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안정환 “나도 2002년 이민갈 뻔…다시 왕 되면 된다”

박린 2026. 6. 1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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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현지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멕시코전에서 패한 후 김승규 골키퍼가 선수를 다독이고 있다. 강정현 기자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2002년 이탈리아전 역전 골든골)의 주인공 안정환이 북중미 월드컵에서도 중앙일보에 관전평을 싣는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부터 본지와 인연을 맺은 안정환의 시선은 국내 축구 분석 중 가장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리오넬 메시의 아르헨티나 우승 예측이 그 예 중 하나다. 이번 관전평의 제목은 〈안정환의 ‘데킬라 샷’〉이다.

아쉽고 또 아쉽다. 경기 직전, 같은조 체코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비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승부만 거둬도 32강행 확률이 매우 높아지는 한국과 멕시코의 맞대결. 전반전은 내가 지금까지 본 월드컵 중 가장 조심스러운 경기 중 하나였다. 둘 다 가드를 올리고 섀도 복싱하는 듯 했다.

찾아보니 멕시코는 월드컵에서 전반에 13경기 연속 실점이 없는 기록을 이어갔다. 전반이 끝난 뒤 멕시코 팬들이 자국 선수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는데, 역설적으로 한국축구가 그만큼 잘했다는 방증이다.

다만 우리 선수들은 멕시코가 1차전 상대 체코와 다르다는 걸 느꼈을 거다. 체코와 달리 멕시코는 볼에 대한 접근 속도가 빨랐다. 우리는 측면에서 흔들렸다. 활동량이 좋은 왼쪽 풀백 헤수스 가야르도와 오른쪽 윙어 로베르토 알바르도를 제어하지 못했다. 미드필더 싸움도 아쉬웠다. 체코전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쳤던 황인범이 오늘은 잘 안 보였다.

18일 오후 (현지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 멕시코전에서 이강인이 드리블고 있다. 강정현 기자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이강인을 지도했던 옛스승 답게 하비에르 아기레 멕시코 감독의 전술은 영리했다. 에리크 리라와 태클이 좋은 루이스 로모로 전담마크처럼 붙였다. 이강인은 파이널 서드(축구장 3등분 시 상대 골문 근처 지역)에서 위협적인 선수인데, 프리롤 임무를 부여 받았는데도 자꾸 밑으로 내려와 공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경기 중 둘이 나눈 대화가 궁금했는데, 아기레 감독이 이강인에게 “한 대 쥐어 박고 싶다. 머리 염색한 게 그게 뭐냐”고 했다더라.

스리백은 전체적으로 괜찮았다. 비록 라울 히메네스에 뒷 공간을 한 번 허용하기는 했지만, 축구에서 단 한번의 기회도 내주지 않을 수 없다.

18일 오후 (현지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 멕시코전에서 선제골을 허용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그러나 후반 5분 공중볼을 잡은 골키퍼 김승규가 수비수 이기혁 위로 떨어지면서 공을 놓쳤고, 로모에게 빈 골대에 슈팅을 허용했다. 콜 플레이 미스인지, 자리를 잘 못잡았는지는 차치하자. 이건 누구 한 사람의 실수가 아니라 팀의 실수다.

후배들을 위해 변명하자면, 화산 분화구를 모티브로 지어진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은 멕시코 팬들의 함성으로 폭발할 듯했다. 4만명이 넘는 관중들의 소음은 최고 149(dB)까지 치솟았다. 근거리의 총소리나 군용기 이륙 소음과 맞먹는 수준이다.

김승규는 비록 한 골을 내줬지만, 두 골을 막아냈다. 체코전에서 ‘갓승규’라 불렸지만, 이게 축구 선수의 운명이다. 하루아침에 ‘왕’이 됐다가도 다음 날 ‘거지’가 될 수 있는 게 축구다. 괜찮다. 다음 경기 때 다시 왕이 되면 된다. 나도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 페널티킥을 실축해서 이민 가야 되나 생각이 들었지만 역전골을 넣지 않았나.

18일 오후 (현지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 멕시코전에서 손흥민이 아쉬워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손흥민은 오늘 한 시간(60분)을 다 채우지 못하고 교체 아웃됐다. 결과론적이지만 퇴장 징계로 결장한 세사르 몬테스가 나오는 게 나을 뻔했다. 에드손 알바레스는 노련하더라. 오늘 손흥민이 못한 게 결코 아니다. 전반 16분 침투해 골키퍼를 넘기는 슛을 상대가 오버헤드킥으로 간신히 걷어냈는데, 오프사이드였지만 위협적이었다. 손흥민은 체코전에 희생형 스트라이커였는데, 나보고 그렇게 뛰라고 했다면 힘들어서 발밑으로 공을 달라고 소리 쳤을 거다.

우리는, 대한민국은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에게 기대를 건다. 상대 팀 역시 이 사실을 너무 잘 안다. 체코전에 우리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건 황인범, 오현규 같은 다른 선수들이 골을 넣고 팀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개인이 살아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팀이 살아나야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도 팀이 골고루 살아나 (4강이라는) 성적이 난 거다.

흔히 사람들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를 비교한다. 메시 개인이 살아나는 건 팀이 잘 받쳐주기 때문이다. 반면 호날두는 홀로 겉도는 느낌이다. 손흥민도, 이강인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손흥민이 슛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한국축구를 짊어진 부담감이 어느 정도냐고 묻는다면, 나는 “매일 악몽을 꾸는 기분”이라고 답하고 싶다. 팀을 떠나 5천만 국민이 모두 지켜보고 기대를 걸기 때문이다. 매일이 불안하고 멘탈을 잡기 힘들다.

아직 대회가 끝나지 않았다. 손흥민이 잘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한방을 기다리고 있다. AI(인공지능)가 아닌 이상 어떻게 매 경기 잘할 수 있겠는가.

손흥민이 나와 (박)지성이 보유한 한국인 월드컵 최다골(3골) 기록을 넘어줬으면 한다. 내 기록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세월이 지나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개인 기록보다는 우리 대표팀 성적이 훨씬 더 중요하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2골을 넣었던 조규성도 오늘 한 골을 넣었다면 동률이 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그래도 이강인과의 호흡, 위치 선정은 우리가 가진 강력한 공격 옵션이라는 것을 재입증했다.

18일 오후 (현지시간) 멕시코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 멕시코전에서 홍명보 감독이 작전지시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홍명보 감독과 아기레 감독의 전략 싸움은 50대50 호각세였다고 본다. 후반에 윙백 엄지성을 넣고, 스트라이커를 추가 투입한 건 괜찮았다. 경기 내용만 놓고 보면 승점 1점을 가져가는 게 공평한 결과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축구란 건 이런 거다. 약간의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다.

김민재의 말처럼 이제 앞을 봐야 한다. 오늘 결과를 두고 비판하고 싶다면, 대회가 다 끝나고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선수들에 힘을 실어줄 때다.

앞서 열린 우리조 남아공-체코전도 지켜봤다. 남아공은 멕시코와 개막전에서는 그저 경험을 쌓으러 온 팀처럼 보였는데, 체코전에서 보여준 힘과 스피드는 투박하면서도 장난이 아니더라. 만약 우리가 남아공에 덜미를 잡힌다면 조별리그 통과를 장담할 수 없다.

체코와 1차전전 승리가 테킬라처럼 짜릿했다면, 오늘 패배는 첫 승리의 취기에 너무 일찍 취했던 것 같아 조금 씁쓸한 맛이다. 남아공은 지금 기세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반면, 우리는 패배로 인해 불씨가 조금 죽었다. 남은 일주일 동안 이 불씨를 다시 뜨겁게 태워 살려내야 한다. 4년 전 카타르월드컵 2차전이 끝났을 때보다는 보다는 긍정적이지 않나. 비기거나 이기면 32강 진출이다. 우리는 다시 왕이 될 수 있다.

과달라하라=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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