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저출산 심각한 스위스, '인구상한제' 고개 든 이유
외국인 숫자 급증에 주민 불안감
유럽 전역에 퍼지는 반이민정서

스위스에서 최근 세계 최초로 '인구상한제' 국민투표가 실시돼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출산율이 1명대로 내려앉은지 50년 이상 지난 극심한 저출산 국가인 스위스에서 인구 수를 제한해야한다는 법안이 나오면서 큰 화제였다. 이번 국민투표는 스위스 우파 정당을 중심으로 이민자 유입을 막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부결되긴 했지만 찬성률이 45%로 예상보다 높게 나오면서 향후 국민투표 시도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스위스 뿐만 아니라 서구권 전역에서 불고 있는 반이민정서 확산을 타고 이민자 숫자 제한 법안이 더 많이 나올 것으로 관측한다.
스위스, 세계 최초 '인구상한제' 국민투표 부결
스위스에서 지난 14일(현지시간) 실시됐던 인구상한제 국민투표는 찬성 45.21%, 반대 54.79%로 부결됐다. 투표율은 58.86%를 기록했다. 스위스의 인구상한제는 2050년까지 외국인을 포함한 스위스 내 인구 상한을 1000만명으로 둔다는 법안이다. 인구가 950만명을 넘어설 때부터 ▲이민 규제강화 ▲외국인 거주자의 가족 입국거부 ▲유럽연합(EU)과 체결한 국경개방협정인 솅겐조약의 파기 등을 실시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현지 매체인 스위스인포에 따르면 이번 국민투표를 주도한 것은 스위스 원내 1당인 스위스국민당(SVP)이다. 우파 정당인 SVP는 외국인 이민자들이 계속 스위스에 들어오면서 각종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이로 인해 이주민 제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SVP 내부에서는 이번 국민투표의 패인을 분석 중이며, 향후에도 계속 국민투표를 시도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스위스에서는 시민 10만명 이상의 서명만 받으면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앞서 SVP는 그동안 줄기차게 이민제한 및 반이민정서와 관련된 법안들을 국민투표로 올렸다. 2009년에는 스위스 내 이슬람 사원 첨탑인 미나렛 건설금지안을 국민투표로 제안해 가결시켰고, 2021년에는 이슬람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는데 쓰는 히잡과 부르카 착용을 공공장소에서 금지하는 법안도 국민투표로 올려 통과시킨 바 있다.
SVP는 이번 투표에선 노골적으로 반이민정서를 건드리는 대신 이민자 급증으로 인한 출근길 지하철 혼잡, 주택가격 급등과 같은 스위스 서민들의 고충을 부각했다. 이로 인해 외국인 비율이 적은 지방 농촌지역들에서는 인구상한제 찬성비율이 60%대를 넘기도 했다. 우파 보수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들까지 참여하면서 투표율은 58%를 넘어섰다.
출산율은 급감, 이민자는 급증…외국인이 30% 넘어
스위스 내 외국인 거주자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면서 반이민 정서도 함께 커지고 있다. 출산율이 이미 1970년대부터 1명대로 내려앉은 상황에서 외국인 거주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우파 정당들은 국가 정체성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독일 공영방송인 도이치벨레(DW)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스위스 인구는 약 910만명으로 추산되며, 이중 외국인 거주자의 비중은 30% 정도로 집계됐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스위스로 유입된 외국인 거주자만 200만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내에서 스위스의 외국인 거주자 비율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알려졌다. 독일(19.1%) 영국(15.2%), 프랑스(10.3%) 등 다른 유럽국가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높다.
이로 인해 인구는 늘어나는데 출산율은 꾸준히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은행(WB)과 유럽통계청(Eurostat) 집계에 따르면 스위스의 합계출산율은 1975년 1.87명을 기록해 2.0명대가 깨진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지난해에는 1.30명까지 줄어들었다.
영국 BBC는 "스위스는 단기간에 이민자가 급증하면서 임대료 급등과 과도한 개발정책, 대중교통 혼잡, 의료비 급증 등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했다"며 "청년계층의 실업난까지 더해지며 스위스 우파 뿐만 아니라 국민 상당수가 문제의 원인을 이주민들에게 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브렉시트같은 경제위축 우려…정부서도 반대운동
스위스 정부와 기업들은 인구상한제를 결사반대하고 있다. 특히 이민자 제한을 위해 EU와 솅겐조약이 폐기될 경우,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때와 마찬가지로 급격한 경제적 혼란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스위스 정부는 국민투표 시작 전부터 경제 충격에 대해 경고하며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스위스 정부는 국민투표 전인 13일 성명을 통해 "인구상한제가 국가 안정성을 해치고 경제 성장과 번영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구상한제가 부결된 것에도 곧바로 환영 입장을 밝혔다. 인구상한제가 부결되자 베아트 얀스 스위스 법무장관은 "안정성과 개방성, 신뢰성의 신호"라고 환영입장을 밝혔다.
스위스 최대 경제단체인 이코노미스위스도 반대입장을 밝혔다. 스위스의 노령인구가 이미 20%를 넘어선 상황이며 저출산이 심화되는 단계에서 이민자를 제한할 경우,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루돌프 민슈 이코노미스위스 수석 전문가는 "인구 상한제는 복잡한 구조적 문제를 인위적인 숫자 제한으로 해결하려는 포퓰리즘적 접근"이라며 "이 정책은 손쉬운 해결책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줄 뿐 본질적인 주택 부족이나 교통 혼잡 문제를 해소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국인 노동자 의존도가 높은 제약·금융·기술 산업, 호텔업과 의료 분야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스위스의 글로벌 기업인 네슬레, 로슈, UBS 등도 국민투표 전 성명을 통해 "인구상한제가 경제 경쟁력을 약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 이번 국민투표에서도 스위스 내 대기업들이 집중돼있는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의 인구상한제 반대비율은 84%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 전역에 확산되는 반이민정서
스위스의 인구상한제 논란을 촉발한 반이민정서는 서구권 국가 대부분으로 확산되고 있다. 캐나다와 독일처럼 적극적으로 이민을 받던 나라에서도 반이민정서가 커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최근 캐나다는 주택난 심화를 이유로 반이민정서가 확대되자 최근 유학생 유치 한도 및 외국인 노동자 취업 허가수를 기존보다 절반 이상 감축했다. 독일도 국경검사를 재개하고 추방절차를 강화하고 있으며, 영국은 이민자 숫자를 최근 3년 동안 80% 이상 감소시켰다.
유럽연합(EU)도 최근 이민자 추방 규정을 신설했다. CNN에 따르면 EU집행위원회는 이달 초 이민자 규정을 새로 개정해 망명신청을 거부당하거나 출국 명령을 받은 이민자들을 임의로 정한 제3국으로 추방할 수 있도록 회원국들과 합의했다. EU 당국의 송환절차에 불응하는 이민자는 복지 혜택 및 취업 허가 박탈, 과태료, 입국금지 등 조치를 취하고 벌금형이나 징역형 등 형사 처벌도 받을 수 있다고 EU는 밝혔다.
서구권 국가들 전반에 반이민 기류가 강해지고 있는 것은 이민자 유입을 늘렸음에도 경제난이 크게 해소되진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WSJ는 지적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호주와 캐나다, 독일, 영국 등의 경제생산량 지표들은 2017년 이후 계속 정체상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 국가들이 코로나19 사태 전후 막대한 이민자를 받아들였음에도 경제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진 않은 것이다.
앨런 매닝 런던 정치경제대학(LSE) 교수는 WSJ에 "이민 확대는 고령화 문제에 대처할 시간은 벌어다 주지만 그렇다고 이민을 늘리는 게 경제 개선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순 없다"며 "이민이 국가경제에 단기적으로 끼치는 영향은 인구의 증가 뿐이며, 인구만 늘어난다고 경제에 좋다고 바라보는 경제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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