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작가요?” 전통 벗어나 실험 이어 온 작가죠”
청년부터 팔순까지 실험미술 거장
작가 이강소

지난 18일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가재울길 이강소(83)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가며 좀 헤맸다. 마지막에는 논밭을 낀 좁은 길을 지나야 해 긴가민가했다. 아연, 경사진 언덕 오른쪽으로 작업실이 나타났다. 그는 1993년 11년간 재직하던 경남 진주 경상국립대 교수직을 조기 퇴직한 뒤 전업 작가로 살기 위해 이곳 안성으로 표표히 올라왔다. 연고는 없었다. 중앙대 안성캠퍼스에 적을 둔 이승조 작가가 주동이 돼 나이 들면 서로 함께 어울리며 작업하자며 심문섭, 박서보 등과 안성에 땅을 산 게 계기가 됐다. 현재는 이 작가만 안성 터줏대감처럼 30년 넘게 작업실을 지키고 있다.
1000평 가까운 작업실은 회화실, 조각실, 쇼룸 등이 건물별로 나뉘어져 넓은 앞뒤 마당을 가로질러 부산히 가야 했다. 그게 건강 비결일까 싶을 정도로 팔순이 넘었는데도 정정해 보였다.
작가는 지금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수년 전부터 단색화의 뒤를 이어 실험미술이 주목받는 가운데 이를 조명하는 기획전 ‘실험미술 1960-70년대’가 국립현대미술관(2023)과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2024)에서 잇달아 열렸다. 이런 가운데 실험미술 대가로서 이강소를 조명하는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2024)과 대구미술관(2025)에서 순차적으로 열렸고, 해외 미술시장에선 타데우스로팍 갤러리의 전속이 되며 글로벌 블루칩 작가가 됐다.

올해도 대구의 리안갤러리(5월 28일∼7월 11일)와 뉴욕 한국문화원(5월 13일∼6월 20일)에서 개인전 개막식을 막 끝내고 한숨을 돌린 터였다. 뉴욕 한국문화원에서는 40년 전인 1986년 동생 이강자(작고)와 2인전을 했기에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그때는 뉴욕주립대 객원 교수로 머물던 시기였다.
“한국의 위상이 정말 올라갔어요. 40년 전 그때는 한국 작가들, 한국 미술계가 뉴욕에서 많이 외로웠어요. 2년 전 구겐하임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 때와 비교해도 또 달라졌고요.”

지난달 12일 뉴욕 한국문화원 개인전 VIP 오픈 때 아티스트 토크를 했는데, 미국은 물론 캐나다의 미술관 관계자까지 150명 넘게 참석했다. “프리즈 뉴욕 아트페어 시기와 겹친 면도 있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을 엄청 가지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뉴욕타임스는 “급진적인 실험가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화가로 성장해온 그의 궤적을 30여점의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거 아세요? 실험미술이라는 용어가 저 때문에 나온 겁니다.” 1960~70년대 일군의 청년 작가를 중심으로 회화도 조각도 아닌 새로운 미술을 하자는 움직임이 거셌다. 이는 ‘실험미술’로 통칭된다. 그런데 이 용어의 출발이 이 작가라니. 사연은 이러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 화단이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중심으로 진행되며 폐단이 심했습니다. 서울대 교수가 심사위원이 되면 서울대 학생이, 홍익대 교수가 심사위원이 되면 홍익대 학생이 우루루 상을 받는 이상한 거래의 장이 됐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다 반발했지요. 우리 세대는 학교 상관없이 새로운 실험을 하자며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홍익대 중심의 ST(시간과 공간을 뜻함), 서울대 중심의 신체제가 있었지만 여러 학교가 합동이 된 AG(아방가르드)도 있었다. 그가 1973년 서울 명동화랑에서 연 첫 개인전에선 작품을 건 게 아니라 선술집을 차렸다. 그런 전위적인 현장이 서울대 출신 작가의 행사였음에도 홍익대 출신 신학철, 경주 계림예대를 중퇴한 김구림까지 와서 축하해 줬던 것을 작업실에 걸린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AG그룹은 국제미술전으로 확장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실망한 이 작가는 대구로 낙향했다. 그곳에서도 조용히 살지는 못했다. 1973년 ‘한국현대미술초대작가전’에 이어 1974년 ‘한국 실험미술 작가전’을 열었다. “저는 실험미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AG, 즉 아방가르드는 미국에서 다 사용하는 거예요. 우리한테 적합하지 않습니다.”
실험미술이라는 용어는 1974∼79년의 대구현대미술제로 확장됐다. 그는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 한국 대표 청년 작가로 참여한 뒤 유럽의 비디오 아트를 한국에 전파하려 했다. 1978년 제4회 대구현대미술제에선 본인뿐 아니라 박현기, 김영진, 최병소 등을 독려해 한국 최초로 비디오 작업을 선보이는 무대를 만들었다. 당시 언론은 이 행사를 “전위 미술 실험 잔치”라고 소개했다.
이 작가는 1982년 경상국립대 교수로 임용되면서 실험미술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실험은 10년을 했으니 충분했다”고 설명했다. 이때부터 전통적 장르인 회화와 조각에 새길을 내는 실험을 하는 시기였다고 이해된다.
안성의 작업실 쇼룸에는 좌대 위에 벽돌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마구 던져져 굳어진 ‘두부처럼 휘어진 흙 조각들’이 도열해 있었다. 교수 시절에 탄생한 새로운 조각이다. “옆방에 조소실이 있었습니다. 뭘 할까 하다가 흙으로 뭔가를 빚어 던져 봤어요.”
조각이 던져져서 저절로 형태가 만들어지는 걸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각의 역사를 봐도 로댕도 부르댕도 다들 손끝으로 뭔가 만들었어요. 이렇게 사람 손을 떠나서 하는 조각이 스스로 되는 걸 하는 조각가를 본 적이 없어요.”
회화의 방법론에서도 새로운 형식에 대한 탐구가 진행됐다. “작가의 주관적인 표현을 관람객에서 강제로 주입하는 예술 형식은 현대에선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방법이 없는가. 몇 년간 고민하고 실패도 하면서 ‘에라 모르겠다. 되는대로 붓질을 해 보자’ 싶더라고요. 그런데 옛날 습관이 있어 풍경 비슷하게 됐고, 되더라도 뭔지 모호한 풍경이 되더라고요. 모호하니 관객이 자신의 경험에 따라 해석하는 그림이 가능하겠구나 싶더군요.”
그렇게 해서 1989년부터 오리, 사슴, 집, 배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미완성 그림 같은 연작이 나왔다. 일방적으로 강요하기보다 관람객이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그림이 탄생했다. 그래서 이강소의 예술 세계를 특징 짓는 단어는 ‘되어지는(Becoming)’이다. 대구와 뉴욕의 두 개인전도 모두 전시 제목을 ‘생성의 장’으로 명명했다. 몇 년 전부터는 원색을 쓰는 회화도 한다. “색을 써도 자기 표현이 아닌 작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실험 중입니다.”
이 작가는 미술시장에서 자신을 단색화(단색 경향의 추상화) 작가로 분류하는 것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저는 단색화 작가가 아니에요. 전통적인 회화 아닌 것, 전통적인 조각 아닌 것을 계속 실험해온 작가일 뿐입니다.”
후배 세대에 대한 조언을 묻자 교류를 강조했다. “현대미술은 개인의 표현 시대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장입니다. 근대가 아니라는 거죠. 내 자신이 무슨 독특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고, 서로 협력하고 교류하고 인정하며 풍요로워지는 것이 현대입니다. 현대미술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옛날에는 학교 안 가리고 잘 어울렸는데 요즘엔 개인화돼 안타깝습니다.”
안성=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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