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선관위 사태와 정치의 실종

투표용지 부족 사태 이후 여야 정치권은 선관위를 때리느라 여념이 없다. 유권자가 용지가 없어서 돌아가거나 개표 진행 중에 투표하게 된 것은 선거 관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최악의 참사가 아닐 수 없다. 독립성을 이유로 지금껏 견제의 사각지대에 있던 선관위에 대해서는 존폐 필요성 여부까지 포함한 철저한 조사와 책임 추궁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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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불리만 따진 성급한 여야 공방
정상 투표 유권자 설득 어렵기에
재선거는 문제 해결 아닌 갈등 확대
오세훈 승리에 가슴 쓸어내린 이유
」
그러나 이날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 것은 선관위만이 아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우리 정치권이 보여준 반응은 혼란을 최소화하고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지켜내기 위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여야 모두 정치적 이해관계에 몰두하다가 하마터면 더 걷잡을 수 없는 위기에 빠질 뻔했다. 한번 되짚어 보자.
이번 사태를 접했을 때 처음 떠오른 생각은 법학 교과서에서나 보던 ‘선거 무효 소송’이 현실에 등장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선거에 대한 소송은 두 가지가 있다. 개표 결과가 박빙이라 재검표로 당선자가 바뀔 가능성이 있는 경우 혹은 선거 운동 과정에서 당선자가 불법을 저질렀다고 의심되는 경우에는 낙선자가 ‘당선 무효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이때는 선거 자체의 효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 소송의 근거가 이유 있다고 판정될 때는 당선자만 바뀐다.
그러나 선거 무효 소송은 전혀 다르다. 단순히 당선자 결정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선거 과정 자체에 흠결이 있어서 그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경우 재선거를 해야 한다. 독재정권이 부정선거를 획책하거나 치안이 극도로 불안해서 자유롭게 참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선거를 무효로 해야 할 정도의 하자가 일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선관위의 터무니없는 잘못 때문에 이런 소송이 제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 것이다.
재선거는 그 자체로 국격을 추락시키는 망신이다. 더 심각한 것은 재선거를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선거가 무효가 되더라도 1차 투표의 결과는 남는다. 재선거를 통해 당선자가 바뀔 경우 원래 당선자나 그에게 투표한 유권자들로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가능성을 예측하고 시민들이 법원의 판결에 공개적으로 불복하면서 재선거 거부에 나설 수도 있다. 특히 이번처럼 원래 선거에서 정상적으로 투표한 유권자들에게 아무런 귀책사유가 없는 경우에는 설득이나 이해가 더욱 어려워진다. 투표나 개표를 둘러싼 갈등은 극도로 휘발성이 높다. 재선거를 주장하는 시민들과 반대하는 시민들이 거리에서 충돌하는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이런 생각으로 걱정이 커지고 있을 때 정치권의 첫 반응이 나왔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먼저 나섰다. 그는 서울시의 선거는 오염됐기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하며 진상이 파악될 때까지 개표를 중단해야 하고 진상 파악 결과에 따라 다시 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사무총장은 “국민의힘에서 주장하고 있는 개표 중단과 재투표 얘기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면서 개표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정치적 양극화의 시대에 정치인들의 발언은 지지자들에 의해 증폭된다. 여야의 공방이 오고 가던 즈음 개표 현황은 민주당 정원오 후보가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를 앞서고 있었다. 출구조사에서도 정원오 후보가 우위를 보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민주당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세훈 후보에게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송파, 광진 등의 투표소에서 용지가 부족했다고 하자 댓글 창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양측의 강성 지지자들은 개표 중단과 재선거를 놓고 상호 극단적인 비방을 쏟아냈다. 그 계기를 만든 것이 이런 중대한 사태 앞에서 개표 중단 및 재선거를 놓고 성급하게 다툰 여야 정치권이다.
아침에 나온 개표 결과는 예상을 깨고 오세훈 후보가 상당한 차이로 이긴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정치 평론가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오 후보가 미세한 차이로 지는 결과가 나왔으면 무슨 사태가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얘기가 오고 갔다.
선관위를 개혁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지금까지 그나마 정치적 중립성이 있다고 여겨지던 판사들이 위원장을 맡아 왔는데 이번 사태를 계기로 그런 구조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선거 관리를 맡길 것인지 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집권 여당과 야당의 지지자들은 유불리를 따져가며 갈등을 빚을 것이다. 그것을 조정하고 설득하면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정치의 임무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예상되는 선거 결과를 의식하면서 나온 정치권의 이번 대응을 보면 우리 정치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극히 의심스럽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시험에 든 것은 선관위뿐만이 아니라 여야 정치권 전체다.
금태섭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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