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군체’ BEP 300만 된 비결…한국영화 제작비 설계 바뀐다
박찬욱·봉준호는 이름만 보고 투자

올 하반기 개봉 예정인 연상호 감독의 영화 ‘실낙원’이 해외 선판매로 순제작비 전액을 회수했다. 지난달 21일 개봉한 연 감독의 좀비 영화 ‘군체’는 개봉 열흘 만에 손익분기점(BEP) 300만명을 넘어섰다. 순제작비 170억원이 투입된 ‘군체’는 극장 매출로만 따질 경우 BEP가 500만명 이상이지만, 지난달 칸영화제 초청에 앞서 해외 124개국에 선판매돼 BEP를 낮췄다.
국내 극장 매출에 주로 의존했던 한국영화 수익 구조가 변화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스타 감독들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해외 매출 비중이 커졌다. 극장가가 팬데믹 이전의 관객수를 회복하지 못하는 가운데, 새로운 자구책이 되고 있다.

‘군체’는 지난해 칸 필름마켓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지난달 칸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서 상영되던 순간 이미 해외 판매 예상치의 70%가량을 달성한 상태였다. 연 감독이 글로벌 흥행작 ‘부산행’(2016), ‘반도’(2020)에 이어 만든 좀비물이란 게 ‘트랙레코드(과거의 성과)’로 작용해 판매 속도를 높였다. ‘군체’ 투자·배급사 쇼박스의 안정원 해외사업팀 이사는 “‘군체’가 엄밀히 속편은 아니지만 ‘부산행’ ‘반도’를 했던 해외 배급사들을 중심으로 150여개 국가 및 지역에 판매했다”고 밝혔다.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 ‘실낙원’은 연 감독 특유의 ‘하이콘셉트’가 통했다. 글로벌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OTT)을 통해 판타지 시리즈 ‘지옥’, 괴수물 ‘기생수: 더 그레이’, SF 영화 ‘정이’ 등을 선보여온 그가 ‘얼굴’(2025)에 이어 저예산 독립 방식 제작·연출한 작품이다. 미스터리한 사고로 실종됐다가 9년 만에 돌아온 아들과 엄마의 이야기에 인공지능(AI) 소재를 접목했다. ‘실낙원’ 투자·배급사 CJ ENM의 고경범 영화사업부 글로벌 프로젝트장은 “‘실낙원’은 AI에 관한 콘셉트가 명확한 영화다. 어떤 영화가 글로벌하냐를 가르는 기준은 감독의 세계적 명성과 어느 지역에서나 이해될 만한 초국적 콘셉트”라고 말했다.

나홍진 감독의 SF 액션 ‘호프’ 역시 해외 선판매만으로 한국영화 역대 최고가로 알려진 순제작비의 절반을 회수했다. ‘호프’는 범죄 스릴러 ‘추격자’(2007), 미스터리 호러 ‘곡성’(2016) 등으로 국내외 장르 팬덤이 두터운 나 감독이 처음 도전한 외계인 영화다. SF 액션 블록버스터로는 이례적으로 칸 경쟁 부문에 초청돼 세계적 화제를 모았고, 지난달 200여개 국가 및 권역에서 사실상 ‘완판’돼 200억원 중반대 매출을 거두며 역대 한국영화 해외 선판매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에 따라 당초 업계에서 관객 1000만명 가량으로 추정했던 BEP도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호프’는 올가을 ‘기생충’(2019)의 북미 배급사 네온이 배급을 맡은 북미를 시작으로 해외 극장가를 두드린다. 투자·배급사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해외 개봉 성과를 배분받는 형태로 계약이 이뤄진 만큼 향후 ‘호프’의 해외 수익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시장에서 거장으로 통하는 감독의 작품은 기획 단계부터 해외 흥행 잠재력을 고려해 제작비를 설계하기도 한다. 해외 영화계와 신뢰를 쌓아온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일찌감치 거래가 시작되고, 더 공격적인 거래가를 제시하는 새로운 사업자를 통해 영화의 몸값을 높이는 수순이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대표적이다. 북미와 프랑스 등에서 ‘기생충’ 때보다 5배 가량 뛴 미니멈 개런티(콘텐트 공급자가 유통사로부터 최소 수익을 약정하고 선지급받는 금액)로 물꼬를 트면서, 지난해 9월 국내 개봉 전에 이미 전세계 200여개국 선판매한 매출만으로 순제작비 170억원을 전액 회수했다.

내년 상반기 완성이 목표인 봉준호 감독의 첫 애니메이션 ‘앨리(Ally)’는 CJ ENM, 펜처인베스트의 펜처 K-콘텐츠 투자조합과 프랑스 메이저 스튜디오 파테 필름이 공동 투자·배급했다. CJ ENM은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을 휩쓴 2019년 봉 감독과 함께 ‘앨리’ 기획에 착수했다. CJ ENM 고경범 프로젝트장은 “K콘텐트가 각광받으면서 영화계 톱 크리에이터(창작자)들이 글로벌 타깃의 영화를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해외에서 먼저 한국에 협업을 의뢰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김지운 감독이 할리우드 제작사 디파트먼트M의 의뢰로 한국에서 촬영한 영어 대사 영화 ‘더 홀’은 최근 현지 배급사 오라이온과 1200만달러(약 185억원)의 제작비를 회수하고도 남는 배급 계약을 맺었다. 이 영화에 메인 프로듀서로 참여한 제작사 앤솔로지 최재원 대표는 “최근 한국이 ‘핫’해지면서 미국 제작사가 한국 촬영에 흥미를 보였다”면서 “미국보다 제작비를 줄일 수 있고 한국 스태프의 수준이 높다는 점도 만족하더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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