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거대 섬유공장은 어떻게 생태 예술센터가 됐을까?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 <기자말>
[이안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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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Sa의 복원 기준은 ‘원형 존중, 흔적 최소화, 생태적 원칙’으로 요약된다. 프란시스코 톨레도와 건축가 클라우디나 로페스 모랄레스가 함께 세운 철학은 건물의 기억을 드러내면서도 복원자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
| ⓒ 이안수 |
방직기와 보일러가 녹슨 채 20년 가까이 방치된 폐공장을 주목한 건 오악사카 출신 예술가 프란시스코 톨레도였다. 그는 구입비의 40%를 직접 출연하고 연방·주 정부와 민간 재단을 설득해 2000년 매입에 성공했다. 5년의 복원 끝에 2006년 CaSa(산 아구스틴 에틀라 예술센터)가 문을 열었다. 지난달, 30여 명의 사진가들이 기록해온 오악사카의 지난 수십년 삶에 관한 대규모 전시에 맞추어 방문했다.
CaSa의 출입문이 없는 초입의 경비실은 거대한 녹슨 철제 원통 구조물은 과거 공장 부지 내에서 사용된 산업용 대형 보일러 탱크였다. 반대쪽에 출입문이 있고 반원형 철제선반이 업무 책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업사이클링 경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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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비실이 보일러 탱크다. 안내판은 녹슨 내후성 강판이고, 기부함은 아크릴 투명 박스다. 멕시코 오악사카 인근 산 아구스틴 에틀라의 예술센터 CaSa는 입구부터 다르다. |
| ⓒ 이안수 |
매주 일요일에는 센터 옆에서 유칼립투스 생태 작은 시장(Mercadito Ecologico Los Eucaliptos)이 열려 지역 농산물과 수공예품 판매가 이루어지고 에코기술·음악에 관한 워크숍이 함께 진행된다.
이 예술센터의 전신은 1883년 스페인 사업가 호세 소리야 트라파가가 설립한 비스타 에르모사 섬유공장이었다. 당시 공장은 600 여대의 직기를 갖추고 450여 명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색의 면사와 면직물을 생산했다. 함께 설립된 인근 수력발전소 라 루스와 후에 추가로 설립된 라 솔레다드에서 공급되는 전력을 활용해 100여 년간 운영되었으나, 글로벌 시장 경쟁력 약화와 산업 구조 변화로 1980년대에 문을 닫았다.
대형 직조기, 보일러, 발전 설비가 산업 폐기물로 방치된 채 20여 년간 잊혀 있던 이곳을 주목한 이는 오악사카 출신 예술가 프란시스코 톨레도(Francisco Toledo)였다. 예술이 지역 주민의 삶과 직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톨레도는 방치된 공장을 폐허가 아닌 공동체 노동과 경제의 역사적 증언으로 보고 공장을 복원해 교육·창작·공동체 활동의 터전으로 만들고자 했다.
환경 보호와 생태적 지속성을 강조한 그는 산 펠리페 산맥의 수자원이 풍부하고 계곡 지형의 자연에 둘러싸인 이 공간을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생태 예술센터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CaSa는 입장료 없이 자율기부형식이다.
공동체가 함께 세운 CaSa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폐공장을 매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프란시스코 톨레도는 구입비의 약 40%를 무상 출연했다. 나머지 비용은 멕시코 연방 정부, 오악사카 주 정부, 민간 재단,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조달했다.
2000년 매입이 성사된 뒤, 2001년부터 5년간 복원과 개보수 공사가 진행되어 2006년 개관에 이르렀다. 막대한 개보수 비용 역시 민관이 공동으로 부담했으며, 현재 운영은 오악사카 주 문화예술부(SECULTA) 산하 기관이 맡았다.
시민들이 향유하는 이 문화공간의 탄생은 공동체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탁월한 예술가의 제안과 주도, 연방·주 정부의 공공 예산 투입, 지역 기반 민간 자선 재단의 참여가 어우러진 경이로운 협력의 결과였다. 오늘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열린 예술 공간 CaSa는 결과 뿐 아니라 그 발상과 과정 자체가 하나의 예술로 느껴지는 여정이었다.
프란시스코 톨레도는 6년에 걸친 복원 기준을 "철저히 생태적이어야 한다"라는 원칙에 두었다. 그는 공장 매입 과정에서 만난 클라우디나 로페스 모랄레스와 협력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학교 견학으로 공장을 방문한 기억을 가진 건축가였다. 톨레도는 용도를 결정하기 전에 매입을 결단했다. 예술학교, 텍스타일 박물관 등 다양한 용도를 구상했지만 궁극적으로 예술센터로 방향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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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전 〈기억하기(Hacer Memoria(s))〉는 30여 명의 사진가들이 기록해온 오악사카의 수십 년간 사회·정치적 사건과 공동체적 기억을 사진으로 재구성한 대규모 전시다. |
| ⓒ 이안수 |
공간의 흐름은 크게 바꾸지 않은 채 전시실·워크숍·도서관·공연장 등 기능별 공간만 분산 배치되었다. 19세기 유럽풍 산업건축 양식 건물은 본래 모습 그대로 재생되었고, 중정과 테라스는 개방형 예술 공간으로 거듭났다.
톨레도와 로페스 모랄레스의 절제된 협력은 산업유산을 생태적 예술로 전환한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생태예술센터 CaSa를 탄생시켰고 복원 과정 뿐 아니라 운영에서도 그 뜻이 지속되고 있다. 판화·사진·직물 워크숍은 친환경 재료와 비독성 현상액을 사용하며, 섬유 작업에서는 식물성 염료를 활용한다. 예술가와 지역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는 생태·예술 교육 프로그램은 지속가능성을 가르치며, 예술 생산 과정에서 환경 영향을 최소화한다.
CaSa 공간과 프로그램
CaSa 사무실에서 디자이너이자 미디어 매니저인 알레한드라를 만나 공간의 현재 기능과 운영 구조,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대해 들었다.
"센터 초입의 작은 녹색 건물 '샬레 갤러리'는 과거 공장 사무소로 쓰이던 곳을 소규모 전시 공간으로 바꾼 것입니다. 본관 1층은 기획 전시장 '갤러리아 플란타 바하'입니다. 사진, 판화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곳이죠. 2층의 넓은 오픈 스페이스 '갤러리아 플란타 알타'는 상설 전시가 설치되어 있기도 하지만 공연 공간으로 활용이 가능한 가변적 공간입니다. 이곳의 창문에는 제지 공방 '탈레르 데 아르테 파펠'과 협업한 설치작품 '1,984장의 색종이 조각'이 붙어 있죠. 연극·무용·콘서트 등이 이곳에서 열립니다. 본관 뒤편에는 레지던시 작가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CaSa는 크게 세 개의 부서로 운영된다. 교육 부문은 레지던시와 워크숍을 총괄하고, 전시 부문은 기획 전시를 담당하며, 편집·디자인 부문은 출판 및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는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하나는 기관 지원형으로, 정부 보조금이나 파트너 기관을 통해 연계되며 체류비와 재료비가 지원된다. 다른 하나는 자비 참가형으로, 숙소와 작업 공간은 무료로 제공되지만 재료비 등 기타 비용은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참여 인원은 한 번에 네 명 이하의 소규모로 운영되며, 시각예술뿐 아니라 희곡 창작, 논픽션 글쓰기, 저널리즘, 북바인딩 등 장르 제한 없이 모든 예술적 장르의 지원이 가능하다.
알레한드라가 언급한 탈레르 데 아르테 파펠은 CaSa와 인접한 친환경 수제 종이 공방이다. 지역의 천연 식물 섬유를 활용해 종이·서적·연·예술품을 제작하는 전통문화 공간으로, 원래는 섬유공장에 전력을 공급하던 수력 발전소 '라 솔레다드' 건물이었다. 발전소가 문을 닫은 뒤 방치되었던 곳을 톨레도가 매입해 복원한 후, 지역 주민들에게 친환경 수제 종이 제조 기술을 교육하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협동조합 형태의 공방으로 재탄생시켰다. 이후 그는 이 공간을 산 아구스틴 에틀라 마을 공동체에 돌려주어 주민들이 스스로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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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Sa는 오악사카의 나들이 명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곳은 멕시코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예술가 프란시스코 톨레도가 자신의 재산과 명성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오악사카의 정체성을 지켜낸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장소다. |
| ⓒ 이안수 |
'샬레 갤러리'에서는 '질감과 색채: CaSa의 펠트 작업'이라는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펠트 제작 워크숍을 통해 진행된 다양한 섬유 예술 작품들이었다. 천연 염색한 양모를 조형적이고 회화적인 질감으로 변형시킨 결과물들로 작가들은 CaSa를 통해 전통적 섬유 기술과 현대적 예술 표현이 만나는 지점을 탐구하고 실험할 기회를 얻었다. 이는 지역 장인과 예술가들이 만나는 접점이다.
'갤러리아 플란타 바하'에서는 기획 전시 '기억(들)을 만들다: 오악사카의 보도 및 다큐멘터리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제목 속 '기억(들)'의 복수형은 개인적·집단적 기억에서 누구의 기억이 기록되고, 누구의 기억이 지워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오악사카 사회의 다양한 집단적 경험을 재구성한 대규모 전시였다.
30여 명의 사진가들이 기록해온 오악사카의 지난 수십 년간 사회·정치적 사건과 원주민·아프로-멕시코·메스티소 공동체의 저항과 폭력, 사회적 상처, 축제와 신앙, 노동과 삶에 대한 시각적 역사였다. 그곳에는 위태로운 시간들, 권력에 의해 지워졌던 기억들이 복원되어 있었다. 오늘 내가 발 디딘 시간의 기원에 관한 기록이기도 했다.
CaSa는 예술을 창작하는 사람,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각 학교 졸업생들의 졸업사진 촬영의 배경이 되고,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즐기는 장소가 되며, 친구들이 소풍을 와서 웃음을 나누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100여 년 전 산업유산의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이 쌓여가고 있었다.
우리는 CaSa 옆 계곡의 물길을 따라 걸어내려와 종이 공방 '탈레르 데 아르테 파펠'에 들렸다. 전시를 통해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걸은 기억은 오악사카로 돌아와서도 계속 따라다녔다.
CaSa는 공간 자체가 예술, 사회, 환경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장소였다. 넓은 공간 구석구석을 걷고 살피면서 '예술센터'라는 이름의 사색과 성찰의 아쉬람을 방문한 듯했다. 무엇보다 프란시스코 톨레도라는 한 위대한 예술가가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공동체에 회향하며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의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가',라고 말 없는 질문을 던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모티프원의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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