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사 없이 목례만 하고 앉은 정치인, 시민들이 박수 보낸 이유

김희정 2026. 6. 22. 17:5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강연장에서 시민의 시간을 존중한 한 정치인의 작은 행동이 던진 메시지

[김희정 기자]

 여수 이순신 도서관에서 열린 박근세씨의 "365 섬의 기록'강연 모습
ⓒ 김희정
얼마 전 한 강연장에서 사회자의 짧은 멘트가 객석의 웃음을 자아냈다.

"선거 전이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정치인들이 많이 오셨겠지만, 오늘은 다행히 딱 한 분만 참석하셨습니다."

객석에서는 자연스럽게 웃음과 박수가 나왔다. 소개를 받은 정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강연은 예정된 시간에 시작되었다.

별것 아닌 장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날 강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는 꽤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우리는 여러 행사장에서 비슷한 풍경을 자주 본다. 정치인이 참석하면 사회자의 소개가 이어지고 축사가 시작된다. 한 사람의 인사말은 길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명이 차례로 마이크를 잡으면 30분은 금세 지나가고, 길게는 한 시간 가까이 소요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강연을 듣기 위해 시간을 내어 찾아왔지만 정작 강연은 뒤로 밀리고 정치인의 말이 먼저 시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더 이상한 장면도 있다. 인사말과 축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단체 사진부터 찍는 경우다. 원래라면 모든 일정이 끝난 뒤 참석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행사가 마치기 전에 자리를 떠나야 하는 정치인들의 일정에 맞춰 사진 촬영을 먼저 진행하는 것이다. 시민들은 아직 행사의 핵심 내용도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기념사진 속 배경이 되어 서 있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때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 행사는 시민들을 위한 행사일까. 아니면 정치인들의 활동 기록을 위한 행사일까.

시민들은 좋은 강연을 듣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시간을 내어 참석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행사장의 흐름은 시민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일정에 맞춰 움직인다. 단체 사진 속 배경이 되기 위해 온 것은 아닌데도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홍보 사진 한 장을 위해 자리에 서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행사가 끝난 뒤의 모습은 더욱 아쉽다.

행사장 앞쪽에 그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들은 이미 텅 비어 있다. 기념사진 촬영과 축사를 마친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나는 모습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다음 일정이 있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시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강연을 듣고 있는데, 시민들과 함께하겠다고 말했던 사람들은 정작 그 자리에 없다. 그래서 그날 만난 정치인의 모습은 더욱 인상 깊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간을 요구하지 않았다. 소개를 받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객석을 향해 목례만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별도의 축사도 없었고, 행사의 흐름을 바꾸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행사 내내 시민들과 같은 자리에서 강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강사님의 좋은 강의가 오롯이 주어진 시간을 모두 사용해 진행되었다. 참석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연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누구의 인사말 때문에 시간이 줄어드는 일도 없었다. 누군가를 위한 기념 촬영 때문에 흐름이 끊기는 일도 없었다.

행사가 끝난 뒤 함께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의외로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강연을 제대로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정치인들이 오지 않아 강사의 강연을 더 깊이 있게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사람들이 원한 것은 정치인이 없는 행사가 아니었다. 시민보다 앞에 서려는 정치인이 없는 행사였다. 정치인은 시민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시민이 만들어 준 자리에서 시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시민과 함께한다는 것은 무대 위에서 오래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시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말에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날 그 정치인은 가벼운 목례로만 인사를 나누었고 시민들과 함께 객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민의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었다. 어쩌면 정치의 품격은 화려한 연설이나 거창한 구호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을 앞세우지 않고 시민의 시간을 먼저 생각하는 작은 행동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바라는 정치 역시 그런 모습 아닐까. 시민들 앞에 서기보다 시민들 곁에 앉아 함께 듣고, 함께 배우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정치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