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시대서 폭력의 시대로… ‘약육강식’ 세계가 온다

김판,김지훈,이강민 2026. 6. 2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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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의 세계] ⑧ 전쟁 끝나며 ‘전쟁 시대’ 열렸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


미국과 이란이 종전 양해각서(MOU)에 서명하면서 106일간의 전쟁이 마무리 수순을 밟게 됐다. 하지만 종전이 된다고 해서 곧바로 ‘평화의 시대’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쟁을 연구하는 학계에서는 “미국·이란 전쟁을 계기로 새로운 세계적 폭력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번 전쟁이 국경 침탈을 금기시하던 국제정치 질서를 뿌리째 흔들어놨고 더 이상 명분이나 규칙 따위가 작동하지 않는 약육강식의 세상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후퇴는 강대국들이 자초한 셈이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23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기존 전쟁법이나 국제정치 질서에서는 국경 침탈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들이 앞장서서 이 같은 관념을 깨뜨렸다”고 지적했다. 이어 “과거에는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했지만 이제는 미국의 시선이 달라졌다”며 “다시 엄청난 혼란의 시대로 돌아가는 상황이 어느 정도 예견은 됐지만 이번 전쟁으로 더욱 선명해졌다”고 말했다. 이상현 세종연구원 수석연구위원도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기 위해 강대국들이 앞장서서 기존 국제 질서를 깨뜨리고 있다. 굉장히 안 좋은 선례를 자꾸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약소국들 입장에서도 비대칭 전력 개발에 대한 유혹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종전 양해각서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이란이 다시 무력 충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아직 종전이라고 평가하기는 굉장히 이르다. 과연 이란에서 핵을 내려놓을 것인지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 언제든지 다시 교전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지역연구센터장도 “본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구체적인 핵 협상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을 다시 공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특히 흔들리는 국제 정세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에도 관심이 쏠린다. 미국이 ‘탈중동’ 전략에 시동을 걸면서 중국에 대한 견제를 본격화할 경우 동북아 지역의 외교·안보 함수도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유달승 한국외대 이란학과 교수는 “앞으로 미국은 현실적으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식으로 전략자산을 재배치할 가능성이 크다”며 “국제적 긴장이 중동 지역에서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으로 옮겨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상현 연구위원도 “미국은 동맹국들에 지역 방어에서 더 많은 공조를 요구하겠다는 입장이 확고하다”며 “만약 미국이 동중국해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한국도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면 동맹 관계 자체가 외교·안보적 리스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불안정한 국제 질서는 객관적인 수치로도 확인된다. 국제 무력 분쟁을 추적하는 노르웨이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PRIO)가 지난 8일 발간한 ‘세계 분쟁 동향: 1946~2025년 종합 리포트’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발생한 국가 간 무력 분쟁은 8건을 기록했다. 1946년 통계 작성 이래 사상 최대 수준이다. 분쟁 당사자 가운데 어느 한쪽에 국가가 관여된 분쟁도 65건이나 관측됐다. 이 역시 사상 최대치다. 보고서는 스웨덴 웁살라대학의 분쟁 데이터 프로그램(UCDP)을 기반으로 지난 80여년간의 전 세계 무력 분쟁을 분석했다.


연구소의 시리 아스 루스타드 연구국장은 국민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현재 우리는 지난 수년간 봤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국제적 긴장 고조와 폭력의 상승세를 눈앞에 두고 있다”며 “10년 전보다 세계적 규모의 대전에 훨씬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가 왔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더 큰 문제는 80여년 전 만들어진 유엔 체제가 상임이사국들이 직접 무력 침공을 강행하는 지금의 상황을 진정시키도록 설계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이들도 나날이 증가 추세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약 24만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1989년 냉전 체제가 종말을 빚은 이후 1994년(르완다 전쟁)과 2021년(에티오피아 전쟁)을 제외하면 세 번째로 높은 수치다.

기존에는 아프리카 등 국지적 지역에 국한됐던 무력 분쟁이 전 세계로 확산하는 모습도 우려스러운 지점이다. 루스타드 국장은 “중동은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국가 주도 갈등 건수를 기록했고, 아시아 역시 1990년대 중반 이후 국가 주도 갈등이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며 “이런 추세는 글로벌 폭력의 증가가 특정한 지역에 국한된 게 아니라 국제안보가 전반적으로 악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결국 해법은 중진국의 연대와 자강으로 모인다. 루스타드 국장은 한국에 대해 “지나치게 안이하게 있어선 안 된다”고 제언했다. 그는 “유럽도, 한국도 미국에 방위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지킬 힘을 길러야 한다”며 “전시에 어떻게 국가의 핵심 기능을 유지할 것인지, 우리가 어떤 자원을 활용해 전쟁에 맞설지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 교수도 “대한민국은 기존 국제 질서에서 가장 큰 수혜자였기 때문에 국제 질서와 규범이 지켜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계속 강조해야 한다”며 “같은 입장을 공유하는 국가들끼리 ‘중견국 연대’를 구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동시에 무질서의 시대에 대비해 우리만의 근력을 강화해야 한다. 우리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방어 자산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슈탐사팀=김판 김지훈 이강민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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