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달리고 산천 헤매고, 전설 같은 '촬영지' 이야기

이완우 2026. 6. 1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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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모내기를 마친 전북 임실 섬진강 상류 들판은 따오기가 노니는 동요 속의 한 장면처럼 평화로웠다.

이준환씨는 옥정호 강변 둔치(초원)에서 촬영한 영화나 드라마 촬영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준환씨는 또한 하운암 방면을 가리키며, SBS 드라마 <자이언트>를 이야기하였다.

이준환씨는 영화 촬영을 마을과 지역 발전을 위한 행사라고 여기고 솔선해서 협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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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임실 운암면 일대 영화·드라마 촬영지 탐방

[이완우 기자]

▲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옥정호 수위가 높아지면 이곳 운암강(섬진강)이 가득 물에 잠긴다.
ⓒ 이완우
지난 12일, 모내기를 마친 전북 임실 섬진강 상류 들판은 따오기가 노니는 동요 속의 한 장면처럼 평화로웠다.

학암마을 어귀에서 이준환(81세)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중년 시절 이 마을에서 십여 년 동안 이장 일을 하였다. 이준환씨는 자동차로 섬진강 옥정호 상류의 향토 탐방을 안내했다. 이준환씨는 평생교육시설 교실에서 배움을 구하는 만학도 '학우'였고, 기자는 담임이자 국어 교사였다. 그러나 섬진강의 역사 문화 탐방에서는 이장님이 지역 속내를 잘 아는 선생님이고, 기자는 기록하는 학생이 되었다.

옥정호로 수몰된 섬진강의 강변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마을이 이어졌고, 기름진 전답이 많았다. 섬진강댐이 조성되고 옥정호가 형성되면서, 많은 마을과 논밭이 수몰되었다. 수몰된 논밭은 자연의 강변으로 돌아가 전봇대 하나 없는 너른 초원이 되어 있었다. 장마철이나 홍수로 옥정호 수위가 높아지면 이 둔치는 강물이 차올라 출렁인다. 학암리를 출발하여 선거리와 입석리, 상운암의 너른 강변 둔치를 차례로 찾아갔다. 이준환씨는 옥정호 강변 둔치(초원)에서 촬영한 영화나 드라마 촬영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영화에 담긴 숱한 풍경들
▲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운암강 상류 수몰 부지 강변. 영화 촬영지.
ⓒ 이완우
학암리 앞에서 선거교를 건너면 바로 선거리 강변 둔치이다. 푸른 강변 둔치와 그 뒤로 강물이 흐르고, 강물 건너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괴석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준환씨는 이 장소에서 영화 <YMCA 야구단>과 <역린>, <명당>의 촬영을 기억하였다.

<YMCA 야구단>은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의 이야기다. 1900년대 초 개화기 동대문 벌판의 야구장과 관중석 세트를 운암면 선거리 강변에서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이곳 선거리 강변 초원은 조선 최초 야구단원들이 푸른 들판을 달리는 배경이 되었다.

<역린>은 정조 즉위 1년, 왕의 암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영화 중 살수(殺手)가 자라난 자연환경이나 무사들이 말을 달리는 야외 벌판 장면 등에서 이곳 수몰 부지 강변의 자연 풍경은 조선 시대의 시공간으로 차용되었다고 한다. <명당>은 왕이 나올 천하명당을 찾기 위해 조선 팔도의 산천을 헤매는 줄거리의 영화다. 인공적인 흔적이 전혀 없는 조선의 광활한 대지와 들판, 나루터 풍경을 찍기에 이곳 강변 둔치는 적합한 무대였다.
▲  임실군 운암면 사양리 옥정호 상류 옥녀동천 수몰 부지. 영화 촬영지
ⓒ 이완우
▲  임실군 운암면 사양리 옥정호 상류 옥녀동천 수몰 부지. 영화 촬영지
ⓒ 이완우
선거리에서 다시 학암리로 나와서 죽치 고개를 넘어 약 12km를 달렸다. 사양리는 옥정호로 흘러드는 옥녀동천이 운암강과 만나는 지점이다.

영화 <궁합>은 옥정호 수몰 부지인 이곳 사양리 옥녀동천 둔치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나랏일의 명운을 걸고 조선 최고의 부마를 찾아 나서는 옹주의 혼례 여정을 담은 이 영화에서, 사양리 강변은 조선 시대 그대로의 무대가 되었다.

이준환씨는 당시의 촬영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 <궁합>에서는 공주의 가마 행렬이 지나갔을 푸른 초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강변 풍경 한가운데로 토사 반출과 성토 공사를 위해 들어선 중장비의 바퀴 자국과 임시 진입로가 길게 길을 내었다. 옥녀동천 하류 멀리 옥정호 붕어섬으로 건너가는 출렁다리 주탑이 보였다.
▲  임실군 운암면 사양리에서 옥녀동천 멀리 붕어섬으로 건너가는 출렁다리가 보인다.
ⓒ 이완우
▲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 붕어섬 풍경. 영화 촬영지
ⓒ 이완우
사양리에서 6km를 달려서, 임실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된 옥정호 붕어섬이 자리한 입석리에 도착하였다. 입석리의 구암마을 앞 강변을 이곳 주민들은 마당벌이라고 불렀다. 강변의 너른 논들이 호수가 되어 물이 가득한 지역이 되었다.

주민들은 MBC 드라마 <동이> 촬영이 예전의 마당벌에서 이뤄졌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 감입곡류 옥정호의 자연은 드라마 초반 천민들의 비밀 조직인 '검계'가 활동하는 강가, 나루터, 도망치던 숨겨진 계곡과 너른 들판 등의 대형 장면을 담아내는 무대가 되었다는 것.

이준환씨는 또한 하운암 방면을 가리키며, SBS 드라마 <자이언트>를 이야기하였다. 하운암은 붕어섬에서 옥정호 물길로 10km를 내려가는 지역이다. <자이언트>는 1970~80년대 강남 개발기를 다룬 현대사 드라마다. 이준환씨는 드라마 초반,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 배경이 되는 '황량한 벌판'이나 '건설 전의 거대한 대지'를 표현하기 위해 옥정호의 물이 빠졌을 때 드러나는 광활한 수몰지(황무지 형태)가 드라마 촬영에 활용됐다고 기억했다.

전설처럼 기억되는 곳
▲  임실군 운암면 하운암 풍경. 영화 촬영지.
ⓒ 이완우
▲  임실군 운암면 상운암, 옛 운암면 소재지. 영화 촬영지. 수몰로 이전하고 성토하여 지형이 바뀌었다.
ⓒ 이완우
옥정호 붕어섬이 있는 입석리에서 5km를 달려 임실군 운암면 상운암의 옛 운암면 소재지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수몰 부지로서 옛 운암면 소재지였는데, 현재의 운암면 소재지로 마을이 이전하고 성토하여 지형이 바뀌었다. 산 쪽으로는 택지와 도로가 들어서고, 하천 쪽으로는 모내기를 마친 너른 논이 보였다. 영화 <강남 1970> 또한 이곳 옥정호의 상운암 강변과 옛 운암면 소재지 마을이 촬영지였다고 한다.

1928년에 운암댐이 축조되고 운암호가 형성되면서, 운암면의 중심이 하운암(운암리, 금기리)에서 입석리 잿말로 옮겨왔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 1965년에 섬진강댐이 준공되고 옥정호가 형성되어 입석리 잿말까지 수몰 지역이 되자, 면사무소와 마을 등 운암면의 중심이 쌍암리의 상운암 마을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당시 설정된 수몰선보다 침수 범위가 위로 높아지고 넓어지면서, 상운암 마을의 운암면 소재지가 홍수가 되면 침수가 되었다. 섬진강댐 정상화 사업으로 수몰선을 더 상향 조정하고, 이곳 운암면 소재지 시설을 현재의 쌍암리 위치로 이전하였다.

이준환씨는 영화 촬영을 마을과 지역 발전을 위한 행사라고 여기고 솔선해서 협조했다고 한다. 사양리 강변의 촬영 세트장에서 밤에 순찰을 돌며 경비를 서는 일도 했다고. 가까운 자택에서 현장 식당도 운영했으며, 중장비를 알선하여 세트장 조성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오지인 마을에서 영화가 촬영되니 주민들이 힘을 합쳐 조력했다고 한다. 동네 주민들이 엑스트라(보조 배우)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준환씨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옹기종기 모여 밥 먹던 모습을 기억하고, 자기가 밤새 추위에 떨며 세트장 지키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향토 탐방길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빛바랜 기억 속에서 영화 제목과 연도를 잠시 뒤엉켜 혼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기억하는 내용의 본질은 틀리지 않았다. 옛 촬영지의 지형이 바뀌고 세트장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이들 장소는 영화 촬영지이자 수몰 이전 마을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섬진강댐 수몰 역사 100년, 그 옥정호에 새겨진 세월만큼 강변 둔치의 영화 촬영 이야기들은 전설처럼 기억되고 있었다.
▲  임실 운암면 선거교, 지역의 향토 역사문화를 이야기하는 이준환 씨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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