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점보다 뼈아팠던 건 우리의 시선

손동준 2026. 6. 20.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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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동준 기자의 교회아재]
[사포판(멕시코)=뉴시스] 김명년 기자 = 18일(현지 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대한민국과 멕시코의 경기, 패배한 한국 축구대표팀이 아쉬워 하고 있다. 한국은 멕시코에 0-1로 패했다.


축구팬들은 대체로 기억력이 나쁘다. 패배한 경기에 대해서는 화려한 선방도 기막힌 패스 차단도 쉽게 잊는다. 경기 내내 몸을 날려 팀을 구한 장면보다 단 한 번 공을 놓친 실수가 오래 입에 오른다. 축구는 90분 경기지만 사람들은 대개 몇 초짜리 영상으로 경기를 기억하고 규정한다.

한국에서 월드컵은 특별히 더 잔인하다. 실수는 박제되고 박제된 장면은 4년마다 반복 재생된다. 이제야 웃으며 자신의 실수를 웃음 소재로 삼는 레전드들의 모습은 그래서 이따금 애잔하다. 기술의 발전은 그 잔인함의 깊이를 더한다. 한 장면을 여러 각도로 돌려보고 느리게 늘려보고 화면을 확대해 감식하듯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다. 화면은 지나치게 친절하고 전 국민은 순식간에 축구 전문가가 된다.

그러나 한 경기를 단 하나의 장면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메시도 공을 빼앗기고 월드컵 우승팀도 90분 내내 완벽한 경기를 펼치지는 못한다. 프랑스 축구의 전설 미셸 플라티니의 말처럼 축구는 본질적으로 실수의 스포츠다. 모든 선수가 완벽하다면 스코어는 영원히 0대 0일 것이다. 축구는 실수하지 않는 기계들이 하는 스포츠가 아니라, 실수한 이후에도 기어이 다시 뛰어가는 사람들이 하는 스포츠다.

관중석은 팬들의 자리인 동시에 선수들을 가장 쉽게 평가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관중석에서 볼 때는 모든 것이 명쾌하고 쉬워 보인다. 왜 거기서 패스했는지, 왜 수비 위치를 그렇게 잡았는지 전지적 시점에서 정답을 쏟아낸다. 뛰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이 더 확신에 차 있다. 오래전 한 국가대표 선수가 온라인에 남겼던 “답답하면 직접 뛰라”는 글은 표현은 투박했으나 날이 갈수록 선명하게 다가온다. 관중석의 분노와 그라운드의 현실 사이에는 분명 아득한 거리가 있다.

축구 이야기만 하려는 건 아니다. 가만 보면 우리는 사람도, 신앙도 하이라이트 자르듯 본다. 그 사람이 왜 거기까지 갔는지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지는 생략한 채 눈에 보이는 한 장면만으로 평점을 매긴다. 하이라이트에 익숙한 나머지 타인의 풀 경기를 기다려줄 인내심은 바닥난 것 같다.

신앙도 관중석에서 보면 간단해 보인다. 사랑, 용서, 낮아짐 같은 거룩한 명제들은 입안에서만 맴돌 때 가장 완벽하다. 입으로는 누구나 명장이 된다. 그러나 막상 현실이라는 그라운드에 내려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모욕 앞에서 용서하고 손해를 감수하며 정직을 택하는 일은 결코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진짜 그 길을 걸어본 이들은 남의 실패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한다. 조심스럽게 오래 듣고 천천히 판단한다.

‘게겐 프레싱’은 공을 잃은 순간 곧바로 달려들어 다시 빼앗는 현대 축구의 전술이다. 분명 축구 용어인데, 인터넷 게시판을 보다 보면 이 압박 전술이 축구보다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누군가 실수하면 사실관계를 확인하기도 전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낙인을 찍는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며 더 거칠고 가혹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말한 성령의 열매는 다르다. 사랑과 화평, 오래 참음과 절제에는 전체를 보는 기다림이 있다. 정죄보다 인내가 있고 즉각적인 흥분보다 절제가 있다. 최근 한국교회의 목소리가 사랑보다 공의 쪽으로 기울어 보이는 장면을 자주 마주한다. 사랑을 잃은 공의는 쉽게 분노가 되고 절제를 잃은 분노는 쉽게 정죄가 된다. 내가 외치는 공의가 정말 하나님의 공의인지, 아니면 내 사적인 분노에 성경 구절을 급하게 이어 붙인 위선인지 따져볼 일이다. 남의 잘못에는 현미경을 대면서 내 교만과 위선은 슬쩍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가.

메시도 오랫동안 자국 대표팀에서는 부족한 선수처럼 평가받았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월드컵과 코파아메리카 결승 패배를 반복했고, 2016년 코파아메리카 결승 승부차기 실축 뒤에는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월드컵 트로피를 들고 나자 과거의 실패들은 비로소 인내의 서사로 다시 읽혔다. 사람의 평가는 이토록 유동적이다. 달라진 것은 메시가 아니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인생도 신앙도 하이라이트로 완성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보잘것없는 패스 미스, 실패한 돌파, 그리고 흙을 털며 다시 뛰어 들어가는 지난한 발걸음들로 채워진다. 한 번의 실패, 한 번의 실수만으로 사람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관중은 하이라이트를 보지만, 하나님은 풀 경기를 보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진 그 5초만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 사람이 견뎌온 시간과 싸워온 과정,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선 순간까지 90분 전체를 함께 보신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분노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 아닐까. 한 번의 실수보다 더 두려운 것은 단 한 장면으로 사람 전체를 규정해버리는 우리의 잔인한 습관이다. 어쩌면 하나님이 가장 먼저 고치고 싶어 하시는 것은 넘어진 이의 실수가 아니라, 한 장면만 보며 돌을 쥐고 있는 관중석의 우리 시선일지도 모른다.

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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