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산책]"저기, 여기, 거기"…한국 개념미술의 질문들
이건용·김용익·김범 등…28명 140여 점 공개
'보는 미술'에서 '생각하는 미술'로의 전환 조명
전시장 바닥에 원 하나가 있다. 1975년 이건용은 백묵으로 원을 그리고, 밖에서 그 중심을 가리키며 "저기"라고 말했다. 원 안으로 들어가서는 "여기"라고 했다. 다시 밖으로 나가 어깨 너머로 원을 가리키며 "거기"라고 했다. 같은 장소는 몸의 위치가 바뀌자 다른 말이 됐다. 미술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19일 개막하는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는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눈으로 보는 미술에서 말하고, 걷고, 재고, 지우고, 다시 묻는 미술로의 이동. 전시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전후까지 한국 현대미술에서 벌어진 이 개념적 전환을 28명 작가의 작품 140여 점과 아카이브로 짚는다. 전시는 10월 11일까지 서울관 6·7전시실과 미술관마당에서 열린다.
18일 언론 공개회에서 전시는 '개념미술'을 쉽게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목부터 빠져나간다.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 괄호 속 "아니"는 부정이라기보다 유보에 가깝다. 한국의 개념미술을 서구 미술사의 한 분류로 곧장 집어넣지 않겠다는 뜻이다. 한국의 작가들은 물질을 지우고 순수한 언어만 남기기보다, 몸과 사물과 장소와 제도를 끝까지 붙들고 개념을 밀어붙였다.
그래서 전시장에는 난해한 이론보다 먼저 몸의 흔적이 보인다. 김용민은 젖은 물걸레를 들고 비틀고 털고 접은 뒤 바닥의 물기를 닦았다. 청소가 아니라 반복 행위의 내면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윤진섭은 음절을 발음하는 얼굴과 물로 쓴 글자의 흔적을 함께 남겼다. 말은 입에서 나오지만, 글자는 몸을 거쳐 바닥에 사라졌다. 행위는 남지 않고, 사진과 문장과 기억이 작품을 대신했다.

이 전시가 흥미로운 건 '개념'이라는 차가운 단어가 의외로 물성이 강하다는 데 있다. 안규철의 '무명 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에는 '예술'과 '삶'이라고 적힌 두 개의 문이 있다. 예술의 문에는 손잡이가 다섯 개, 삶의 문에는 손잡이가 없다. 질문을 풀어야 들어갈 수 있는 예술,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돌아나올 수 없는 삶. 가운데에는 의자 다리 하나가 화분에서 기이하게 자란다. 설명보다 먼저 웃음이 오고, 그 뒤에 불안이 남는다.
김범의 '풍경 #1'에는 풍경이 없다. "이 푸른 하늘을 보시오. 이 나무들을 응시하시오. 여기 흐르는 강을 보시오." 문장만 있다. 그런데 관람자는 읽는 순간 없는 하늘과 나무와 강을 떠올린다. 그림은 사라졌지만 보는 일은 시작된다. 박현기의 '무제'에서는 돌과 사람의 경계가 흔들린다. 작가는 "나는 돌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몸에 적고 돌 사이에 들어간다. 말은 구분하려 하고, 몸은 섞이려 한다.
이런 장면들은 한국 개념미술이 단순히 '생각이 중요한 미술'이었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생각은 머릿속에만 있지 않다. 원을 그리는 손, 젖은 수건을 비트는 팔, 문 앞에 멈춘 몸, 돌 사이에 웅크린 자세, 통장 위에 반복해 적은 "내돈" 같은 말 속에 있다. 개념은 물질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의미를 뒤집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전시는 네 개 장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실제 관람의 흐름은 분류표보다 질문에 가깝다. 장소란 무엇인가. 말은 사물을 설명할 수 있는가. 지도와 시계와 계량기는 정말 객관적인가. 신문과 광고와 통계는 누구의 언어인가. '언어·논리·행위', '사물과 언어', '지도와 측정', '기호의 조정자들'이라는 구획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우리가 믿어온 의미 체계는 얼마나 단단한가.
간담회에서 배명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이번 전시를 "오브제 중심에서 언어 중심의 담론으로 대체되는 한국 현대미술의 개념적 전환을 조명하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그는 관람객이 "시각 중심주의에 균열을 가하고 기존 의미와 영역들 사이의 틈을 새롭게 사유해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한국 개념미술을 단색화와 민중미술 사이의 주변부 실험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이에서 오래 비껴 있었던 또 다른 계보로 꺼내 든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2023년 '한국 실험미술 1960-1970'전이 미국 구겐하임미술관으로 이어졌던 사례를 언급하며, 이번 전시도 해외 미술관에서 선보이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시장 입구의 제목은 끝까지 답을 미룬다. 이것은 개념미술인가, 아닌가. 전시를 다 보고 나와도 답은 깔끔하지 않다. 대신 관람자는 원 하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의식하게 된다. 여기인지, 저기인지, 거기인지. 한국 개념미술이 남긴 질문은 그 모호한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전시 기간에는 출품작에 담긴 개념의 문제를 작가와 함께 나누는 '작가의 수업'이 진행된다. 8월 19일에는 알렉산더 알베로, 레이코 토미 등 국내외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국제 심포지엄 '개념과 미술: 한국과 아시아의 맥락에서'가 열린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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