 동료를 협박해 항공권 비용을 가져간다. 엄연히 무장강도에 해당하는 범죄다. 개를 동물병원에 데려가 달라며 건넨 경비도 횡령해 내기 도박에 탕진한다. 후원자에게 무리한 투자를 회유하거나 거짓말로 면담 기회를 잡는 건 그에겐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행위다. 자신은 특별하니까.

미워할 수 없는 악인이 주는 매혹
 <마티 슈프림> 스틸
ⓒ 오드
관객은 점점 지쳐간다. 대체 주인공의 정신 사나운 난동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대체 긍정적 면이라곤 라켓을 쥘 때 외엔 없는 주인공에게 어떻게 감정을 이입할까? 마티는 끊임없이 주위에 민폐를 끼치고 막무가내 행각을 일삼는다.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곤란에 처하건 말건 관심이 없다. 오로지 발부된 벌금을 수습하고 일본으로 갈 방법 찾기에만 절박하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기에, 승리를 믿기에 가능한 행태다.

하지만 주인공의 이기적 면모는 사실 관객 각자 벼랑에 몰리면 자연스레 선보일 이기심의 거울 같은 풍경이다. 물론 영화 속 천방지축 사고 행각은 범죄적 수준이긴 하지만, 팔이 안으로 굽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건 동서고금 보편적 현상 아닌가. 23살 꿈 많고 패기 넘치는 청년, 자신의 실력이 세계 정상급이란 걸 이미 아는 그에게 기회 박탈과 푸대접은 견딜 수 없는 수치이자 질곡이다.

마티에겐 그만의 계산이 있다. 지금 비록 실례를 끼치지만, 탁구 세계제패라는 '예정된 운명'이 실현되면 지금의 과오는 눈 녹듯 사라질 테고, 빚진 이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보상하면 될 일이다. 권태로운 부자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꺼이 후원해야 마땅하고, 어차피 술값이나 싸구려 게임으로 날릴 푼돈을 자신이 획득해 요긴하게 쓰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 영화속 마티 마우저의 사고회로는 그렇게 간단명료한 법칙으로 작동한다. 그를 이해하려면 필수다.

하지만 돈도 연줄도 없는 주인공의 계획은 당연히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거짓말로 쌓아올린 모래성 같던 (자신만의 완벽한)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지고, 새로운 사태가 속출할 뿐. 모든 시도가 물거품이 되자 초반 호기롭게 제안을 거부했던 진짜 강자, 대기업 회장에게 굴욕을 감내하며 하소연하는 지경에 이른다. 세상의 법칙은 이런 거라는 듯, 상대는 잊지 못할 굴욕과 수모를 강요한다. 이 순간 악당과 다를 바 없던 마티를 관객은 문득 동정하고 만다.

그야말로 한 인간의 장대한 드라마
 <마티 슈프림> 스틸
ⓒ 오드
주인공의 운명은 어디로 치달을 것인가? 2시간 30분짜리 대하 드라마는 실존 탁구선수 '마티 라이스먼(1930-2012)' 자서전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영욕을 거대한 인간극장으로 압축한다. 천재와 사기꾼 사이를 널뛰며 성공에만 집착하던 주인공의 행로가 어디에 도달할지 지켜볼 권리는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마티 마우저의 한숨 터지면서도 끝까지 조마조마 지켜보게 만드는 여정은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장관이다.

주인공을 꿰찬 할리우드 '대세' 티모시 살라메는 그가 단지 청춘스타도, 액션 히어로도 아닌 제대로 타인의 인생을 담는 그릇이 되기에 충분한 연기자란 걸 증명한다. 전작 <컴플리트 언노운>에선 전설적 포크 가수 밥 딜런의 1960년대에 빙의하더니, <마티 슈프림>에선 한 탁구선수의 영욕을 1950년대 배경과 함께 흡수한다. 인간 스펀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연기에 넋을 놓고 응시할 수밖에 없지만, 미국의 가장 좋았던 시절로 회고되는 1950년대 고증과 시대상 복원도 흥미로운 구석이다. 2차 세계대전 상흔이 여전히 곳곳에 남은 시대 흔적이 여실하다. 인종차별은 사방에 숨어 있다. 자식을 태평양전쟁에서 잃은 대기업 회장은 돈을 벌기 위해 원수의 나라 일본에서 판촉에 열을 올리고, 아시아 시장의 잠재력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자본주의 종주국다운 행보다. 마티 역시 홍보의 도구로만 취급될 뿐.

탁구가 세계적 인기 종목이 되어가는 데도, 가장 큰 시장인 미국에선 찬밥에 불과하다. 미국 챔피언 마티 마우저는 자국에서 별 후원도 받지 못한 채 서커스 스포츠팀 소속으로 푼돈 벌며 고된 세계 투어 일정을 소화한다. 동물과 시합을 벌이거나 묘기를 보여주는 등 선수로서 굴욕을 느낄 행위도 감수한다. 초보적이지만, 현대 스포츠의 상업주의와 스폰서 제도의 맹아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설프지만, 방향성은 명확히 잡히던 태동기의 흔적이다.

미국의 전후 '비트 세대' 출현과 조응하듯 공들인 음악 사용이 절묘하다. 그저 주인공의 질풍노도 행각에 맞춰 흐르는 줄 알았는데 정확히 이등분, 1950년대 당대 음악은 고풍스러운 그 시절 사회와 관습을, 한참 지난 1980년대 뉴웨이브는 불안정한 현재 속에서 꿈을 좇는 청년세대의 정서, 주인공의 실존을 절묘하게 반영한다.

한 인간의 치기 가득한 한 때 풍운을 압축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해도 <마티 슈프림>이 뿜어내는 기이한 열정은 언급한 두 추억의 신스 팝 명곡 가사로 온전히 형상화한다. (공교롭게도 둘 나 냉전에 대한 항의가 녹아든 노래다!) 누구나 젊을 적 품어봤을 세상에 대한 불만, 나이 든 후 과거를 곱씹으며 깨닫는 회한이 이만큼 절절한 영화는 흔하지 않다. 눈부신 연기에 넋을 놓고 함께 달리다 보면 문득 도착하는 어떤 지점에서 한참 머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작품정보]

마티 슈프림
Marty Supreme
2025|미국|드라마
2026.07.01. 개봉|150분|15세 관람가
감독 조쉬 사프디
출연 티모시 샬라메, 기네스 팰트로, 오데사 아지온, 케빈 오리어리,
타일러 오코마, 아벨 페라라, 프랜 드레셔
수입 오드
배급 마인드마크, 하이브미디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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