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현에서 마포까지 빼곡...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강을 펴고 땅을 다지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서울. 그 이면에 쌓인 시간과 욕망의 변주곡을 따라 잊힌 '서울의 기억'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청계천 탄생은 다분히 인위적이다. 분지에 도성을 조성하면서, 한가운데로 흐르던 작은 물길을 더 넓고 깊게 파냈다. 그래서 개천(開川, 청계천)이라 불렀다. 도성 위생과 치안의 핵심이었고, 장마철마다 범람하기 일쑤니 꾸준한 관리 대상이었다. 지난 18일, 이곳 청계천 일대를 다녀왔다.
초기 세종 때까진 치수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친다. 그러다 오래 방치한다. 흙이 쌓여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른다. 영조가 준설 한다. 이때 파낸 흙을 오간수문 근처에 쌓아둔다. 가산(假山)이라 불렀으니, 얼마나 많은 흙을 파냈는지 짐작이 간다. 양안은 돌 축대를 쌓아 물길을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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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장시장 종로 5가 인근, 지금은 외국인 필수 관광지가 된 광장시장. 남대문 일대 상권을 장악한 일본 상인에 맞서, 1905년 조선 상인들이 설립한 전통시장이다. |
| ⓒ 이영천 |
낮은 곳으로
해방 후 서울은 수도라는 이름만 남은 껍데기 다름 아니었다. 국정은 미군정 손아귀에 있었고, 주택은 일제 말기 공습과 파괴로 급격히 멸실 된 뒤였다. 그러나 인구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급속도로 늘어났다.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갔던 이들이 돌아온다. 식량은 바닥을 긁어댔다. 곤궁의 일상이다. 굶어 죽지 못해 상경한 농촌 인구 또한 엄청났다. 문제는 이들이 먹고 잘 합법적 공간도, 그럴만한 행정력도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념 대립이 오히려 이런 문제를 앞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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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잣집 모형 청계천박물관 안에 모형과 그림으로 재현해 놓은 청계천 판잣집. 실제보다 더 정갈해 보인다. |
| ⓒ 이영천 |
범람하는 홍수는 연례 행사였고, 온갖 쓰레기와 하수는 일상이었다. 악취는 물론 전염병 감염 위험에 내놓였지만, 그만큼 불안정한 안온함도 드물었다. 그 불안정이 정착의 제1요소였다. 행정 통제는 느슨했고, 둔치는 비어 있었다. 무엇보다 당장 철거될 위험이 낮았다. 사람들은 계획 없이 집을 지어댔다. 미군 군수품 상자, 함석, 포대, 철사로 엮은 구조물이 개천을 따라 잡초처럼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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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계천 판잣집 청계천박물관 앞 청계천에 재현해 놓은 판잣집. 당시 판잣집보다 훨씬 더 정갈하고, 튼튼하게 재현 되었다. |
| ⓒ 이영천 |
개천이 생산과 소비라는 도시 활동의 중심 무대였다. 무단으로 정착했기에 수평적 확장보다는 수직적 하강이 수월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위험과 핍박을 각오 하고서라도, 개천 둔치로 내려가야만 했다.
전쟁이 만든 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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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계천 판자촌(1950~1960년대) 동대문 인근으로 추정되는 청계천의 판자촌. 얇은 나무기둥이 촘촘히 박혔으나,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사진 오른쪽 끝에 복개 중인 구조물이 보인다. |
| ⓒ 서울역사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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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자촌(노무라 모토유키 사진) 청계천 하류로 추정되는 판자촌. 홍수와 전염병, 오염된 물이 일상으로 깊이 파고든 임시적 안온함이 사진에서 엿보인다. |
| ⓒ 서울역사박물관 |
개천이 빈민을 끌어들인 건 아니었다. 급박한 삶의 절벽에 내몰린 이들을 그나마 받아 안은 마지막 완충지대요, 점이 지대였을 뿐이다. 개천 판잣집은 단순한 주거가 아니라 사회 계급의 표식이었다. 언제 철거될지 모른다는 현실이 제1의 거주 요건이었고, 임시가 영구로 굳어져 갔다.
고착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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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잣집 철거(1962년) 철거 당하는 청계천 판잣집. 1962년의 풍경이다. |
| ⓒ 이영천(청계천박물관_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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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계천 하류 판자촌(노무라 모토유키 사진) 현 청계천박물관 인근 용두동 부근의 슬럼화 한 판자촌. |
| ⓒ 서울역사박물관 |
1963년 소설가 이호철은 "서울은 만원이다"라고 외친다. 1959년 200만 명이 불과 4년 만인 1963년에 300만 명이 되었다. 증가 속도나 규모로 보아 가히 서울은 만원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서울 인구가 300만에서 멈췄다면, 지금 얼마나 쾌적한 도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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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간수교(1965년) 복개하려는 교각이 촘촘하게 박힌 개천과 양 옆으로 아직 허술한 판잣집이 잡초처럼 무성하다. 멀리 왼쪽으로 보이는 교회가 동신교회다. 따라서 사진은 오간수교의 하류 쪽 모습이다. |
| ⓒ 서울역사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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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간수교(2026년) 오간수교에서 개천 하류 쪽으로, 현재 모습이다. |
| ⓒ 이영천 |
그로부터 서울의 중심이 한강으로 옮겨간다. 동시에 판잣집 일색이던 개천은, 도로와 고가 아래 묻혀버린다. 어둠이다. 판잣집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 서울 중심은 분명 개천이었다. 여긴 도시의 실패가 응축된 장소이자, 동시에 도시가 생존을 지켜낸 터전이었다.
그런 옛 풍경이 미화될 필요도, 완전히 지워질 이유도 없다. 다만 그것이 서울이 통과한 지나간 현재였다는 사실만은 정확히 기억해야 한다. 관리되지 않는 공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도시. 그 결합이 만들어 낸 풍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개천은 그저 지워진 빈민가로 남을 뿐이다.
기록은 감상이 아니다. 적나라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생각으로 덮이고 유린 당했던 청계천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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