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쿠’ 밥솥으로 연극을 해체하다 [제17회 홍진기 창조인상 수상자]
문화예술 부문 - 구자하 공연예술 작가

이 같은 대형무대 작업이 가능해진 건 지난 10여년 간 유럽 무대에서 타협하지 않고 독자적 예술철학을 밀어붙여 왔기 때문. 1984년생인 그는 경기고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졸업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예술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낯선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며 그것을 보편적 예술언어로 풀어내는 데 주력했다. 연극을 희곡과 배우 중심의 장르로 한정하지 않고 음악·영상·기술·다큐멘터리를 결합한 하나의 종합적 예술 행위로 확장해 왔다.
예컨대 2017년 초연한 대표작 ‘쿠쿠’에서 그는 기획·연출·음악·영상·텍스트·퍼포먼스·리서치 등 1인 7역을 한다. 유명 한국 가전 브랜드의 코드를 해킹해서 맞춤형으로 제작한 전기밥솥 세대와 무대에 올라 함께 대화하고 노래한다. “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나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문득 기계 음성이 들렸다. ‘쿠쿠가 맛있는 밥을 완성하였습니다. 밥을 저어주세요, 쿠쿠.’ 그 말에 이상한 위안을 받고 되묻게 됐다. 비인간적 물질과 감정 공유를 하는 시대에 인간만이 배우가 되어야 하는 걸까.”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쿠쿠’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경쟁과 압박·불안의 역사를 압력밥솥이라는 사물에 투영해 관객을 감각적으로 몰입시킨다. 한국 현대사의 경험을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동시대적 질문으로 확장하는 ‘쿠쿠’는 언어 제국주의를 다룬 ‘롤링 앤 롤링’, 문화·예술 제국주의를 성찰한 ‘한국 연극의 역사’ 등과 함께 ‘하마티아 3부작’으로 불리며 유럽 공연계에서 잇따른 공연 요청을 받고 있다. 최근작 ‘하리보 김치’에서는 김치와 하리보 젤리를 매개로 디아스포라와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해, 국적과 문화를 불문하고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2017년 네덜란드 YAA 재단 예술상을 받았고, 2024년 상파울루 국제연극축제 핵심 해외 아티스트로 선정됐다. ‘연극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노르웨이 국제입센상은 올해 그를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혁신적이고 인간적인 연극” “유머와 시, 그리고 기술적 상상력을 통해 정체성과 소속, 식민역사 이후의 삶에 대한 성찰을 열어준다”는 심사평을 냈다. 역대 최연소, 아시아 최초 수상자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을 만드는 게 제 작업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홍진기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지금까지 작가로 살면서 노력한 것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예술가가 되겠다”고 벅찬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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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창조인상은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 발전기에 정부·기업·언론 분야에서 창조적인 삶을 실천하는 데 힘을 쏟았던 고(故) 유민(維民)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2010년 제정됐다. 17회를 맞은 올해의 수상자들은 각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과 함께 혁신적인 창의성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새 비전을 제시해 대한민국의 힘과 긍지를 세계에 떨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심사는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 오준호 KAIST 석좌교수, 유명희 KIST 명예연구원, 김은미 서울대 교수, 주완 금융산업공익재단 이사장, 김봉렬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가 맡았다. 오세정 심사위원장은 “창조인상 수상자뿐 아니라 뛰어난 여러 후보자를 심사하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리더들의 높은 창의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민(維民) 홍진기(1917~86)
한국 최초 민간 방송인 동양방송(TBC)를 설립하고 중앙일보를 창간해 한국의 대표 언론으로 키웠다.
」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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