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AI가 못 할걸요"…남들 반도체·데이터센터 몰려갈 때 큰 손들이 찾은 '노다지'[PE는 지금]

김동표 2026. 6. 13. 18:2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큰 손, AI·데이터센터 투자 대세 속
일부 PE는 세탁·세차·장례 등에 투자
AI가 바꿀 '일상'에 베팅

사모펀드 운용사(PE) 센트로이드인베스트먼트는 지난달 상조업체 더피플라이프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선수금 4000억원 규모, 상조업계 6위 사업자다. 반년 전에는 프랙시스캐피탈이 8000억원 규모 4호 블라인드펀드의 첫 투자처로 반려동물 장례업체 21그램을 낙점했다. 모든 자본이 인공지능(AI)과 반도체·데이터센터로 몰려가는 시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PE들이 있다. 이들이 달려가는 곳은 세탁소와 세차장, 상조회사와 반려동물 장례식장 등이다.

돌봄·가사노동의 재정의…'생활 기반 인프라 자산'

국내 1위 세탁 프랜차이즈 크린토피아는 2021년 JKL파트너스에 인수된 뒤 지난 2월 스틱인베스트먼트로 완전히 손바뀜됐다. 주목할 것은 매도 측의 세일즈 포인트다. 3200개 가맹점을 갖춘 이 회사는 '생활 기반 인프라 자산(Lifestyle Infrastructure Asset)'으로 분류돼 시장에 나왔다. 세탁이라는 일상이 도로나 항만처럼 현금이 또박또박 나오는 인프라로 재정의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앞서 나타난 곳은 미국이다. 투자 대상은 집과 여가, 동물 등 '생활' 전반으로 뻗어 있다. 배관과 지붕 수리, 조경, 수영장 관리, 해충방제에 이어 동물병원까지 매물 리스트에 오른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2024년 냉난방공조(HVAC) 업계의 사모펀드 거래는 전년 대비 72% 급증해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2025년에는 전체 산업 M&A가 위축되는 와중에도 이 분야 거래만 늘었다. 아폴로·브룩필드 같은 초대형 운용사까지 가세하면서, 동네 배관공과 동물병원이 월가 자본의 포트폴리오로 편입되고 있다.

한국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크린토피아에 앞서 자동세차 업체 화이어가 2024년 JKL파트너스에 약 800억원에 인수됐고, 올해 들어서는 반려동물 장례(21그램)와 상조로 대상이 빠르게 넓어졌다. 단독주택 중심의 미국과 주거 환경이 달라 그간 기회가 제한적이었지만, 1인 가구와 맞벌이·고령 인구가 만드는 새로운 수요가 빗장을 풀고 있다.

AI 시대의 역설…자본은 가장 아날로그한 곳으로

배경에는 밀어내는 힘과 끌어당기는 힘이 동시에 작용한다. AI와 딥테크 기업의 몸값이 치솟으면서 투자 기회가 제한된 것이 밀어내는 힘이라면, 끌어당기는 힘은 'AI 방어력'이다. 한 PEF 관계자는 "AI가 확산할수록 자동화 압력에서 벗어난 물리적 현장, 신뢰가 핵심인 서비스의 방어력이 오히려 부각된다"고 말했다.

PE들이 초점을 맞추는 'AI 방어력'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물리적 현장성이다. 변기를 뚫고, 지붕을 고치고, 노인의 몸을 일으키는 일은 알고리즘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의 손과 몸을 대체하기 어렵다. 둘째는 신뢰 의존성이다. 장례나 간병처럼 감정과 책임이 개입하는 서비스는 효율보다 '믿고 맡길 수 있는가'가 선택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기준은 글로벌 기관들의 노동시장 예측과도 일치한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간한 '미래 직업 보고서 2025'에서 증가율 1위는 AI·빅데이터 전문가였지만, 일자리 수 기준으로 가장 많이 늘어날 직업은 농업·배달·건설·간병·서빙 등 물리적 현장과 돌봄 노동이었다. 반대로 가장 빠르게 사라질 직업은 계산원, 사무·회계, 데이터 입력, 고객상담(CS) 등 정형화된 업무에 집중됐다. PE가 사들이는 업종과 '늘어날 직업' 목록은 거의 대부분이 겹친다. 자본은 AI가 일자리를 지워나가는 자리가 아니라, AI가 끝내 손대지 못하는 자리에 베팅하고 있는 것이다.

롤업 전략 성과와 그늘

수익성도 좋다. 공식은 비슷하다. 특정 지역·섹터 1위 업체를 인수해 플랫폼으로 삼은 뒤, 주변의 영세 업체들을 상각전영업이익(EBITDA) 5~8배에 사 모아 덩치를 키우고 두 배 이상의 멀티플로 되파는 일명 '롤업(Roll-up)' 전략이다. 영세 업체로 파편화된 시장일수록 싸게 사 모을 수 있고, 대형화 이후 공동구매와 기술 공유로 수익성을 끌어올릴 여지도 크다.

한국에도 이 분야 롤업의 대표적 사례가 있다. VIG파트너스는 2016년부터 상조업체들을 잇달아 인수·합병해 프리드라이프를 1위로 키웠고, 지난해 웅진에 8830억원에 매각하며 원금의 4배 이상을 회수했다. 보유 기간 선수금은 1조3000억원에서 2조6000억원으로 불었다. 프랙시스가 전국 75개 안팎의 개인 운영 반려동물 장례식장을 통합하겠다는 구상도 같은 공식의 출발점이다.

수요의 경직성이 높아 최소한의 현금흐름도 보장된다. IB업계 관계자는 "장례·요양·세탁·수리는 경기가 침체하더라도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는 시장"이라며 "특히나 한국은 미국과 달리 거대 플랫폼이 없어 통합과 효율화의 여지도 큰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1인 가구와 고령화, 1500만 반려인구가 만드는 수요에는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시장이 있다"며 "AI의 자동화 흐름에서 오히려 기회를 찾으려는 시도 또한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상생활과 밀접하다는 점은 양날의 검이 되기 쉽다. 통합에 의한 효율화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그 다음 단계에서 작동하는 것은 효율이 아니라 가격결정력이다. 경쟁자가 줄어든 시장에서 통합된 사업자는 원가를 깎지 않고도 값을 올릴 수 있게 된다. 대체재를 찾지 못한 이용자는 불만을 쌓아갈 수밖에 없다.

생활형 서비스는 본질적으로 B2C여서 한 번의 사고가 브랜드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고, 특히 장례·요양처럼 죽음과 돌봄을 다루는 업종은 '사모펀드가 슬픔으로 돈을 번다'는 정서적 역풍에 취약하다. 규제 강화로 전략적 투자자를 찾기 어려워 엑시트가 PE 간 손바뀜에 의존하는 구조도 한계로 꼽힌다.

김동표 기자 letmein@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