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덩이를 돈덩이로”…K원전 마법, 1400조 SMR 시장 휩쓴다 [원전심장 다시 뛴다]

‘스르륵, 쿵-’ 묵직한 금속음이 공장 안에 퍼진다. 18일 오전, 경상남도 창원 두산에너빌리티 단조공장에서 섭씨 1000도를 넘긴 쇳덩이가 압축기 아래로 옮겨지자 뜨거운 열기가 작업장 전체로 번졌다. 원자로를 만들기 위해선 불에 달궈진 철강을 두드려 원하는 형상으로 만드는 단조 공정이 필수적이다. 창원 두산에너빌리티 공장에서 만난 이동기 수석은 “모든 공정은 단조에서 시작된다. 쇳덩이가 원전 주기기로 변하기도 하고, 엔진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탈원전 정책 이후 멈추다시피했던 한국 원자력 산업계가 다시 활기를 띄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로 원전의 중요성이 재조명 받으면서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지난 17일 경북 영덕과 부산 기장을 각각 신규 대형 원전 2기 건설 및 소형모듈원자로(SMR) 부지로 선정했다. 대형 원전 2기는 2037~2038년, SMR은 2035년 준공이 목표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한·미 관세협상 이후 한국의 ‘대미 투자 1호 프로젝트’로 원전 협력이 검토되고 있는 것도 업계의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원전 산업은 한 번 무너지면 복원이 쉽지 않은 장치산업이다. 초대형 설비와 숙련 인력, 수백 개 협력사가 맞물려 움직이기 때문이다. 대형 단조 설비가 멈추면 주기기 제작이 흔들리고, 주기기 제작이 끊기면 소재·가공·검사·설계 협력망도 함께 약해진다. 최근 단조·기자재·설계 등 밸류체인 전반에 온기가 도는 것은 원전 생태계 회복의 신호로 읽힌다. 정부는 2030년까지 원전 10기 수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미국 내 AI 데이터센터와 제조업 공장 확대에 따른 전력 부족 우려는 한국 업계엔 기회로 꼽힌다. 대형 원전과 SMR 공급망을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 일본도 노후 원전 재건축을 추진하는 등 일본의 원전 회귀 흐름도 추가 기회다.
김기룡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최근 10년간 원전 시공경험이 있는 국가는 6개국뿐인데, 중국·러시아는 미국 원전사업 참여가 제한적이고 프랑스는 미국 노형(원자로 형태) 시공경험이 없다”며 “한국은 10년간 9건의 실적이 있으며, 미국 노형 시공 경험도 있고 원전 수출실적도 있어 미국 원전산업에 적합한 후보”라고 분석했다.


변화의 또 다른 축은 에너지업계의 ‘게임체인저’로 꼽히는 SMR이다. 기존 대형 원전보다 출력은 작지만, 모듈 형태로 제작해 전력이 필요한 곳에 설치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국내 산업계는 전방위 협력에 나서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SMR 파운드리(위탁생산)업체로, 현대건설은 웨스팅하우스와 대형원전·SMR에서, 홀텍·테라파워와 SMR 건설분야에서 각각 협력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GVH(GE히타치뉴클리어에너지)와 대형원전·SMR, 뉴스케일과 SMR 건설 협력을 하고 있고, DL이앤씨는 엑스에너지와 SMR 사업 협력 중이다.
김기룡 연구원은 “국내 건설사들은 단순 협력수준을 넘어 지분투자, 독점계약, 공동진출 등 다양한 형태로 협력이 구체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혁신형 SMR을 개발 중인 한국수력원자력을 비롯해, SK·HD현대·GS에너지 등이 해외업체와 손잡고 해상 SMR 개발이나 SMR 기자재 공급 등을 추진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SMR 투자 규모가 2050년 누적 9000억 달러(약 1395조원)를 넘을 것으로 본다. 박수용 두산에너빌리티 원자력영업 담당 상무는 “과거 해외 원전시장에서 한국 기업은 가격 경쟁력만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엔 일정 준수 능력과 공급망 안정성 등을 갖춘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식되고 있다”며 “신규 원전은 물론 SMR까지 논의가 확대되며 한국 기업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상준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탈원전으로 침체됐던 원전산업에 최근 일감이 공급되면서 생태계가 회복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며 “국내 원전 생태계가 활성화하기 위해선 정부·기업이 ‘원팀’으로 수출을 향해 나서는 일원화된 국가적 지원 체계가 가장 중요하다. SMR 시장도 아직 주력 노형이 정해지지 않은 초기 단계인 만큼, 민간 기업들이 주도적으로 다양한 협력 모델을 발굴하고 경쟁할 수 있도록 구도를 열어줘야한다”고 말했다.
■ “K원전, 단순 공급자 넘어 美 전략 파트너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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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용 두산에너빌리티 원자력영업 담당 상무는 “한국 원전이 단순 공급자가 아니라 초기 사업 개발 단계부터 공급망 구축을 함께 논의하는 전략적 파트너로 기대받고 있다”며 글로벌 원전 시장에서 한국 원전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1995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에 입사한 박 상무는 국내 신한울 1·2호를 비롯해 아랍에미리트(UAE)의 바라카 원전, 체코 원전 등 굵직한 수주전을 책임져온 인물이다. 박 상무는 “미국과 유럽 현장에서는 전력 수요 증가 속도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AI와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기업들이 24시간 중단 없이 공급되는 고품질 전력을 요구하고 있다”며 AI 데이터센터 확산이 원전 수요를 끌어올리는 핵심으로 꼽았다.
그는 “과거에는 정부나 전력회사가 수요를 이끌었다면, 지금은 빅테크 기업들이 직접 전력 확보에 나서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며 “미국에서는 프로젝트 리스크 관리 능력과 핵심 기자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역량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현장에서 원전 생태계가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진단했다. 박 상무는 “탈원전 시기 수주 공백으로 협력사 가동률 저하와 숙련 인력 이탈이 실제 현장에서 발생했다”며 “신한울 3·4호기 재개와 체코 원전 수주 등으로 회복 국면에 들어섰지만 완전 정상화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형모듈원전(SMR)에 대한 글로벌 업계의 기대감에 대해선 “설계와 인허가, 사업모델, 공급망을 새로 구축해야 하는 초기 산업인만큼, 상용화를 위해선 초도기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두산에너빌리티는 40년 이상 대형 원전 핵심 기자재를 제작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SMR 주요 기자재를 공급하는 ‘SMR 파운드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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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고석현 기자 ko.suk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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