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엔 있고 서울엔 없는 3가지...'말도 안 되는 곳에 살고 있다'

정윤영 2026. 6. 1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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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환경생태 현장르포 - 핵발전소와 재생에너지] 에너지식민화에 맞서는 사람들

인류를 구원할 것 같은 기술 문명이 실은 뭇생명을 죽이고, 지역을 초토화하며 공동체를 찢어놓으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AI 산업은 더 많은 에너지를 내놓으라고 우리를 닦달할 뿐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방향을 모르고 전력질주하는 기술 개발을 당장 멈추어야 합니다. 핵발전소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물과 깨끗한 공기, 흙과 이웃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게 생명입니다. 생명으로서 우리가 빼앗기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으려 합니다. 연재는 (사)세상과함께, 길동무가 함께 기획했습니다. <기자말>

[정윤영 기자]

 삼표시멘트의 전신은 1938년에 지어진 오노다시멘트 주식회사이다. 이름을 바꿔가며 80년 넘게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 정윤영
1910년 주권을 빼앗기고, 35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일제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토지조사였다. 삼척은 석탄이 풍부하고 탄질이 좋았다. 1926년 문경탄광에서 시작해 1936년 삼척탄광이 개발됐다. 탄광의 소유권은 조선총독부에 있었고, 삼척에서 나오는 석탄연료는 전쟁에, 또 본토의 자원으로 쓰였다. 석탄 수송을 위해 도계역부터 묵호항까지 철도가 깔렸고, 이는 수탈의 통로가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이 계속되면서 일제는 삼척에 '대단위 북삼중화학공업단지'를 조성했고 시멘트와 비료, 제철공장이 들어서며 삼척은 군수품 보급기지가 됐다. 삼척의 석탄 생산량은 1930년 88만 톤에서 1944년 745만 톤으로 늘었다. 그러나 석탄은 일본인만 개발할 수 있었고 조선인은 탄광에 강제징용되어 거주이전이 제한됐다.

'막장인생'이라는 말이 생긴 때였지만 식민지 공업노동자가 된 농민들이 일제 통치와 강제 부역에 반발하면서 삼척시 근덕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농민회의 저항운동이 일어난 때이기도 했다.
1945년 해방되자 일본의 기술자들은 철수했고 삼척의 철도 운행도 중단되었다. 강제징용된 사람들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본의 재산이던 탄광은 미군정에 귀속되었고, 한동안 멈췄던 탄광은 다시 개광되었다. 탄광을 비롯해 시멘트, 비료공장, 제철공장 등 공업지대로 삼척은 1980년대까지 '에너지의 보고로서 자리매김'('삼척해방전후사' 삼척시립박물관조사연구총서37)했다.

그러나 강제 이주와 토지 수탈, 노동력 착취로 시작한 일제의 식민화는 생태학살, 공동체 파괴와 주민들의 만성 건강 문제를 평생토록 남겨놨다.

핵시설 세 번이나 막아낸 삼척
 2023년 3월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하태성 삼척석탄화력발전소 반대투쟁위 상임대표가 해안 침식의 심각성을 보여주려고 보강 공사장 앞에 서 있는 모습.
ⓒ 김병기
1978년 부산 고리에 핵발전소가 들어선 뒤로 동해안은 세계에서 핵발전소가 가장 밀집해 있는 곳이 되었다. 핵진흥 정책으로 1982년 삼척도 핵발전소 예정 구역으로 고시되었고 1991년, 근덕면 덕산리에 발전소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근덕면은 일제강점기부터 농민회의 저항운동이 거센 곳이었다. 농민들은 울진에 핵발전소가 들어서고 농사지을 땅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부러웠다. 사람들이 마을로 왔고, 집이 늘어났고, 식당들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건설이 끝나자 사람들이 한 번에 빠져나갔다. 핵발전소에 근무하는 사람은 처음만큼 많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주민들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도 들렸다. 울진의 농산물도 팔리지 않았다. 삼척은 땅을, 마을을 지켜야 했다.

백지화 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첫 궐기대회에 삼척 시민 7천 명이 모였다.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는 구호는 문구가 아니라 땅을 지켜야 하는 농민들에게는 현실이었다.

7년간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삭발도 하고 국도를 봉쇄하기도 했다. 끝장을 내겠다는 각오로 LPG 가스통을 들고 정부청사로 향했다. 농민과 시민들의 투쟁으로 1998년 12월 건설예정구역이 해제되었고 근덕면 덕산에는 핵발전소 대신 '원전백지화 기념비'가 세워졌다.

삼척핵발전소 반대투쟁위원회 하태성 상임대표는 백지화 투쟁을 두고 삼척만의 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삼척뿐 아니라 해남 등 전국 9개 지역도 발전소 예정구역 고시가 해제되면서 핵발전소가 확산되는 걸 막은 거예요. 삼척의 첫 번째 반핵 운동이죠."
 영화 ‘헤어질 결심’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부남해변은 핵발전소 건설예정구역이었다.
ⓒ 정윤영
끝이 아니었다. 백지화라는 말이 무색하게 핵발전소 예정지였던 곳은 2005년 핵폐기장 후보지가 되었다. 시민들은 기가 막혔다. 삼척 시의회가 핵폐기장 유치 신청을 의결하는 날, 시의회 앞에는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시의회는 핵폐기장 유치 동의안을 부결시켰고, 삼척은 또 한 번 핵시설을 막아냈다. 그러나 2010년, 끝난 싸움을 다시 해야 했다. 삼척은 80년대 이후 탄광들이 폐광하면서 대체 산업을 찾아야만 했고, 시장이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역의 활성화와 함께 핵발전소가 거론됐다. 그렇다고 핵시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평생을 (핵발전소) 막아왔는데, 다시 들여온다는 건, 내 삶이 부정당하는 거예요. 있을 수 없는 거죠. 싸우자고 다시 모였어요. 이번에는 9년을 싸웠습니다. 2011년 후쿠시마 사고로 핵발전소가 전 지구적 재앙이라는 걸 사람들도 알게 된 거죠. 2019년 6월 백지화시키고 승리의 역사를 또 쓰게 됩니다. 탈핵의 역사죠."

서울에는 없는 세 가지

삼척핵발전소반대 투쟁위가 세 번째 탈핵 투쟁을 하는 동안 삼척에 석탄화력발전소가 들어섰다. 포스코 삼척블루파워 화력발전소가 생긴 곳은 과거 시멘트 공장이었던 폐광산 부지였다.

일제 강점기에 공업지대가 된 뒤로 삼척에는 발전소와 화학공장이 겹겹이 생겼다. 80년째 돌아가는 시멘트 공장과 산에 지은 석탄발전소에 LNG 생산기지까지. 삼척에는 석탄뿐 아니라 태울 수 있는 것이면 뭐든 들어왔다. 폐비닐, 폐플라스틱, 폐타이어 등 '갈 데가 없는' 모든 폐기물이 시멘트공장 소성로로 들어갔다.

환경보건시민센터의 2013년 자료에 따르면 조사 대상이었던 시멘트공장 및 석회석 광산 인근 8개 시·군 중 진폐증과 폐암 등 환경성 질환을 앓는 주민은 삼척이 가장 많았다. 시멘트 소성로가 내뿜는 유해물질과 소음으로 호흡기질환과 난청에 시달리던 삼척 사람들은 이제 화력발전소가 매일 1만 7천 톤의 석탄을 태우며 내뿜는 대기오염물질을 마시며 살게 됐다.

산 중턱에 들어선 화력발전소까지 석탄을 운송하는 거대한 컨베이어벨트가 놓이면서 맹방해변은 사라져 가고, 삼척 시내 어디서나 발전소 굴뚝이 보인다. 전 세계가 탈석탄과 재생에너지 정책으로 전환하는 시대에, 시민들은 '자다가 석탄발전소 한가운데 살게' 되었다.

공장과 쓰레기는 지역으로 가고, 그렇게 만들어진 원료와 에너지는 수도권으로, 서울로 간다. 지역은 산이고 밭이고 시내고 할 것 없이 '어마어마한' 컨베이어벨트와 송전선로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도로마다 덤프트럭이 내달렸다. 덤프트럭이 좁은 시골길을 지날 때마다 귀를 때리는 소음에 대화를 멈춰야 했고, 뽀얀 시멘트 가루가 일었다. 도시에 공장이 있는 게 아니라 공장 안에 도시가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전기를 양껏 쓰고 돈을 버는 동안에 누군가는 오염물질을 들이마시고 땅을 잃고 일상을 박탈당한다. 지역을 서울의 에너지 식민지라고 부르는 이유였다. '말도 안 되는 곳에 살고 있다'며 하태성은 서울에는 없는 세 가지를 얘기했다.

"서울에 가서 깜짝 놀랐어요. 서울에는 세 가지가 없더라고요. 덤프트럭이 없어요. 석탄발전소 당연히 없고, 송전선로도 없더라고. 여기는 일상이란 말이에요."

서울에서, 대낮에, 주거지에 덤프트럭을 이렇게 자주 본 적이 있었나? 거대한 송전탑이 마치 랜드마크처럼 우뚝 서 있는 곳이 있었던가? 만약 우리 집 옆으로 덤프트럭이 달린다면, 한강에 발전소를 짓고 송전탑을 세운다고 하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전기료를 할인받고, 스포츠센터가 생긴다고 좋아할까?
 삼척뿐 아니라 전국의 송전선로는 모두 수도권으로 향한다. 도계에서 묵호항까지 가는 철도가 석탄 수탈의 통로였듯, 전국에서 서울로 가는 송전선로는 한국전력(한전)이 세운 에너지 수탈의 통로였다.
ⓒ 정윤영
땅끝 해남부터 용인까지, 장거리 송전용인 34만 5천 볼트 송전선로 70개와 변전소 29개가 들어설 계획이다. 송전선로의 길이만 3855km, 그 길을 따라 60m짜리 송전탑이 약 8000개가 세워질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가 나서니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특별법'으로 30여 개의 법 인허가, 입지선정위원회나 환경영향평가 등이 간소화됐다. 토지를 강제수용할 수 있는 권한도 있다. 노선이 확정되고 나서야 주민들은 내 집 위에 송전선로가 지나가게 됐다는 걸 알게 된다.

약 72조 원을 들여 전국에 송전탑 8000여 개를 짓겠다는 송전선로 건설사업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포함한 첨단산업단지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송전선로 건설사업에는 국민주권도, 에너지 지산지소(地産地消)도, 국가 균형발전도 보이지 않는다. 국가기간 전력망이 아니라 '수도권 특혜 전력망'이었다.

탈탈탈, 그리고 쇠사슬 줍는 소리

핵시설을 세 번이나 막은 삼척은 신규 석탄발전소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핵발전소를 막았다고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삼척만 막는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지역은 늘 일자리가 필요하고, 그래서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발전소 유치를 공약으로 내걸고, 여기에 찬성하는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들끼리 갈등하게 만든다.

발전소는 초고압 송전선을 필요로 한다. 핵발전소와 석탄발전소, 송전탑은 별개가 아니었다. 지역이 에너지 식민지로 살아가는 한 끝나지 않을 문제였다. 이 고리를, 수탈의 경로를 끊어내야만 했다. 지역 식민화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할 일이었고, 발전소와 송전탑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삼척핵발전소 반대투쟁위원회는 매일 삼척 우체국 앞에서 탈핵, 탈석탄, 탈송전탑을 희망하는 탈탈탈 순례와 피켓 시위를 한다. 천 일을 훌쩍 넘겼다. 최근에는 신규 핵발전소 저지와 석탄발전소 조기 폐쇄, 송전탑 건설 백지화를 요구하는 광화문 탈핵행동도 함께하기 시작했다.

용인 산단을 위한 송전선로 건설사업이 빠르게 추진되면서 해남부터 충남, 대전, 경기까지 20개가 넘는 송전탑 건설 반대 대책위가 꾸려졌고, 지금도 매일같이 생기고 있다. 송전탑과 용인 산단이 별개가 아니라는 걸 확인한 지역 대책위와 전국의 100여 개 단체들이 모여 2026년 1월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재검토와 초고압 송전탑 건설 반대 전국행동'(전국행동)을 출범했다. 더 이상 수도권의 식민지로 살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2014년 6월,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 천막 농성장에는 경찰 공권력의 행정대집행 예고로 밀양 주민들과 연대자들이 모여 있었다. 새벽 3시가 넘어 3천 명 가까운 경찰과 공무원들이 왔고, 거침없이 천막을 철거했다. 밀양 할매들과 연대자들은 천막을 지키려고 서로의 몸을 쇠사슬로 묶어 땅에 누웠다. 천막은 모두 부서졌고, 사람들을 연결한 쇠사슬도 절단기에 잘려 나갔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허탈해할 때 어디선가 절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쓸 거라고, 다시 써야 된다고 밀양 할매가 끊어진 쇠사슬을 주워서 가방에 넣는 소리(김영희, <전기, 밀양-서울>)였다.

밀양 할매들 눈에는 송전탑이 '일본 놈들이 쇠말뚝 박아 놓은 것'(김영희 외, <송전탑 뽑아줄티 소나무야 자라거라">)것처럼 보였다. 일제에 저항했던 삼척 근덕면의 농민들은 핵발전소가 들어선다고 했을 때 목숨을 걸고 투쟁해 막아냈다. 삼척 농민회도, 한전에 맞서 끝까지 싸운 밀양 할매들도 이 땅의 원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송전탑이 박힌 땅은 '나무와 풀, 새와 꽃들의 것'이었고, 우리는 땅에서 나는 걸 먹고 산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있었다.

밀양에는 765kV 송전탑이 들어섰고, 삼척에는 6월 지방선거에 신규 원전과 핵폐기장을 유치하겠다는 공약이 또 나왔지만, 삼척 농민과 밀양 할매들이 알려준 것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있다. 탈탈탈 깃발을 들고 걷는 삼척에서, 전국행동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송전탑 반대 투쟁에서, 밀양 할매가 주웠던 쇠사슬을 본다. 주권을 되찾을 때 에너지 민주주의가, 정의로운 전환이 가능할 것이다. 그때까지 떨어지면 줍고, 잘리면 또 줍고 쇠사슬은 이어질 것이다. 싸움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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