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자 좋아해” 여고생 고백…혐오도 편견도 없는 이들의 ‘여름’
‘이반리 장만옥’ ‘여름의 카메라’
성소수자 예능 인기 끄는 시대
“성정체성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요즘 세대 특성도 반영했죠”

" “민정아, 나 여자 좋아해.” " 고등학생 여름(김시아)의 용기 낸 고백에 단짝 친구 민정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이렇게 대꾸한다. “알아. 너 남자 사진은 안 찍잖아.”
지난 24일 개봉한 성장 영화 ‘여름의 카메라’에서 주인공 여름의 커밍아웃(성정체성을 공개하는 것) 순간은 이토록 구김살 없이 표현된다. 세상을 떠난 아빠의 카메라 속 필름에서 아빠의 비밀을 알게 된 여름이 아빠의 고교시절 단짝을 찾아가는 여정과, 여름 자신의 첫사랑이 어우러진다.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로 인한 성장통은 조금도 없이 풋사랑의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인스타 감성”이란 관람평(키노라이츠)이 나올 정도다.
퀴어 영화가 달라졌다. 과거 퀴어 영화에서 주로 다룬 정체성 고민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소외, 편견에 대한 묘사는 덜어냈다. 밝고 유쾌한 장르물도 적지 않다. 성소수자 소재 단편으로 꾸준히 주목받은 신인 감독들의 장편 데뷔작이란 것도 공통점이다.

지난 10일 개봉한 ‘이반리 장만옥’은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레즈비언 만옥(양말복)이 하필 전 남편이 마을 이장인 탓에 사사건건 간섭을 당하다 홧김에 이장 선거에 출마하는 소동을 그렸다. 만옥은 마냥 처연한 희생자로 묘사되지 않고, ‘라떼(나 때는)’성 막말을 서슴지 않는 ‘꼰대’이자 드센 성미라는 설정이다. 50이 넘어 동성애자라고 이모한텐 등짝을 맞지만, 의외의 인물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제 1대 트랜스젠더 퍼포머 색자, 트랜스젠더 사진가 성재윤이 극중 성소수자 캐릭터로 출연했다. 마을 이름 ‘이반’은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은어이기도 하다.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의 각본을 겸한 이유진 감독은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남도영화제, 토론토릴아시안영화제 관객상을 휩쓸었다.
지난 1일 언론 시사회 후 간담회에서 코미디를 택한 이유에 대해 “웃음은 사람들의 방어를 낮추는 힘이 있다”고 밝힌 그는 26일 본지와 통화에서 “최근 예능에서 퀴어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며 많은 지지를 받는 걸 보면서 영화도 유쾌하고 당당한 퀴어의 모습과 함께 이분들의 불안감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했다”고 부연했다. 커밍아웃한 연예인들의 방송 출연이 자연스러워졌고, 성소수자의 연애‧결혼을 담은 리얼리티쇼가 인기를 끄는 사회 분위기가 영감이 됐다는 것이다.


‘여름의 카메라’도 각본을 겸한 성스러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비롯해 시애틀국제영화제 웨이브 메이커상, 목포국도1호선독립영화제 배우상 등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교통사고로 친구를 잃은 상실의 경험에서 영화를 출발했다는 성스러운 감독은 “영화를 위해 고등학생 퀴어들을 인터뷰해보니 이전 세대보다 좀 더 성정체성을 쉽게 받아들인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영화에 혐오, 차별적 시선을 배제한 이유에 대해선, 이런 세대적 특성과 함께 영화 전체를 주인공 여름의 주관적 기억처럼 그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성스러운 감독은“퀴어 관객들에겐 이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이 공간이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퀴어가 아닌 관객은 이 세상에 퀴어가 자연스럽게 존재한다는 걸 느껴주시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김승환 프로그래머는 “최근 퀴어 영화에선 근본적인 정체성을 고민하는 작품보단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현실적 고민이 많아졌다”고 본지에 전했다. 이는 전 세계적인 경향으로, 한국에선 3년 전부터 나타났다고 한다.
탈북민 성소수자와 동갑내기 남한 친구의 엇갈린 관계를 미려하게 그려 보편적 공감을 끌어낸 지난해 개봉작 ‘3670’이 대표적 사례다. 박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4관왕, 올해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 등을 차지했다. 지난해 전주영화제에 초청된 1세대 퀴어 영화감독 김조광수(청년필름 대표)의 신작 ‘꿈을 꾸었다 말해요’(2025)도 중고 거래로 만난 두 청년의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를 그렸다.
‘꿈을 꾸었다 말해요’의 제작에도 참여한 김 프로그래머는 “과거엔 주인공의 성정체성을 관객에게 설득해야 한다는 고민 속에 시나리오를 개발했다면, 요즘 퀴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성정체성에 대해 대체로 ‘쿨한’ 태도로 그려진다”면서 사회적 인식이 바뀌면서 퀴어 영화의 변화도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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