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 오른 사외이사]②30년 제자리…"권한 돌려주고, '파산급' 책임 물어야"

권현지 2026. 6. 1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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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이사 '거수기 방패' 여전…전문가 제언
"보상 현실화하되, 잘못된 결정엔 '개인 배상' 책임 지워야"
이사가 공정성 증명하는 '입증책임 전환' 시급
편집자주
상법 개정으로 사외이사는 '독립이사'라는 새 이름을 달게 됐다. 기업들은 총수들이 맡아온 이사회 의장 자리를 사외이사에게 넘기고 금융지주들도 이사회 독립성 강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름과 형식이 바뀌었다고 견제 기능이 곧바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재계 주요 기업 이사회에서는 사외이사의 반대 의견이 여전히 드물고 금융지주 이사회 역시 최고경영자(CEO)의 의사결정을 추인하는 '거수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외이사가 진정한 독립성을 갖추려면 후보 추천 경로 다변화, 실질적 권한 부여, 평가·공시 체계 개선, 법적 책임 강화 등 구조적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본지는 산업계와 금융권 이사회 운영 실태를 짚고 사외이사 제도가 형식을 넘어 실질적 견제 장치로 자리 잡기 위한 과제를 살펴본다.

상법 개정으로 주주 충실의무가 도입되고 사외이사의 명칭이 '독립이사'로 바뀌는 등 이사회 외형이 선진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 변화는 요원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전문가들은 사외이사에게 권한과 보상을 돌려주는 동시에 잘못된 결정에는 엄중한 법적 책임을 지우는 선진국형 체제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회사가 권한 움켜쥔 관행 깨야

익명을 요구한 한 기업지배구조 전문가는 14일 아시아경제와의 통화에서 "외환위기 이후 사외이사 제도가 도입된 지 30년이 지났음에도 한국 이사회가 제자리를 맴도는 이유는 개별 이사들의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회사가 이사회의 권한을 쥐고 놓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사회에 사외이사 후보 추천 및 선임권(사외이사후보추천위), 외부감사인 선임권(감사위), 경영진 보상체계 수립권(보상위) 등 핵심 권한을 완전히 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대기업 총수들이 적은 지분으로 지배력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구시대적 관행에서 벗어나, 이사회에 전권을 넘기는 '대오각성(大悟覺醒)의 결단'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권한 이양과 함께 독립적인 활동을 뒷받침할 보상 현실화가 병행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개정 상법에 따라 이사들의 책임이 커졌는데 보상이 지나치게 적다면 이사들이 적극적인 경영 감시를 기피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현재 한국 대기업 사외이사의 보수는 미국 대기업의 5분의 1 안팎 수준이다. 이 전문가는 "보상을 대폭 올리는 대신 위원회 가동 시간과 소통 노력을 획기적으로 늘려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받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사회의 권한과 보상 체계를 정비하는 것 못지않게 인적 구성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관계 인사나 로스쿨·회계학 교수 위주의 천편일률적 구성에서 벗어나, 실제 산업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경영진에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산업계 전문가들을 수혈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종철 우리경영연구원장은 "사외이사의 본질적 역할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경우가 적지 않기에 상시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했다면 이사가 직접 증명하라" 

권한과 보상이 올라가는 만큼, 법적 책임의 무게도 무거워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오너의 눈치를 보며 일반 주주에게 손해를 끼치는 안건에 찬성표를 던진 이사에게는 강력한 법적 페널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 원장은 "불합리한 경영 판단과 이해상충 거래에 무비판적으로 찬성한 이사들에게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해 직접 법적 책임을 묻는 문화가 일상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주주대표소송으로 인한 손해배상액과 막대한 변호사 선임 비용은 임원배상책임보험(D&O)으로 담보되지 않아 전액 개인 돈으로 배상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리스크를 시장에 널리 부각시켜야 한다"며 "그래야만 이사들이 적법한 의결 활동을 고민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현행 소송 구조에서는 주주대표소송의 실효성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정보가 차단된 소수주주가 이사의 이해상충을 직접 증명해야 하는 구조에서는 아무리 소송 문화가 확산돼도 '무기'가 없어 실질적인 견제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입증책임 전환'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주주에게 잘못을 밝혀내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혹이 제기된 거래에 대해 이사 스스로 결정의 공정성을 증명하게 하자는 것이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에서는 이미 판례법을 통해 충실의무 위반 사건에서 이사가 직접 공정성을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면서 "떳떳하고 공정한 결정을 했다면 입증책임 전환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입증책임 전환이 자칫 이사회의 과도한 위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한 보완책도 제시됐다. 김 교수는 "이사회가 안건을 결정할 때 사외이사들로만 구성된 독립위원회의 검토·승인을 거치고, 이해관계 없는 소수주주의 승인(MOM)을 얻어내면 공정한 거래로 간주해주는 제도적 연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는 미국 델라웨어주 판례법이 발전시킨 방식으로, 적법한 절차를 밟은 결정에는 사법 심사의 부담을 줄여주되 그렇지 않은 결정에는 엄격한 책임을 묻는 구조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민사 절차에 맞지 않고 오래 걸리는 미국식 디스커버리(증거개시제도) 대신, 충실의무 위반 시 이사가 자기의 공정함을 증명하도록 입증책임을 전환해야 상법 개정이 진짜 날개를 달 수 있다"고 말했다.

권현지 기자 hjk@asiae.co.kr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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