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전 만들어진 카메라, 이런 말까지 한다고? [나의 오래된 사진 이야기]
사진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전통시장과 주변의 일상을 기록해왔다.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통해 사라져 가는 풍경과 기억, 기록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기자말>
[이재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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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ony A7촬영 미놀타의 가장인기있는 AF-C 모델 라인업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귀여운 모델 |
| ⓒ 이재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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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nolta AF V&D촬영 노출차이가 큰 하늘사진이지만 정확한 노출을 보여주었다. |
| ⓒ 이재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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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nolta AF V&D촬영 붐비는 명동의 거리에서 순간적인 스냅은 자동카메라의 매력이다. |
| ⓒ 이재필 |
한때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박찬호 선수의 별명은 '투머치 토커'다.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말이 많다는 유쾌한 뜻이다. 카메라에도 그런 별명을 붙일 만한 카메라가 있다. 필름 카메라 애호가라면 주저 없이 이 모델을 떠올릴 테다. 오늘 산책을 함께하는 주인공은 '미놀타(Minolta) AF V&D'다.
미놀타의 자동초점(AF) 콤팩트 라인업 중에서도 유별난 모델이다. AF-S, AF-V, V&D, Talker까지 이름만 들어도 꽤 거창하다. 1980년대 일본 전자 회사들이 품었던 첨단 기술을 향한 집착이 이 작은 플라스틱 덩어리 안에 가득 담겼다. 카메라를 조금 만져본 사람이라면 모델명 끝에 붙은 'D'를 보며 자연스레 '데이터백(Data back)'을 떠올린다.
필름 우측 하단에 주황색 빛으로 촬영 날짜나 시간을 찍어주던 낭만적인 기능이다. 내 카메라의 D는 수명을 다해 죽어 있었다. 뒷면의 작은 액정은 희미했고 날짜를 새겨주는 기능은 멈췄다. 세월은 인간에게도 그렇지만 정밀한 전자기기에게 생각보다 훨씬 잔인하다.
기계가 말을 건네던 낭만의 시대
이 카메라의 진짜 정체성이자 가장 큰 의문은 바로 'V'에 있다. 뒤판을 무심코 뒤집어 보기 전까지는 나 역시 V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바디 뒷면에 새겨진 작은 사람 모양 아이콘과 촘촘하게 뚫린 스피커 구멍을 발견하고 나서야 헛웃음을 지었다. Voice(목소리). 그렇다. 이 카메라는 말을 한다.
필름이 제대로 감기지 않았을 때, 어두워서 플래시를 터뜨려야 할 때, 피사체와 너무 가까워 초점을 맞출 수 없을 때. 카메라는 내장 스피커로 영어와 일본어 안내를 끊임없이 건넨다.
"Please load the film(필름을 넣어주세요)."
"Too close(너무 가깝습니다)."
스마트폰이나 최신 인공지능 기기의 매끄러운 음성에 비하면 투박하기 짝이 없다.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오는 기계음은 오래된 1980년대 B급 SF 영화 소품처럼 들린다. 전자기술이 모든 것을 미래처럼 보이게 만들던 시절에는 이것이 무척 혁신적이고 자랑스러운 기능이었을 테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삶이 더 편리하고 친절해지리라 믿었던 특유의 낙관주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느릿하지만 다정한 시선
기능적인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을 만들어내는 기술적 구조 역시 당시 기준으로는 꽤 훌륭했다. 35mm F2.8 렌즈는 단순한 보급형 수준을 훌쩍 넘는다. 2.8이라는 조리개 수치는 초보자에게 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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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nolta AF V&D촬영 주머니에서 꺼내 순간을 포착하는 데는 1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
| ⓒ 이재필 |
자동 노출과 오토포커스, 알아서 필름을 감아주는 전동 와인더까지 갖췄으니 나는 마음에 드는 구도를 잡고 셔터만 누르면 된다. 기계 조작이 단순해질수록 역설적으로 프레임 밖 현실 풍경 안으로 더 깊숙이 걷게 된다.
빛과 그림자를 끌어안는 마법
거리의 바쁜 장면을 툭툭 담다 보면 어느 순간 도시의 표정이 달라진다. 명동을 지나 인쇄소가 모여 있던 충무로를 통과하고 신당 방향으로 걸어가면 재개발을 앞둔 낡은 건물들이 나타난다. 시한부로 저렴해진 골목에 작은 카페와 독립 서점이 자리 잡고, 젊은 사람들이 낡은 도시 위에 새로운 시간을 덧칠한다.
거친 질감의 공간은 수백만 원짜리 최신 풀프레임 카메라보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낡은 필름 카메라와 훨씬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지나치게 선명한 디지털 이미지보다 약간의 흐림과 거친 입자, 예상치 못한 빛샘을 품은 필름의 시간이 그 공간이 살아온 호흡과 닮았기 때문이다.
신당의 좁은 골목을 걷다 강한 초여름 햇빛이 콘크리트 벽면에 부딪히는 장면을 보았다. 빛을 등진 그림자는 먹물처럼 짙었고 해를 정면으로 받는 벽은 눈부시게 밝았다. 디지털카메라였다면 어두운 곳의 디테일을 살릴지 밝은 곳이 하얗게 날아가는 것을 막을지 고민했을 테다.
여기서 필름의 위대한 마법인 관용도(Latitude)가 빛을 발한다. 필름은 어두움과 밝음의 차이를 디지털보다 훨씬 넉넉하게 담아낸다. 빛이 강하면 강한 대로,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그 거대한 차이를 한 장의 네거티브 안에 묵묵히 받아들인다. 푸른 구름은 날아가지 않고 골목 안쪽 그림자 역시 디테일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필름의 관용도는 성능을 넘어 세상의 빛을 있는 그대로 껴안는 태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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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nolta AF V&D촬영 평일 낮 동묘의 공간은 주말에 복잡함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했다. |
| ⓒ 이재필 |
"Too dark. Use flash(너무 어둡습니다. 플래시를 사용하세요)."
작은 기계음이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음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나온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 기계의 투덜거림을 듣지 못하지만, 내게는 그 목소리가 묘하게 우습고 애틋하다.
수십 년 전 일본 어느 연구실에서 이 카메라를 설계하던 누군가는 분명 이런 장면을 상상했을 테다. 언젠가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과 기계가 훨씬 가까워지고, 카메라는 사용자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며 사진의 실패를 막아주리라고. 그들이 꿈꿨던 '오래된 미래'는 이 작고 낡은 플라스틱 바디 안에서 숨을 쉰다.
플래시 스위치를 밀어 올리고 다시 셔터를 꾹 누른다. 사진이 찍히고 필름이 다음 장으로 감겨 올라가는 경쾌한 모터음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낡은 도시가 뿜어내는 냄새와 오래된 전자기기의 숨소리가 다정하게 뒤섞인다.
올해의 초여름도 서울의 골목을 천천히 지난다. 나는 이 수다스러운 친구의 목소리를 더 듣기 위해 발걸음을 다시 명동 중심으로 돌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s://brunch.co.kr/brunchbook/mycamera4th)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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