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1/10 크기에 몸값은 1.5조…삼성전기, 실리콘 캐패시터로 AI 큰손 잡는다
MLCC·패키지 기판 이어 첨단 라인업 완성
기생 인덕턴스 100배 낮춰 초고속 제어
삼성전기가 차세대 인공지능(AI) 반도체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히는 급격한 전력 변동과 신호 노이즈를 제어할 해결사로 '실리콘 캐패시터'를 전면에 내세웠다. 기존 적층세라믹캐패시터(MLCC), 반도체 패키지 기판(FCBGA)에 이어 미세 반도체 공정을 접목한 실리콘 캐패시터까지 양산 체제를 구축하면서, 고성능 AI 인프라 시장을 겨냥한 첨단 부품 라인업을 완벽히 완성했다는 평가다.
삼성전기는 지난 11일 제품학습회(SEMinar)를 열고 AI 반도체의 성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실리콘 캐패시터의 핵심 기술력과 중장기 사업 전략을 공개했다. 기술 설명을 맡은 김원기 삼성전기 실리콘 캐패시터 개발 그룹장은 "AI 데이터센터와 모바일 AP, 피지컬 AI 등의 요구 사양이 고성능·고집적·고신뢰성으로 수렴하고 있다"며 "실리콘 캐패시터는 이 세 가지 난제를 동시에 해결할 핵심 소자"라고 강조했다.

캐패시터는 전력을 임시 저장했다가 반도체가 필요로 할 때 찰나의 속도로 전기를 공급하는 '댐(물탱크)'이자, 미세한 전기 노이즈를 걸러내는 '필터' 역할을 수행한다. 멀티코어 병렬 연산이 필수인 AI 반도체는 부하가 걸리는 순간 엄청난 전류를 순간적으로 끌어다 쓰기 때문에 전압이 급격히 널뛰는 현상이 발생한다.
김 그룹장은 이를 아파트 상하수도 시스템에 비유했다. 그는 "가정에서 설거지나 샤워하는 시간이 겹치면 밤에 수압이 뚝 떨어지듯, 데이터센터에서 검색 쿼리를 처리하는 순간 각 부품이 전력을 확 끌어가면 문제가 생긴다"며 "아파트 옥상에 물탱크를 두고 수량을 분배하듯, 전기 회로에서 에너지를 모아놨다가 시간에 따라 일정하게 공급해 전압을 유지해 주는 백업 기능이 캐패시터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기가 양산에 돌입한 실리콘 캐패시터는 세라믹 시트를 쌓아 올리는 기존 MLCC와 달리 D램 제조 공정을 응용했다. 실리콘 웨이퍼 표면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표면적을 극대화한 뒤 내부에 고순도 유전층과 전극을 증착하는 방식이다. 표면적을 극대화 시키는 이유는 숯에서 공기 청정이나 수질 정화를 위해 미세 다공성 구조를 활용하는 이유와 같다. 전기를 저장하는 심장부의 두께가 머리카락 1/10 수준(10㎛)으로 얇기 때문에, 실리콘 웨이퍼의 후면을 갈아내서 두께를 조절할 수 있다.
김 그룹장은 "D램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보 저장을 위해 굉장히 좋은 캐패시터를 만들어 쓰고 있었다"며 "거기서 트랜지스터 부문을 빼고 캐패시터만 가져와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전압과 용량 수준에 맞게 다시 개발한 것이 실리콘 캐패시터"라고 개발 비화를 밝혔다.
불청객 '기생 인덕턴스' 제로화… 고주파·고온서 끄떡없는 안정성실리콘 캐패시터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MLCC 대비 100배 이상 낮은 기생 인덕턴스(ESL)다. 전류가 좁은 관을 통과할 때 관이 떨리거나 신호가 왜곡되는 일종의 회로 속 불청객을 '기생 성분'이라 부르는데, 고속 반응이 필요한 AI 칩셋에서 이 수치가 높으면 치명적인 신호 지연이 발생한다.
김 그룹장은 "기존 MLCC는 구조적 한계로 전기를 주고받는 터미널(꼭지)이 양 끝에 2개 혹은 4~8개 정도만 나오지만, 반도체 기반의 실리콘 캐패시터는 터미널을 60개 넘게 배치할 수 있다"며 "수도꼭지 수십 개를 동시에 틀어 물을 섞는 것처럼 흐름성을 극대화해 기생 인덕턴스를 줄였기 때문에, 대기하다가 급격히 구동하는 현대 AI 서버에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또 전압 변화나 열 변화에 따른 용량 손실이 거의 없어 250도 이상의 가혹한 고온 환경에서도 안정적인 특성을 유지한다. 김 그룹장은 우주항공 분야를 예로 들며 "저궤도 위성은 하루에 지구를 10번 돌면서 절반은 태양열에 노출돼 엄청 뜨겁고 절반은 그늘에서 엄청 추운데, 온도에 따라 성능이 바뀌면 시스템 설계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과설계될 수밖에 없다"며 "실리콘 캐패시터는 환경 변화에도 용량이 일정해 시스템 매칭에 매우 유리하다"고 전했다.
"MLCC와 상호 보완"… 기판 임베디드 시장 '램프업' 가속삼성전기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MLCC 대체론'에 대해서는 명확히 선을 그었다. 김 그룹장은 "초기에 내부적으로 '기존 MLCC 시장을 잡아먹는 것 아니냐'는 논의도 있었지만, 지금은 MLCC로는 시스템 설계가 안 되는 영역을 실리콘 캐패시터가 메워주는 상황"이라며 "오히려 전체 시장 파이를 키우는 상보적 관계"라고 강조했다.
부피를 활용해 대용량과 고전압을 견디는 데 유리한 MLCC와 초소형·고주파 특성에 특화된 실리콘 캐패시터는 경쟁보다는 상보적 관계라는 진단이다. 실제로 최신 AI 서버 구조에서는 시스템 최적화를 위해 두 소자를 혼용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실리콘 캐패시터의 존재감은 기판 내부에 부품을 심는 임베디드 시장에서 확대되는 분위기다. 김 그룹장은 "FCBGA 기판 내부에 실리콘 캐패시터를 내장하는 비즈니스가 이제 막 본격적으로 '램프업(생산량 확대)'되는 단계"라며 "AI 서버와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공급 확대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한편 시장조사기관에 따르면 글로벌 실리콘 캐패시터 시장은 2026년부터 2031년까지 연평균 성장률(CAGR) 18%에 달하는 초고속 성장을 이어갈 전망이다. 삼성전기는 최근 글로벌 대형 기업과 체결한 1조5000억원 규모의 실리콘 캐패시터 공급 계약을 신호탄으로 삼아 고용량·다기능 라인업을 다변화하고 시장 주도권을 선점하겠다는 방침이다.
김 그룹장은 삼성전기만의 독특한 영업 전략에 대해 "패키지 솔루션, MLCC, 실리콘 캐패시터 마케팅 담당자들이 함께 다니며 판촉을 진행하고 있다"며 "고객사 입장에서는 부품 결함 시 제조사끼리 책임을 미루는 리스크를 없앨 수 있고, 현장에서 바로 필요한 전압과 용량이 얼마인지 종합적인 컨설팅이 가능해 개발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게 경쟁력"이라고 밝혔다.
김진영 기자 cam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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