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이뤄줘 고맙네”…멕시코 사장님 된 ‘차범근 후계자’의 눈물

24일(한국시간) 멕시코시티의 한 한식당. 사장 노인호(66)씨는 현지인 직원들에게 월드컵 단체 응원을 위한 식당 업무를 가르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300여 명이 입장 가능한 이곳은 하루 뒤면 교민들의 단체 응원 장소가 된다. 그러나 정작 사장인 그는 그날 여기에 없을 것이다.
한국 대표팀이 25일 북중미 월드컵 32강 진출을 걸고 몬테레이에서 남아공과 맞붙는 날, 노씨도 그 경기장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멕시코시티에서 몬테레이는 차로 편도 10시간 거리. 그래도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 떠나기로 했다.

처음도 아니다. 홍명보호가 과달라하라에서 치른 두 경기도 모두 현장에서 봤다. 직원들이 “한국 경기가 열리니 사장님은 꼭 가야 한다”며 등을 떠밀었다. 노씨는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축구의 아이콘’이다. 1980년대 축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국가대표 공격수 출신이라서다. “후배들이 32강 진출을 걸고 뛰는데, 돈 몇 푼 버는 건 중요하지 않다”며 그는 웃었다.
노씨가 축구를 시작한 건 울산 학성고 1학년 때였다. 시작은 늦었지만 183㎝의 큰 키, 100m를 11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 탁월한 골 결정력으로 금방 두각을 나타냈다. 명지대 4학년이던 1983년 마침내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해 6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태국전(4-0 승)에서 A매치 데뷔와 함께 2골을 터뜨렸고, 이어진 나이지리아전에서도 결승골로 1-0 승리를 이끌었다. ‘차범근의 후계자’, ‘최순호의 라이벌’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는 “조규성처럼 파워가 넘쳤고, 스피드도 손흥민 못지않았다”고 웃으며 회고했다.
그는 1983년 대우 로열즈와 계약했다. 문제는 당시 대우가 실업팀이어서 규정상 정식 프로 계약을 할 수 없었다는 거다. 노씨는 이런 규칙을 몰랐다고 한다. 뒤늦게 창단해 영입전에 가세한 현대 호랑이 축구단은 이 사실을 알고 노씨를 설득해 정식 계약을 맺었다. 이중 등록 선수가 된 그를 두고 현대와 대우 그룹이 자존심을 걸고 법정 분쟁을 벌였다. 노인호 파문은 김종부 스카우트 전쟁과 함께 1983년 프로축구 출범 초기를 뒤흔든 2대 분쟁 사건이다.

우여곡절 끝에 1984년 2월 현대에 입단했다. 하지만 1년 가까이 경기에 나서지 못해 감각은 떨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까지 겪었다. 프로 무대 28경기 2골, A매치 4경기 3골이라는 성적을 남기고 1987년 유니폼을 벗었다.
1992년 멕시코시티에 자리를 잡은 그는 34년간 안 해본 일이 없다. “요식업에 정착하기까지 다섯 번 이상 망했다. 현지인 텃세도 심했다. 그때마다 ‘태극마크도 달았는데 이걸 못 견디겠냐’는 오기로 버텼다”고 그는 털어놨다.
사업에서 성공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축구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이중 계약 파동이 없었다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고 했다. 그 아픔이 이번 월드컵에서 조금씩 치유되는 듯하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후배들이 뛰는 모습을 보니 심장이 다시 뛴다. 북중미 어디서 경기하든 따라가서 ‘대한민국’을 외칠 거다. 선배가 응원한다. 특히 공격수 후배들이 더 마음이 간다. 손흥민, 조규성, 오현규 모두 골맛 보고 최대한 높은 무대에 올라다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못 이룬 내 멕시코 월드컵 출전의 꿈을 후배들이 대신 이뤄줘 고맙다”고 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멕시코시티=피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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