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세계적 원전 밀집지역인데... 이쯤 되면 의심스럽다
[최경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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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고리원자력발전소. |
| ⓒ 김보성 |
신규 원전 부지로 지정된 영덕과 기장은 핵시설로 인한 갈등과 고통을 오랫동안 겪어온 지역이다. 특히 영덕은 세 차례 핵폐기장 건설 계획을 막아냈고, 신규 원전 건설에도 꾸준히 반대해 왔다. 정부와 지자체가 주민투표 요구를 외면하자 주민들은 2015년 직접 주민투표를 실시했고, 투표율 60.3%, 반대 91.7%로 신규 원전 건설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이는 지역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영덕군민들의 민주적 선택이었다.
영덕의 주민투표는 단순히 원전 건설 계획을 막아낸 사례가 아니다. 원전 유치 과정이 지역사회에 얼마나 깊은 갈등과 상처를 남기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러한 교훈을 되새기기는커녕 또다시 주민들의 뜻을 외면한 채 지역 공동체를 갈등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고 있다.
SMR 부지로 선정된 기장은 이미 국내 최대 규모의 원전 밀집 지역이다. 고리 2호기는 설계수명이 만료된 이후 한수원이 수명연장을 추진해 재가동하고 있으며, 고리 3·4호기 역시 수명 만료되어 정지해 있으나 한수원은 이마저 수명연장을 추진 중이다. 여기에 고리 1호기 해체 작업이 진행 중이고, 인접 부지에는 신고리 원전까지 가동된다.
이처럼 노후 원전과 신규 원전, 해체 원전이 한곳에 집중된 상황 자체만으로도 전례가 없는 상황인데, 거기에 SMR 건설이 추진될 것을 생각하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쯤 되면 기장 주민들의 삶과 안전을 대상으로 SMR의 안전성을 시험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영덕의 민주적 의사와 기장 주민들의 안전 우려를 외면한 채 정부가 원전 건설을 강행하는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산업 성장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다. 그러나 원전 확대의 핵심 명분인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전망은 실제 시장 전망과 큰 차이를 보인다.
정부와 한국전력은 전기사용예정통지 신청을 근거로 2029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약 49.4GW에 이를 것으로 전망해 왔다. 반면 2026년 한국데이터센터연합회(KDCC)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상업용 데이터센터의 정보기술(IT) 전력 규모는 2029년에도 약 1.57GW 수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두 수치는 집계 기준이 다르다. 그러나 약 30배에 이르는 격차는 신청 물량 상당수가 중복 신청이나 가수요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정부도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이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고, 2038년 데이터센터 추가 전력 수요를 최대전력 기준 약 4.4GW 수준으로 전망했다. 결국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급증론은 상당 부분 과장된 측면이 있다.
거대한 신청 규모와 정부가 실제 계획에 반영한 수치 사이의 차이는 신규 원전 필요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요 전망이 부풀려진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게 한다. AI 산업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의 전력 예비율과 발전설비를 고려하면 이를 곧바로 신규 원전 건설의 근거로 연결하기는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이다. AI와 첨단산업의 전력 수요 증가는 앞으로 5~10년 안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원전은 부지 선정부터 환경영향평가, 인허가, 주민 수용성 확보, 건설과 시운전을 거쳐 상업 운전에 이르기까지 통상 15년 안팎이 소요된다. 지금 추진되는 신규 원전이 실제 전력을 공급하는 시점은 2030년대 후반이다. 가장 시급한 시기의 전력 수요에는 사실상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가장 급한 수요를 가장 느린 발전원으로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기후위기 대응 전략으로도, 산업 경쟁력 확보 전략으로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합리적인 수급 정책이라기보다 핵산업계의 숙원을 풀어주기 위한 정책이라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반면 태양광은 수개월에서 수년 안에 설치할 수 있고, 풍력 역시 원전보다 훨씬 빠르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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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일(현지시간) 벨기에 오스텐드 앞바다의 해상풍력단지. 그린피스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전 세계 재생에너지 보급은 기관들의 예상치를 웃돌았으며, 2016년 그린피스가 전망했던 것보다 더 빠르고 저렴하게 확대됐다. 이 분야에서 선도국으로 꼽히는 벨기에는 2009년 이후 북해에 총용량 2.26GW 규모의 해상풍력단지를 9곳 건설했으며 이곳에서 연간 약 8TWh의 전력을 생산해 전체 전력 수요의 약 10%를 충당하고 있다. |
| ⓒ EPA 연합뉴스 |
태양광과 풍력의 발전 단가는 지난 10여 년 동안 급격히 하락했다. 반면 원전은 안전 규제 강화와 건설비 상승으로 비용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신한울 3·4호기 사업비는 이미 12조 원을 넘어섰다. 향후 물가 상승과 공기 지연까지 고려하면 실제 비용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세계 각국이 기후위기 대응의 핵심을 '속도'와 '비용 효율성'에 두고 재생에너지 확대에 나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여전히 10%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세계 평균의 3분의 1 수준이다. 유럽연합(EU)은 이미 전력의 절반 가까이 재생에너지로 공급하고 있으며, 풍력과 태양광만으로 화석연료 발전량을 넘어서는 성과를 내고 있다.
문제는 재생에너지의 잠재력이 아니라 이를 수용할 전력망과 제도, 저장설비 구축에 한국이 충분히 투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규 원전에 투입될 막대한 재원을 재생에너지 확대와 계통 개선에 투자했다면 훨씬 빠르고 효과적인 기후위기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다.
SMR은 더 큰 문제다. 정부는 SMR을 미래형 원전이라 홍보하지만, 경제성과 안전성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상업 운전 사례는 거의 없고 대부분 개발 단계에 머물러 있다. 미국에서 가장 앞선 사례로 꼽히던 뉴스케일(NuScale)의 소형원전 프로젝트(아이다호 국립연구소 부지)마저 건설 비용이 당초 추정을 크게 넘어서며 결국 취소됐다.
국내 i-SMR 역시 표준설계와 인허가 단계에 있어 상업 가동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수조 원의 예산을 들여 상용화를 앞당기려 한다. 이는 재생에너지와 에너지저장장치(ESS), 송전망에 쓰일 수 있는 자원을 불확실한 기술에 묶어두는 일이다. 기후위기 대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검증된 기술을 빠르게 확대하는 것이지, 미래의 가능성에 기대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반대하는 측은 늘 간헐성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이 문제는 빠르게 해결되고 있다. 배터리 가격은 지난 10여 년 동안 급격히 하락했고, ESS 설치 규모는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호주와 미국, 유럽에서는 낮에 생산한 태양광 전력을 저장했다가 저녁 피크 시간에 공급하는 방식이 이미 일반화되고 있다.
배터리 저장장치와 수요반응(DR), 스마트그리드를 결합하면 재생에너지 중심 전력망 구축은 충분히 가능하다.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은 이제 극복 불가능한 약점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관리 가능한 과제가 되고 있다.
반면 원전은 이러한 미래 전력 체계와 구조적으로 충돌한다. 원전은 경제성을 확보하기 위해 24시간 최대 출력으로 가동되어야 하는 대표적인 경직성 전원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전력망에는 빠르게 출력을 조절할 유연성이 필요하지만 원전은 이에 적합하지 않다. 이미 국내에서도 봄철 낮 시간 태양광 발전량이 전체 수요의 절반 수준에 도달하면서 출력 제어가 반복되고 있다. 태양광을 강제로 멈추고 원전을 유지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한수원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전 감발운전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재생에너지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원전 출력을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줄여야 한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연간 수백 회에 이르는 출력 조정이 필요하다면 원전은 더 이상 경제적인 기저전원으로 기능할 수 없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안전성이다. 원전은 본래 일정한 출력으로 운전하도록 설계됐다. 반복적인 감발과 출력 상승 과정에서는 제논(Xe-135) 축적에 따른 반응도 제어 문제와 열피로에 따른 설비 손상 위험이 커질 수 있다. 국내 한빛 1호기 출력 급증 사고 역시 저출력 운전 과정에서 발생한 사례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원전 확대를 동시에 추진하면서 두 체계가 충돌할 경우 그 비용과 위험은 결국 국민이 부담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기회비용을 따져야 한다. 신규 원전과 SMR에 들어갈 수십조 원의 예산과 시간, 인력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그 자원은 태양광·풍력 확대, ESS 구축, 전력망 현대화, 에너지 효율 향상, 수요관리 체계 구축에 쓰일 수 있다. 원전에 묶어두는 순간 재생에너지 전환은 늦어지고, 기후위기 대응의 골든타임은 사라진다.
더구나 지금 한국 전력 시스템의 병목은 발전량 부족이 아니라 생산한 전기를 필요한 곳으로 보내지 못하는 송전망의 부재에 있다. 대규모 재생에너지 잠재량은 호남과 동해안에 몰려 있고, 이를 소비할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는 수도권에 밀집해 있는데, 이를 잇는 송·변전 인프라가 부족해 호남에서 생산된 청정 전기조차 출력 제어로 버려지는 실정이다. 송전 병목을 그대로 둔 채 지방에 원전만 더 지어도 수도권의 전력난과 계통 불안정은 해소되지 않는다.
지역 불평등과 공동체 갈등 반복하는 원전
원전 확대는 해묵은 지역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수도권은 전기를 소비하지만 위험은 지방이 떠안는다. 전력 자립도가 낮은 수도권의 산업과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지방 주민들은 핵사고 위험과 방사성 폐기물, 송전선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송전 병목을 풀겠다며 초고압 송전탑 건설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밀양에서 목격한 주민들의 눈물과 갈등이 이 땅에 또다시 되풀이될 뿐이다.
원전 부지 선정 과정에서 오갔던 보상금과 지원금은 오랜 시간 평화롭던 공동체를 찬반으로 갈라놓았고, 돈으로 이웃을 갈라친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다. 수도권의 불빛을 밝히기 위해 특정 지역의 생명과 환경을 희생시키는 방식은 기후위기 시대가 요구하는 '정의로운 전환'과 균형 발전의 가치에 결코 부합할 수 없다.
기후위기는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중앙집중형 핵발전 체계를 연장할 것인가, 아니면 재생에너지와 저장기술, 분산형 전력망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체계로 전환할 것인가. 세계는 이미 답을 찾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의 비용은 계속 낮아지고 ESS는 빠르게 발전하는 반면, 원전과 SMR은 비용 증가와 안전성 논란, 지역 갈등이라는 오래된 문제를 반복하고 있다. 신규 원전 2기와 SMR 건설 계획은 기후위기 대응에도, 에너지 전환에도, 지역 균형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부는 부풀린 수요 전망과 위험한 공존의 환상 뒤에 숨어 결론을 정해놓고 명분을 끼워 맞추는 행태를 멈춰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핵발전 확대가 아니라 재생에너지 중심의 과감한 전환이다. 정부는 신규 원전과 SMR 계획을 철회하고, 재생에너지·ESS·전력망 혁신에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의 신규 원전 건설 계획 철회를 위해 신규핵발전소저지전국결의대회 "그만 짓자 핵발전소, 부지선정 중단하라!"가 27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열린다. 집회 후 청와대까지 행진이 있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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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7신규핵발전소저지전국결의대회 웹자보 |
| ⓒ 신규핵발전소저지전국비상행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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