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맥마흔법 'AI 버전'?…'세계 1등 AI 스타트업' 막은 美정부
정부, 국가안보 이유로 페이블5 등
외국인 접근 금지 조치…동맹국·직원 포함
'세계 1등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앤스로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정면충돌했다. 지난 3월 미 전쟁부(국방부)가 앤스로픽을 '공급망 위험' 대상으로 지정한 지 약 3개월 만이다. 미국 정부는 국가 안보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앤스로픽의 최신 AI 모델 페이블 5·미토스 5에 대한 외국인 접근 금지 조치를 내렸다.
미 정부는 정보·IT업계 전반에 이 같은 조치를 적용하지는 않는다는 방침이나, 업계에서는 AI 모델 자체를 국가 안보 자산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는 시각이 주를 이룬다. 일각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핵 기술 공유를 막기 위해 제정된 '맥마흔법'의 AI 버전이라고 지적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다리오 아모데이 최고경영자(CEO)에게 이 같은 내용의 제한 통보 서한을 직접 보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지난 1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당국자들은 외국 정부나 기업, 개인의 해당 AI 모델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앤스로픽은 즉각 두 모델의 서비스를 중단했다. 러시아나 중국 같은 특정국이 아닌 '외국인'이 제한 대상에 오르면서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파이브 아이즈' 동맹국과 영국 AI안전연구소의 접근도 전면 차단됐다. 접근 금지 대상에는 미국 내외 외국인뿐 아니라 회사 소속 외국인 직원들까지 포함됐다.
정부는 안전장치를 우회할 수 있는 '탈옥(jailbreak)' 가능성을 문제로 지적했다. 앤디 제시 아마존닷컴 CEO가 페이블5의 탈옥 가능성을 미 정부에 알렸고, 백악관은 앤스로픽에 문제를 수정하거나 서비스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앤스로픽은 이에 따라 두 모델 서비스를 중단했다. 그러나 해당 취약점은 다른 AI 모델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수준이며 완전한 탈옥 사례는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극단적인 결정이 내려진 배경을 두고 정부와 회사 설명은 엇갈린다. 백악관 고문인 데이비드 색스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엑스(X·옛 트위터)에 "정부는 아모데이에게 페이블의 탈옥 문제를 수정하거나 서비스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면서 "다리오가 이를 거부했다"고 적었다. 반면 앤스로픽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외국인 접근을 차단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라고 맞섰다.
일각에서는 순수한 국가 안보 조치보다 그동안 AI 무기화를 두고 극심한 갈등을 빚은 트럼프 행정부와 앤스로픽 간 정치적 충돌로 보는 시각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초 모든 연방기관에 앤스로픽의 AI 모델 '클로드' 사용을 금지하고, 앤스로픽을 '공급망 위험 기업'으로 지정했다. 앤스로픽도 미 정부를 제소하며 맞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인 트루스소셜에 앤스로픽을 두고 "절대 급진 좌파적인 '워크(Woke·진보적 가치를 강요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용어)' 기업"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미 상무부 출신인 케이트 코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경제연구실 부실장은 "보안 우려는 이해하지만 백악관의 앤스로픽에 대한 반감이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WSJ에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조치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이번 AI 기술 차단은 '지정학적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눈에 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사태가 미국 정부가 1970~1990년대 디지털 통신 보안 기술인 공개키 암호화의 해외 사용을 제한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짚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암호 기술을 사실상 무기와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결국 시민자유 옹호자들이 승리했고, 대부분의 암호화 기술은 사용·판매·수출이 허용됐다. 이어 이번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 기술 공유를 막은 맥마흔법을 상기시키기도 한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첨단 AI 기술'을 국가전략자산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2일 AI 기업들이 최첨단 모델을 공개하기 전 정부에 사전 접근권을 제공하는 자율 규제 체계를 마련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는 앤스로픽의 AI 모델에 대한 해외 접근 차단 조치를 오픈AI 등 여타 AI 업체로 확대 적용할 계획이 없다고 IT 전문매체 디인포메이션이 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타임지도 과거 미국 정부가 반도체 칩 수출을 제한하기 위해 수출 통제를 활용한 적은 있지만, AI 모델 자체를 대상으로 한 적은 없었다고 짚었다. 특히 이번 명령은 외국 적대세력이 미국산 AI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미국 정부의 노력이 강화됐다는 점, 미국이 AI 모델 자체를 국가 안보 자산으로 점점 더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해외 동맹국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핵심 정보동맹인 '파이브 아이즈' 국가들까지 미토스 접근이 차단되면서 동맹국들 사이에 충격이 확산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짚었다. 영국 AI안전연구소도 예외 없이 접근이 막혔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각국이 미국 AI 의존도를 낮추고 'AI 주권' 확보에 나설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정보기관들의 경우 접근권 회복을 위한 협상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정부에서 AI 정책을 총괄하는 카니시카 나라얀 AI 장관 겸 과학혁신기술부 차관은 자신의 엑스에 "가장 중요한 교훈은 국가 안보와 기술 주권의 미래를 논의할 때 AI 역량에 대한 접근은 핵심적이라는 점"이라며 투자 확대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도 이번 사태를 단순한 서비스 중단이 아닌 AI 주권의 문제로 해석했다. 그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지금 우리가 겪는 상황은 특정 AI 모델에 과도하게 의존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런 가운데 이번 차단이 연내 기업공개(IPO)를 추진 중인 앤스로픽에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평가했다. 앤스로픽은 대표 주관사로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를 택했다. 이 매체는 회사가 올해 10월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관계자를 인용해 전했다. 회사 기업가치는 최근 투자 유치 과정에서 9650억달러(약 1455조원)로 평가됐다. 이로써 앤스로픽은 경쟁사 오픈AI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AI 스타트업에 등극했다.
차민영 기자 bloom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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