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각·청각으로 느껴 깊이가 다른 성지순례

눈으로 보지 못해도 성지순례는 가능할까. 이 근원적인 의문이 바로 이 책을 펼치게 만든 출발점이었다. 성지순례는 흔히 성경 속 장소를 직접 보고 확인하는 여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 온 그 전제를 조용히 흔든다. 과연 성지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책은 42명의 시각장애인 목회자와 성도들로 구성된 ‘바울의 길 촉각 성지순례팀’의 10박 11일 그리스·튀르키예 순례 기록이다. 그들은 눈으로 보는 대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냄새를 맡으며 성지를 경험한다. 이들의 특별한 여정은 독자들에게 본다는 의미를 새롭게 묻는다.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성지순례를 돌아보게 됐다. 몇 차례 성지를 방문했던 기억 속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눈에만 담아오려 했던가. 풍경을 보고 사진을 찍고 유적지를 둘러보는 데 집중했지만 그곳을 살아낸 믿음의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남기신 흔적을 깊이 묵상하는 데에는 서툴렀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순례자들의 표정이었다. 각자의 어려움과 한계를 안고 떠난 여정이었지만 사진 속 얼굴에는 불편함보다 감사, 두려움보다 기쁨이 더 크게 담겨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시선은 누구보다 선명해 보였다.
특히 마음에 남은 것은 시각장애인 전도사인 딸과 함께 순례길을 걷던 이미정 집사의 이야기였다. 딸은 어느 순간 “엄마, 여기 파도 소리랑 냄새가 겐그리아 항구랑 달라요. 뭔가 가슴이 두근거려요”라고 말했다. 그의 짧은 한마디가 내게 깊은 울림을 줬다. 보지 못한다고 해서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곳을 만나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빚어 가시는 과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가보고 싶어진 곳은 터키 데린쿠유 지하도시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박해와 불안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공동체를 이어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비추는 거울처럼 다가왔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쉽게 낙심하고 흔들리는 내 믿음을 돌아보게 했다.
책의 감동은 시각장애인들이 성지순례를 해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순례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그들은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어쩌면 우리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있었다. 이 책은 성지로 향하는 여행기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시선을 향한 순례기다. 책을 덮고 나면 새로운 여행지를 얻기보다 하나님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된다.

이경희 홈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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