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거제도 무너트린 그 사람... 맞서 싸운 이들이 당한 일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제5공화국의 여야 정치는 일종의 인형극이었다. 1985년 2·12 총선까지의 제도권 정당정치는 민주한국당(민한당)·한국국민당·민주사회당·민권당 같은 관제야당들이 정권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무대였다.
제5공화국 출범(1980.10.27) 이후의 첫 국회의원 선거인 1981년 3·25 총선 당시, 관제야당들은 공천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1990년대에 '꼬마 민주당' 총재였던 이기택의 회고록 <우행(牛行): 내 길을 걷다>에는 "민한당 부총재였던 신상우씨가 훗날 회고한 바에 의하면,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넘겨준 명단대로 공천"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정권은 관제 야당 간의 단일화도 조종했다. 1993년 12월 5일 자 <동아일보> '남산의 부장들 (166)'에 따르면, 관제야당 총재가 출마한 선거구에는 다른 관제야당이 후보를 내지 못하도록 안기부가 물밑 작업을 했다. 민주정의당(민정당)과 관제야당들이 이처럼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여야가 따로 없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제17권은 유치송 민한당 총재의 증언을 기초로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이른바 야당 총재들이 청와대에서 조찬을 할 때 '야당 총재와'라는 말이 나오자, 전두환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야당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1·2·3당이지요.'"
이런 가운데서 전두환은 두 번째로 출마한 선거인 1981년 2·25 대선에서 관제 야당 후보들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선거인단 5278명 중 5271명이 투표하고 5270표가 유효표로 처리된 이 선거에서 민정당 전두환은 90.23%, 민한당 유치송은 7.67%, 국민당 김종철은 1.61%, 민권당 김의택은 0.49%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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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년 9월 당시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온 최규엽씨의 모습. |
| ⓒ 최규엽 |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역량이 직선제 개헌운동으로 수렴되던 이 시기에, 전두환의 인형극 놀음에 맞서 싸운 단체 중 하나가 서울남부지역노동자연맹(남노련)이다. 재단법인 진실의힘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펴낸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의 설명이다.
"1985년 8월 가혹한 노동운동 탄압을 뚫고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탄생했지만, 운동 방향을 둘러싼 의견 차이가 계속됐다. 그러던 중, 대중적인 활동을 목표로 1986년 봄(에) 서노련과는 다른 노선의 조직이 탄생했는데, 이것이 남노련의 전신인 전국노동자임금인상공동투쟁위원회(전노임투)다. '최저생계비 일당 7천 원'을 주장한 전노임투는 대중적 기반의 약화로 곧 중단됐지만, 지역을 기반으로 한 구로·영등포 지역 임금투쟁위원회로 이어졌다. 그 활동의 결과가 1986년 6월 남노련 탄생의 기반이 됐다."
그해 6월이 아닌 8월에 결성됐다는 보도도 있는 이 단체는 고려대 출신 운동권을 기반으로 세를 급격히 불려 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보고서인 <전국 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조사(2차)>는 "이 그룹은 소규모 활동가 조직에서 300여 명 안팎의 동원력을 갖춘 조직으로 양적 성장을 하였다"고 알려준다.
남노련이 직선제 투쟁을 본격화한 것은 아시안게임 폐막(10.5) 이후로 전두환 정권이 민주진영 탄압을 강화하던 그해 10월이다. 국회에서 '대한민국 국시는 통일'이라고 발언한 유성환 신한민주당 의원이 체포·구속(10.17)되고, 전두환이 정권 내부에서 '미국 중간선거(11.4) 직후에 비상조치와 계엄을 선포하겠다'고 발언(10.22)하고, 건대 항쟁(10.28)이 일어나 대규모 연행 사태가 벌어지고(10.31), 전두환 정권이 북한 금강산댐 건설의 중지를 요구(10.30)하며 위기감을 조성한 시기였다.
위 2차 보고서는 "(남노련은) 개헌 투쟁을 위해 1986년 10월 민주헌법쟁취노동자투쟁위원회(민헌노투)를 구성"했다며 "민헌노투는 다른 노동운동세력들과 연대하여 민중민주헌법쟁취노동자투쟁위원회(민민노투)로 흡수되었다"라고 한 뒤 "민민노투는 1986년 11월 29일 열린 서울지역 신민당 개헌 현판식 집회에 참가"했다고 기술한다.
독립운동에 대한 주된 탄압은 농민운동 및 노동운동 진영에 가해졌다. 이 진영의 항일투사들은 대일투쟁을 소작료 거부나 파업 등과 연계시킬 수 있었다. 식민지와 일본 사이의 공급망에 영향을 주는 이런 투쟁은 총독부에 대한 지주·자본가들의 신뢰를 약화시켜 양측의 틈을 벌리는 효과도 있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 진영 항일투사들을 국가보안법의 전신인 치안유지법으로 가혹하게 탄압했다.
정권이 노동운동과 정치투쟁의 결합을 경계하는 양상은 일제 패망 뒤의 독재정권들에서도 되풀이됐다. 산업생산에 영향을 주는 이런 투쟁은 국가 재정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독재정권과 재벌의 제휴에도 흠집을 낼 수 있었다. 남노련 같은 단체가 임금인상투쟁을 넘어 직선제 투쟁까지 벌이는 것은 정권을 한층 긴장시키는 일이었다.
공안기관은 위의 직선제 투쟁 현판식에 참석한 남노련 활동가 2명을 연행했다. 인형극 같은 대통령 간선제에 취한 전두환 정권은 이를 계기로 남노련에 대한 탄압을 키워갔다. 위 2차 보고서는 이때부터 "남노련에 대한 긴 조사"가 이어졌다면서 "조직의 지도부가 대거 수배상태에 놓이게 됐다"고 말한다.
지도부가 타격을 받자, 임시집행부가 구성됐다. 전두환 정권은 이들 역시 체포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 경찰이 아니라 군대를 파견했다. 위 보고서는 임시집행부의 모임과 관련해 "1987년 4월 26일 도봉산에서 모였는데, 40여 명의 '거구의 사내'들이 덮쳐 이 모임에 참가한 지부대표 13명이 일거에 보안사로 연행"됐다고 기술한다. 국군보안사령부가 건장한 남자들을 추려 3대 1의 우세 속에서 남노련 간부들을 체포했던 것이다.
'군인이 사람 잡는 세상'
남노련에 대한 과잉 대응은 이 단체 지도부의 최규엽에 대한 체포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남노련 가족 일동' 명의의 1987년 11월 11일 자 성명서인 '군인이 사람 잡는 세상을 개탄한다'에 이런 대목이 있다.
"최규엽 씨가 연행될 당시 그 현장에는 그의 늙으신 어머니, 그의 처 이덕자 씨, 두 살 된 그의 어린 아들 최요한 군까지 모두 4명이 있었는데, 최규엽 씨 어머니가 '죄 없는 내 아들을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울부짖으며 매달리자, 그놈들은 일가족 4명을 몽땅 강제로 차에 싣고 연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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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년 7년 남노련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김창현 전 울산 동구청장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
| ⓒ 권우성 |
금년 3월 19일에는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위 최규엽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제도를 형해화시킨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운 일은 이처럼 오늘날에 이르러 의로운 싸움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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