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보다 더 힘들었다”…이을용, 아들 직관 포기한 속사정

“경기 내내 조마조마했어요. 내가 뛸 때보다 더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이겼을 땐 얼마나 짜릿하던지, 그 순간 2002년이 떠올랐어요.”
수화기 너머 이을용(51) 전 경남FC 감독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다. 한국이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체코에 2-1 역전승을 거둔 지 이틀이 지났지만, 이 감독은 14일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불과 몇 시간 전 끝난 경기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체코전은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하다. 장남 이태석(24·오스트리아 빈)이 대를 이어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경기라서다.


한국 대표팀 수비수 이태석은 지난 12일 체코와의 북중미 월드컵 A조 1차전에 왼쪽 윙백으로 선발 출전해 약 70분간 그라운드를 누볐다. 이로써 이태석은 아버지 이을용과 함께 한국 축구 역대 두 번째 ‘월드컵 부자(父子)’로 기록됐다. 대를 이어 월드컵 본선에 나간 사례는 차범근-차두리 부자가 유일했다.
이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다. 첫 경기 폴란드전에서 정확한 크로스로 황선홍의 선제골을 도왔고, 튀르키예와 3·4위전에서는 날카로운 왼발 프리킥 골을 꽂아 ‘왼발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도 나갔다. 차남이자 U-23 대표팀 공격수인 이승준(22·용인FC)과 함께 체코전을 지켜본 이 감독은 “생각보다 잘해줬다. 태석이가 뛰는 오스트리아 리그도 장신 공격수들이 많은데, 거기서 쌓은 경험이 체코전에서 발휘됐다”며 “충분히 제 몫을 다 했다”고 평가했다.

이태석(174㎝)은 190㎝가 넘는 거구가 10명이나 되는 체코의 거친 압박과 몸싸움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공중볼 경합에도 적극 가담했다. 현역 시절 이 감독도 파이터였다. ‘을용타(打)’는 지금도 회자된다. 2003년 중국전에서 발목을 걷어 차인 후 상대 선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때려 퇴장당한 일이다. 엄살 부리던 상대를 근엄하게 꾸짖는 표정도 화제가 됐다.
이 감독은 “경기가 끝나고 태석이가 전화해 ‘아빠, 내 경기 어땠어’라고 묻길래 ‘상대 수비를 끌어내는 움직임이 좋았다. 수비할 때 타이트하게 붙어준 것도 잘했다. 더 안정적으로 플레이해야 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내가 유명 선수 출신이라 아들 경기에 가지 않았다. 관계자들이 다 축구계 선후배들인데, 내가 나타나면 부담 주거나 오해받을 수 있어서”라며 “늘 멀리서 응원만 했다. 아버지 그늘 때문에 쉽지 않았을 텐데 대견하다”고 했다.

이태석은 경기 후 “대를 이어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있어 영광이다.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무뚝뚝한 이미지와 달리 두 아들에겐 자상하다. 이승준은 “아버지께서 손수 장을 보셔서 갈비찜과 청국장을 만들어주시는데, 웬만한 원조 음식점 뺨칠 만큼 일품”이라고 했다.
한국의 19일 2차전 상대는 개최국 멕시코다. 이 감독은 멕시코를 상대로 골을 넣고 이긴 경험이 있다. 2002년 1월 미국 골드컵 8강 승부차기에서 첫 번째 키커로 나서 왼발로 골망을 흔들었다. 이 감독은 “지금처럼 하면 멕시코전도 문제없을 것 같다. 나를 빼닮은 태석이의 왼발도 한번 번뜩였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이을용-이태석으로 이어진 부자 월드컵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U-23 대표팀에서 뛰는 둘째 아들이 성인 대표팀까지 올라선다면, 이을용-이태석-이승준 3부자가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된다. 이탈리아 말디니 가문 등 3대 월드컵 출전은 전례가 있지만 3부자 출전은 한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한 번도 없다. 이승준은 “형이 자랑스럽다”면서 “다음 월드컵에선 형과 나란히 태극마크를 달겠다. 축구 최초 ‘삼부자 월드컵’을 만들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애틀랜타=피주영 기자
애틀랜타=피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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