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현에서 마포까지 빼곡...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이영천 2026. 6. 2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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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기억을 찾아서] 생존을 지켜낸 터전의 흔적... 판잣집이 주인공이었던 청계천의 옛 풍경

강을 펴고 땅을 다지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서울. 그 이면에 쌓인 시간과 욕망의 변주곡을 따라 잊힌 '서울의 기억'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청계천 탄생은 다분히 인위적이다. 분지에 도성을 조성하면서, 한가운데로 흐르던 작은 물길을 더 넓고 깊게 파냈다. 그래서 개천(開川, 청계천)이라 불렀다. 도성 위생과 치안의 핵심이었고, 장마철마다 범람하기 일쑤니 꾸준한 관리 대상이었다. 지난 18일, 이곳 청계천 일대를 다녀왔다.

초기 세종 때까진 치수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친다. 그러다 오래 방치한다. 흙이 쌓여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른다. 영조가 준설 한다. 이때 파낸 흙을 오간수문 근처에 쌓아둔다. 가산(假山)이라 불렀으니, 얼마나 많은 흙을 파냈는지 짐작이 간다. 양안은 돌 축대를 쌓아 물길을 편다.

준설로 문제가 해결되나, 동시에 부작용도 생겨난다. 쌓인 흙은 악취는 물론 비옥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했다. 비가 내리면 다시 개천으로 흘러들었다. 그 가산이 일제강점기 때 흙 쌓는 토사로 반출되어 사라진다.
▲ 광장시장 종로 5가 인근, 지금은 외국인 필수 관광지가 된 광장시장. 남대문 일대 상권을 장악한 일본 상인에 맞서, 1905년 조선 상인들이 설립한 전통시장이다.
ⓒ 이영천
망국은 곧 개천의 방치였다. 개천 양안은 홍수 염려로 빈 땅이 많았다. 그 땅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시장으로 변모한다. 광장·방산시장이 대표적이다. 개천 복개 시작과 더불어 해방을 맞는다. 해방 이후 개천을 급격히 잠식한 판잣집은 결코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다. 이로써 감당키 어려울 만큼 슬럼화 하였다. 관성의 가속화였고, 오래 누적된 도시 문제의 직접적 표출이었다.

낮은 곳으로

해방 후 서울은 수도라는 이름만 남은 껍데기 다름 아니었다. 국정은 미군정 손아귀에 있었고, 주택은 일제 말기 공습과 파괴로 급격히 멸실 된 뒤였다. 그러나 인구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급속도로 늘어났다.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갔던 이들이 돌아온다. 식량은 바닥을 긁어댔다. 곤궁의 일상이다. 굶어 죽지 못해 상경한 농촌 인구 또한 엄청났다. 문제는 이들이 먹고 잘 합법적 공간도, 그럴만한 행정력도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념 대립이 오히려 이런 문제를 앞서 나갔다.

기존 주거지는 포화 상태다. 이름마저 살벌한 적산(敵産)가옥은 죄다 친일파 차지다. 일제로부터 놓여난 토지 소유 관계는 난마처럼 얽혀 있었다. 사유지가 높고 거친 울타리로 막힌다. 서울로 몰려든 이들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국가 소유 땅으로 자연스레 휘몰렸다.
▲ 판잣집 모형 청계천박물관 안에 모형과 그림으로 재현해 놓은 청계천 판잣집. 실제보다 더 정갈해 보인다.
ⓒ 이영천
이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 개천이었다. 사유지가 아니었고 경계도 모호했으며, 상시 거주를 전제로 한 점유 공간도 아니었기에 감시 눈초리도 덜했다. 무엇보다 소유권으로부터 내몰림이 없었다. 먼저 찾아 들어 점용하면 그만이었다.

범람하는 홍수는 연례 행사였고, 온갖 쓰레기와 하수는 일상이었다. 악취는 물론 전염병 감염 위험에 내놓였지만, 그만큼 불안정한 안온함도 드물었다. 그 불안정이 정착의 제1요소였다. 행정 통제는 느슨했고, 둔치는 비어 있었다. 무엇보다 당장 철거될 위험이 낮았다. 사람들은 계획 없이 집을 지어댔다. 미군 군수품 상자, 함석, 포대, 철사로 엮은 구조물이 개천을 따라 잡초처럼 자라났다.

한강보다 개천이 서울의 상징이던 시대였다. 개천 둑길을 따라 생존 띠와 경로가 길게 형성되었다. 가장 낮은 곳이 가장 쉽게 닿을 수 있는 땅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낮은 곳으로 몰려들었다.
▲ 청계천 판잣집 청계천박물관 앞 청계천에 재현해 놓은 판잣집. 당시 판잣집보다 훨씬 더 정갈하고, 튼튼하게 재현 되었다.
ⓒ 이영천
높은 곳으론 가기도 힘들었고 가도 가장 먼저 단속의 표적이 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개천은 선택지가 아니라 남아 있던 유일한 여지(餘地)임이 분명했다. 당시 서울이란 공간은 남산·낙산·북악산·인왕산이라는 내사산(內四山) 안쪽에 한정하여 인식되었다.

개천이 생산과 소비라는 도시 활동의 중심 무대였다. 무단으로 정착했기에 수평적 확장보다는 수직적 하강이 수월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위험과 핍박을 각오 하고서라도, 개천 둔치로 내려가야만 했다.

전쟁이 만든 과잉

한국전쟁은 비극이었다. 몸과 마음의 상처 뿐만 아니라, 극한 생존으로 내몰렸다. 전쟁을 치르며 서울을 비웠다 다시 오기를 반복했다. 포화에 그나마 온전한 집마저 드물었다. 피난에서 돌아왔어도, 번지수만 남은 빈 땅 밖에 없었다.
▲ 청계천 판자촌(1950~1960년대) 동대문 인근으로 추정되는 청계천의 판자촌. 얇은 나무기둥이 촘촘히 박혔으나,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사진 오른쪽 끝에 복개 중인 구조물이 보인다.
ⓒ 서울역사박물관
집이 없다는 사실이 엄혹한 현실로 다가 들었다. 비는 피할 수 있을까, 오늘 밤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가 당면한 기준이었다. 그랬으니 목구멍으로 넘길 끼니나 챙길 수 있었겠는가? 얼기설기 얽은 판잣집이 대궐 대접을 받는다. 불법이지만, 그게 일상이었다. 단속은 사치였다. 판잣집은 계획된 주거가 될 수 없었다. 철거 당해도 언제건 다시 지을 수 있는 허깨비였다.
그래서 더 빠르게 늘어났다. 하루면 지을 수 있고, 무너지면 곧장 다시 세울 수 있었다. 해방 후에 점용 되었던 개천이 다시 콩나물시루처럼 북적거린다. 둔치에 나무 기둥이 제방 높이로 박힌다. 하천으로 내민 바닥이 나무판으로 깔린다. 흘러든 하수가 생활의 부분으로 들어온다. 층층이 나무 기둥이 높아져 위로 올라가기 바쁘다.
▲ 판자촌(노무라 모토유키 사진) 청계천 하류로 추정되는 판자촌. 홍수와 전염병, 오염된 물이 일상으로 깊이 파고든 임시적 안온함이 사진에서 엿보인다.
ⓒ 서울역사박물관
하수와 식수, 놀이와 노동이 구분 없이 뒤섞인다. 뒤죽박죽이다. 악취와 부패가 삶이었고, 위험은 일상이었다. 아이들은 구정물에서 놀았고, 어른들은 그 물을 건너 생계를 구걸했다. 일자리는 도심에 있었고, 시장은 가까웠다. 희박하나마 일할 기회가 있었고, 이동에 요구되는 교통 비용 걱정은 없었다.

개천이 빈민을 끌어들인 건 아니었다. 급박한 삶의 절벽에 내몰린 이들을 그나마 받아 안은 마지막 완충지대요, 점이 지대였을 뿐이다. 개천 판잣집은 단순한 주거가 아니라 사회 계급의 표식이었다. 언제 철거될지 모른다는 현실이 제1의 거주 요건이었고, 임시가 영구로 굳어져 갔다.

고착된 풍경

국가는 이곳을 어찌 바라보았을까. 위생·치안·화재가 동시에 지적되었을 것이다. 큰 불이나 불이라도 나면 엄청난 희생이 명확했다. 대책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방치했다.
▲ 판잣집 철거(1962년) 철거 당하는 청계천 판잣집. 1962년의 풍경이다.
ⓒ 이영천(청계천박물관_촬영)
무엇보다 차분하고 순차적인 이주가 이뤄져야 했다. 이는 계획적인 이주라는 대안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능력도 생각도 없었다. 대안 없는 행정은 유예로 이어졌고, 유예의 시간은 수십 년간 누적되었다.
그러는 사이 개천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인구로 꽉 찬 완충지대로 변해간다. 불결했고, 위험했으나 오히려 하나의 풍경이었다. 이곳이 무너지면 서울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사는 곳'으로 굳혀졌다.
▲ 청계천 하류 판자촌(노무라 모토유키 사진) 현 청계천박물관 인근 용두동 부근의 슬럼화 한 판자촌.
ⓒ 서울역사박물관
개천을 중심으로 작동하던 서울의 최대 이슈였다. 생존 동선, 노동의 경로, 빈곤의 집적이 모두 개천을 기준으로 형성되었다. 판잣집은 도시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지만, 동시에 그 실패를 흡수함으로써 도시가 근근이 유지해가는 버팀목이기도 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어도 서울로 유입 하는 인구는 줄어들지 않았다.

1963년 소설가 이호철은 "서울은 만원이다"라고 외친다. 1959년 200만 명이 불과 4년 만인 1963년에 300만 명이 되었다. 증가 속도나 규모로 보아 가히 서울은 만원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서울 인구가 300만에서 멈췄다면, 지금 얼마나 쾌적한 도시일까?

그러나 당시는 아니었다. 공간 제약은 물론 행정 및 자본 한계에 직면해 있었다. 이젠 개천 뿐만 아니라 높은 산꼭대기까지, 송곳 하나만 꽂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판잣집을 지어대기 바빴다. 도성 안은 물론이고 동쪽 동대문 밖으로, 서쪽 아현동과 마포 쪽을 가리지 않았다.
▲ 오간수교(1965년) 복개하려는 교각이 촘촘하게 박힌 개천과 양 옆으로 아직 허술한 판잣집이 잡초처럼 무성하다. 멀리 왼쪽으로 보이는 교회가 동신교회다. 따라서 사진은 오간수교의 하류 쪽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 오간수교(2026년) 오간수교에서 개천 하류 쪽으로, 현재 모습이다.
ⓒ 이영천
이후에 복개와 철거로 개천 판잣집이 사라지는 과정을 겪는다. 권력에 의해 판잣집이 강제로 다른 땅으로 이주 당한다. 일례로 1971년 '광주 대단지사건'의 많은 주인공이 이곳 개천 판잣집 출신이다.

그로부터 서울의 중심이 한강으로 옮겨간다. 동시에 판잣집 일색이던 개천은, 도로와 고가 아래 묻혀버린다. 어둠이다. 판잣집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 서울 중심은 분명 개천이었다. 여긴 도시의 실패가 응축된 장소이자, 동시에 도시가 생존을 지켜낸 터전이었다.

그런 옛 풍경이 미화될 필요도, 완전히 지워질 이유도 없다. 다만 그것이 서울이 통과한 지나간 현재였다는 사실만은 정확히 기억해야 한다. 관리되지 않는 공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도시. 그 결합이 만들어 낸 풍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개천은 그저 지워진 빈민가로 남을 뿐이다.

기록은 감상이 아니다. 적나라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생각으로 덮이고 유린 당했던 청계천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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